Loft Oasis
뉴욕 아니다. 강남 한복판이다. 한 패션 사진가의 자연광 스튜디오. 빛은 잘 들지만 다소 휑한 분위기에서 셔터 소리만 울렸을 이곳에 풀과 나무를 심었다. 물 대신 초록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 오아시스를 지금 만난다.
가장 높이 솟아오른, 바늘잎이 돋은 나무는 아라우카리아다. 호주삼나무라고도 부르는 열대성 상록수. 그 아래는 파파야나무. 뒤쪽으로 올라온 게 반다(양란의 일종)의 잎이며, 아가베아테누아타가 중간에서 힘을 받쳐준다. 붉은 꽃이 핀 식물은 파시아타. 오른쪽 파트는 스투키, 산세비에리아 같은 공기 정화 식물로 채웠다. 가늘게 솟아 있는 식물은 석창포다.
포토그래퍼 김영준. 그의 이름을 안다면, 당신은 패션업계 사람이거나 그 업계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일 거다. 혹은 좋아하는 셀레브러티(전도연, 정우성, 송혜교, 김준수, 유아인 등 정상급)가 있는 팬심 가득한 이거나. 어쩌면 <노블레스>의 열혈 독자일 수도 있겠다. <노블레스> 패션 화보를 통해서도 종종 이름을 드러냈으니. 물론 그의 실물이 지면에 실린 적은 거의 없다. 우리는 김영준이라는 이름을 그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한 피사체의 모습과 동일시한다. 담담하거나 웃는 표정, 감각적인(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스타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선을 잡아끄는 ‘포즈’ 같은. 소위 잘나가는 포토그래퍼인 그가 지난해에 고급 빌라가 즐비한 논현동 주택가에 건물을 한 채 지었다. 땅을 갈고 터를 닦은 후 반듯하고 번듯하게 쌓아 올린 회색 빌딩.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인 이 건물엔 그의 작업 공간인 사진 스튜디오와 오피스, 카페(오픈 예정)가 자리한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강남의 건물주가 된 그에게 친한 지인들은 ‘거부’라고 농을 섞어 말하지만 그는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겸손하게 받아친다. “평생의 작업 공간을 조금 일찍 마련한 것뿐”이라고.
덧붙여 멋 내지 않고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 올렸다고 하는데, 확실히 평범하진 않다. 평소 취향이 명확한 그답게 인더스트리얼풍 요소를 한껏 살렸다. 하이라이트는 3층에 위치한 자연광 스튜디오. 별도의 조명 없이 해의 움직임을 따라 빛과 그림자를 살려낼 수 있는 자연광 스튜디오는 모든 포토그래퍼의 꿈이다. 층고가 5m 50cm, 건물의 2개 층을 합친 높이로 시원하게 위로 쭉 뻗었다. 3면에 창을 내고 싶었지만 규제의 장벽에 막혀 2면으로 만족해야 했다고 하나 이 정도로도 뉴욕의 로프트 같은 느낌을 내기엔 충분한 듯싶다. 천장과 바닥엔 콘크리트와 에폭시의 회색빛을 담아냈고, 벽은 거칠게 마무리한 시멘트에 흰색 페인트만 발라놓았다. 터프한 마감 덕에 남성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날것’이다. 날것의 순수하고 심플한 매력에 많은 이가 동의했지만, 그들은 종종 ‘차갑다’, ‘다소 삭막하다’는 평을 함께 들려주었다. 푸근한 외모에 성격도 서글서글한(일할 땐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돌변하지만) 이곳 주인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 한참을 고민했다고 했다.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일까 하고. 가구를 들여놓는 건 거추장스럽고, 웬만한 소품으로는 휑한 느낌을 메우기 어려울 텐데….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식물이다. 싱그러운 생명체, 몇 개만 들여도 강렬한 초록빛 포인트가 되어 줄 그것!
덩굴식물로 장식한 벽면. 콘크리트의 재질감이 돋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박쥐란을 메인으로 한 센터피스를 올렸다. 의자와 테이블은 La Collecte 제품.

이끼류와 낮게 퍼지는 그린 톤 식물로 연출한 공간. 크고 작은 사각 화기를 율동감 있게 배치했다.
이런 연유로 다듬지 않은 (광)물성 미가 가득한 사진 찍는 남자의 공간에,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해를 마주하고 신나게 광합성할 수 있는 이곳에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식물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번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는 블레스가든의 백선미 대표다. 이 바닥에서 일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시안’이다. 귀보다 눈이, 글보다는 사진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 김영준 실장은 파리의 한 카페에서 찍은 조경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실 식물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해외 출장을 다니며 자연주의 컨셉의 숍과 카페를 보고 식물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식물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나. 그렇지만 틀에 맞춰 깎아놓은 정형화된 정원이나 샤방샤방한 큰 얼굴을 전면에 디미는 꽃 화분보다는 작은 나무 한 그루, 들풀을 꺾어 심은 듯한 화분 등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실제로 집에 화분을 둔 적이 있다고 했다. 화훼원 주인은 “물만 잘 주면 알아서 잘 자랍니다”라고 했는데 그조차 쉽지 않더라고. 보름 이상 장기 출장을 다녀오면 어김없이 시들거리며 생명을 다해 저물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팠다 했다.
오래된 고목을 타고 다육식물인 펜덴스 줄기가 흘러내린다. 바닥에 깐 식물은 그린세텀. 마른 겨울의 느낌과 새봄의 기운이 어우러진 계절의 흐름을 표현한 부분.

이동형 플랜트의 한쪽에는 팔손이 아래 프리지어와 헬리보어, 오렌지재스민, 화이트스타 등 향기 나는 작은 봄꽃을 심어 아기자기한 느낌을 더했다.

박쥐란을 중심으로 틸란드시아, 애란, 립살리스 등을 곁들여 제작한 센터피스. 박쥐란은 햇빛을 받으면 잎의 라인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벽돌을 활용한 가드닝 아이디어. 트리초스 잎을 늘어뜨리고 구멍은 이끼로 채웠다. 알뿌리에서 난 싹이 자라면 봄의 전령인 튤립을 감상할 수 있다
백선미 대표가 제안한 그린 인테리어는 그의 공간과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층고가 높고 빛이 잘 들어오는, ‘축복’받은 이곳의 요건을 십분 활용해 키 높은 나무가 있는 작은 아일랜드 느낌의 이동형 플랜트를 만들었다. 스튜디오 공간의 특성상 다양한 각도에서 구도를 잡을 수 있게 동선을 여유롭게 확보해야 하는 만큼 공간 이동이 가능한 형태를 고안한 것. 잘 휘어지는 합판을 구부려 원형 틀을 만들고 윗면에는 방수 비닐을 깔았다. 바닥 면에는 화분의 무게를 지탱하며 움직일 수 있게 10개의 바퀴를 달았다. 노끈을 꼬아서 손맛이 담긴 줄도 직접 만들어 길게 손잡이처럼 늘어뜨렸다. 규모는 작지만 정원의 모습을 갖췄다. 선이 곧은 나무로 직선의 느낌을 강조했는데, 이 공간의 남성적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파파야 나무를 심은 덕분에 이국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정원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 전면부는 화초 위주지만 자리를 옮기면 수줍게 피어난 봄꽃, 탱글탱글한 알뿌리, 세월의 무게를 견딘 고목과 다육식물도 만날 수 있다. 빈 곳 없이 균형감 있게 꽉 차 있다. 좋은 정원의 원칙을 훌륭하게 따른다. 창과 창 사이 빈 벽면에는 덩굴식물이 자랄 수 있게 격자 망으로 이뤄진 판을 짜주었다. 한쪽 벽 기둥에는 시멘트로 마감한 사각 화기를 배치하고 이끼류와 옆으로 퍼지는 작은 식물을 심었다. 커다란 회색빛 도화지에 초록색을 입히는 예술 작업처럼 진행했다. 태양과 남자,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이 공간에는 이제 새로운, 따뜻한 에너지가 돈다. “상업적 패션 사진을 찍고 있지만 제 꿈은 스티브 매커리 같은 인물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는 것입니다.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따뜻한 인간애를 사진에 담고 싶은 남자에게 식물의 따스한 감성을 더한 이 공간은 분명 좋은 작업 터전이자,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예쁘잖아요. 예쁜 것은 뭐든 좋아요. 제가 최근에 본것 중 가장 예쁜 정원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백선미 대표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아름답고 긍정적인 컬래버레이션이다. 도시 남자의 감성을 채워주는.
이동형 가든 옆에 선 김영준 실장

센터피스 작업 중인 블레스가든 백선미 대표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김황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