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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Kyoung, Shin 신 미경

ARTNOW

신미경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조각가다. 또한 공들여 가짜를 만드는 현대미술가다. 그녀가 만든 모든 작품의 제목은 ‘Translation(번역)’. 비누를 이용해 서양의 유물이나 중국의 도자기, 불상 등을 똑같이 재현해낸다. 그녀가 그렇게 재현한 작품은 대개 부러진 대나무처럼 날카롭고 정교하다. 얼마나 정교한가 하면 작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전시장 스태프에게 제지를 당하는 와중에도 그게 진짠지 가짠지 구분 못할 정도다. 물론 그런 그녀의 작품에도 ‘의역’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실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이라는 걸 알고 나면 관람객은 전보다 한층 유쾌해진다. 아울러 그녀의 ‘거짓’은 이런 질문까지 던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정말 매트릭스의 세계가 따로 없다. 그녀의 서울 작업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18년 동안 비누를 만져온 그녀의 손은 진득한 장인의 그것이라기보다 집요하고 똑 부러지는 새색시 손에 가까웠다.

전시장에서 비누 냄새가 진동하던데 여기도 마찬가지네요. 근데 어떤 계기로 비누로 작업을 하기 시작하셨나요? 1996년 런던에 도착해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간의 제 작업을 다시 한 번 돌아본 거예요. 물론 이유는 있었어요. 당시 런던의 미술 현상이 제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나는 이곳 사람들과 다른 배경에서 자랐고 실제로도 많이 다른데, 어떻게 지금껏 이들과 비슷한 미술을 해온 걸까 하고요. 그런데 그즈음 시내의 몇몇 박물관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어요. 미술사 책에서나 봐온 수백 년 된 유물 조각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됐죠. 그때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조각상의 표면이 전부 비누처럼 보이는 거예요. 오래된 것일수록 겉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더 그렇게 보였고, 그 기억이 머릿속에 깊이 박혔죠. 그때 처음 비누를 만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하면 ‘내 얘기’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뜻밖의 발견을 하신 거네요.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서양 미술은 우월하고 우리가 그걸 따라가는 태도를 보였다는 자성은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선 그렇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보다는 서양의 고전을 조금 틀어서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 비누를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비누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당시 다니던 학교 로비에 18세기 초기의 고전 조각 작품이 하나 있었어요. 7개월 동안 매일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과 똑같은 크기의 비누 조각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작업이 운 좋게도 런던에서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죠. 소문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전시하게 됐고, 시내의 격조 높은 공연장에 작품을 전시하는 기회까지 얻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는 그들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는데, 거기서 온 여자애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걸 만드니까 엄청 신기했겠죠.

Translation Series, Solo Show Haunch of Venison Gallery, London, 2011

Translation-Bronze Era, Solo Show Haunch of Venison Gallery, London, 2011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드나요? 초기엔 일반 세숫비누를 갈아 뜨거운 물로 반죽한 뒤 심봉에 붙이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어요. 그러다 2003년 주조(casting)를 할 수 있는 천연 비누를 쓰면서 복제가 가능해져 화장실에 비누로 만든 조각상을 설치하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이후 도자기, 유리 시리즈가 이어졌고 근래에 들어 풍화 시리즈를 시작했어요. 비누 작업은 애초에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기 때문에 독학으로 하나하나 깨달아야 했어요.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렸고, 지금까지 기법도 많이 변했죠. ‘문명’으로 말하면 소조를 만들던 1996년의 원시시대를 거쳐 주조를 시작한 2003년의 청동기·철기시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게 된 거죠.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 작품들이 그간의 궤적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에요.

지금껏 서양의 수많은 유물을 비누로 ‘번역’하셨어요. 물론 그 안엔 ‘의역’도 있었지만요. 그런데 그 의역이 의도적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재미난 발상인 것 같아요. 원래 번역이란 카테고리 안에 직역도 있고 의역도 있으니까요. 제가 해온 번역은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넓은 범위에 걸쳐 있어요. 오리지널 A와 비누로 만든 B가 있는 노멀한 번역이 있는가 하면, A와 B 사이에 있는 것, 일종의 번역되지 않는 것이 작품이 되기도 하니까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남미 소설 한 권을 공들여 번역했다고 해보죠. 그런데 그걸 읽는 독자가 남미의 문화를 모른다면 아무리 그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제 의역도 마찬가지예요. 서양 조각의 얼굴을 제 얼굴로 바꾼다거나, 유럽에 팔려고 중국에서 만든 화려한 도자기를 투명하게 재해석하는 식으로 의도적인 의역을 하는 거죠. A와 B를 아무리 똑같이 만든다 해도 보는 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하니까요.

작품을 완성하는 속도는 빠른 편인가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80여 점이 전시돼 있는 걸로 아는데, 이곳에도 그 양이 상당해요. 런던 작업실에도 아마 수십 점은 있을 테고요. 작품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금방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비누로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 같은 대작은 대략 7~8개월 걸리는데, 작은 도자기 작품도 그에 못지않거든요. 도자기는 2006년부터 아주 열심히 만들었는데 아직 50점밖에 못 만들었어요. 사실 여기에 이렇게 작품이 많은 건 잘 안 팔려서 그런 거예요.(웃음)

야외에 설치한 ‘비누로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는 작품을 완성한 연도가 ‘진행 중’이라고 표기돼 있더라고요. 그럼 그 상태에서 뭔가 또 변한다는 얘긴가요? 그건 똑같이 생긴 작품을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여전히 계속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은 거예요. ‘좌대 프로젝트’는 지난해 런던에 처음 세웠고,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앞마당에 하나를 더 세웠어요. 올 10월 대만에도 세울 예정이고, 뉴욕 같은 곳에도 세울 생각이에요. 런던에 있는 건 만든 지 벌써 1년이 지났어요. 지금 가서 보면 1000년은 족히 된 유물 조각처럼 보일 거예요.

그런데 작품을 그렇게 야외에 설치해도 문제가 없나요? 비라도 심하게 내리면 일대가 목욕탕으로 변할 것 같은데. 작품이 훼손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원래 유물도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밖에서 별별 일을 다 겪잖아요. 실제 유물에도 박물관 밖의 ‘라이브한’ 시간과 박물관 안의 ‘정지된’ 시간이 있듯, ‘비누로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도 현재 일종의 라이브한 시간을 겪고 있는 거죠. 그러니 어느 정도의 훼손은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작품을 설치한) 일대가 목욕탕으로 변하진 않았어요.(웃음)

Translation-Glass Bottle, 2009

비누로 만든 작품의 특성상 복원은 필수일 것 같아요. 전시장의 작품도 대부분 올해 복원한 것이고요. 혹시 복원 주기가 따로 정해져 있나요? 주기가 정해져 있진 않아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은 전시를 위해 특별히 복원한 거고요. 하지만 예전엔 복원 작업이 필요한 시점에도 기술이 부족해 손을 대지 못했죠. 10여 년 전 소조 방식의 작품을 주로 만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 표면이 마른 작품은 복원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 쓰는 비누는 굳이 힘들여 복원할 필요가 없어요. 천연 비누는 비누 베이스를 한 차례 녹인 다음 다시 굳혀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전에 쓰던 세숫비누처럼 쉽게 금이 가지 않으니까요.

누군가는 작품을 사들여 집에 들여놓고 싶기도 할 거예요. 혹시 작품을 보관하는 적정 온도나 습도 같은 게 있나요? 기본적으로 제 작품은 습기에 굉장히 취약해요. 항상 낮은 습도를 유지해야 하죠. 미술관이나 갤러리처럼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죠. 하지만 제 작품을 실제로 구매한 이라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문가들이 살 테니까요. 전문 컬렉터가 사거나 미술관이 사거나.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어떤 일정이 잡혀 있나요? 가깝게는 11월 런던의 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어요. 내년 여름 영국 링컨에 있는 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선 돌덩이 같은 비누로 석조 건축물 형태의 조각을 만들 계획이 고요. 그 과정을 통해 어쩌면 ‘장소성’과 ‘시간’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이영균(프리랜서) 사진 이효선(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