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Attraction of Riesling
리슬링은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 품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리츠 하크 리슬링 아우슬레제 골트 카프젤을 만드는 귀부 포도
와인 전문가의 역할을 과장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끔 내게 와인 세계에서 ‘진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곤 한다. 내가 리슬링을 언급할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 포도 품종이라며 내가 리슬링을 칭송해온 지 얼추 35년째. 몇 년마다 한 번씩은 와인업계 한구석에서 리슬링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 알자스에서, 1990년대에는 호주에서, 2000년대에는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도 세계적 트렌드가 되는 것을 고집스레 거부하는 와인이다. 맞춤법도 자주 틀리고, 발음도 틀리기 일쑤인 리슬링은 원산지인 독일 이외의 지역에선 그 어디라도 마이너 취급을 받을 운명인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느낀바, 리슬링은 다른 어떤 화이트 와인 포도 품종보다 민감하게 테루아를 반영하며, 예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노 누아의 진정한 경쟁 상대(이 둘은 나란히 재배하는 경우가 흔하다)다. 리슬링은 지형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보관성도 탁월한데,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 못지않게 오래 묵힐 수 있다(언젠가 독일 모젤 지역 리슬링과 보르도 메도크 지방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동일한 시니어 빈티지를 비교, 시음하는 행사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대부분의 리슬링은 강한 알코올 성분 없이도 다채로운 풍미를 전하며, 아마도 이 덕분에 샤르도네보다 음식과 훨씬 잘 어울린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하지만 이런 나의 지식을 대다수 와인 애호가와 공유하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가져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그들을 리슬링 예찬론자로 개종시키려 노력했지만, 리슬링은 개성이 너무 강해 (호불호가 나뉘므로) 모든 소비자에게 그 매력을 어필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슬링의 문제점은 샤르도네나 피노 그리조와 달리 아주 강렬한 풍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잔류 설탕 성분이 지나쳐서(샤르도네와 피노 그리조 와인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하지만 사람들은 리슬링에 보다 날을 세운다), 혹은 오래 숙성하면 일부 제품에서 석유 냄새가 나는 탓에 리슬링을 외면하는 이들도 많다. 독일의 와인 생산 방식과 기후변화에 힘입어 독일산 리슬링이 더욱 다양한 스타일로 폭을 넓히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유별나게 개성이 강한 포도의 맛을 기피하는 실정이다.
리슬링의 품질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에 이런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독일산 리슬링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설탕물에서 벗어나 가혹할 정도로 드라이한 맛까지 다양한 단계의 단맛을 갖춤으로써 훌륭한 식전 와인으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독일산 리슬링 중 60%가 드라이하거나 하프 드라이한 맛이며 고급 부르고뉴산 화이트 와인(어떤 이들의 평가로는 그 이상)처럼 음식과의 매치도 자연스럽다. 이토록 뛰어나고 완숙미 있는 리슬링 와인이 탄생한 배경은 와인 생산자의 의지와 기술력뿐 아니라 기후변화의 영향도 컸다.
뉴질랜드 말버러 지역의 프래밍엄 와이너리. 오른쪽은 이곳의 리슬링 삼총사. 오프드라이 스타일로 진한 과일 향과 균형 잡힌 산미, 미네랄의 여운이 이어지는 클래식 리슬링, 밝고 명료한 리슬링으로 복합적인 향미와 함께 단단한 구조감을 느낄 수 있는 드라이 리슬링, 레몬 제스트와 오렌지 마멀레이드, 꿀의 달콤함을 품은 노블 리슬링.
20세기 말 독일의 와인 생산자들이 리슬링의 완숙도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끝에 일부 샘플에서 알코올 성분을 14%(일반적으로 독일산 리슬링의 알코올 도수는 8~10%)까지 끌어올렸고, 이들은 아우슬레제 트로켄(드라이한 맛의 아우슬레제라는 뜻)이라는 기존에 없던 상표를 달고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이러한 방식의 오류를 목도한 이후(아우슬레제는 독일의 와인 등급에서 중간 정도 단맛을 지닌 와인을 칭하므로 뒤에 트로켄이 붙어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생산자가 적절히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양상이다.
라인 강 건너 알자스 지방의 와인 생산자는 새로이 등장한 민트 향을 풍기는 독일산 리슬링과의 경쟁에서 압박을 느낀 나머지 알자스 리슬링의 미덕을 강조하는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또한 리슬링 양조에 관한 규정을 세밀히 정비해 전 세계 소비자에게 알자스 리슬링도 정말로 드라이한 풍미를 지닐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유럽에서 리슬링 와인을 생산하는 또 하나의 주요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과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1990년대 후반에 나온 일부 리슬링의 경우 알코올 성분이 너무 강해 느끼하고 맥 빠진 맛을 보였다. 하지만 금세기 들어 오스트리아 와인 생산자들은 더욱 신선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 중이다. 2011년과 2012년에는 고온의 날씨로 인해 진땀을 뺐지만(리슬링은 서늘한 기후에서 천천히 익는 만생종 품종이다), 2013년에는 좀 더 정상적인 속도로 포도가 익어 크게 안도했다.
19세기 슐레지엔 지방(현재는 폴란드의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령)의 종교 문제로 대거 난민이 유입된 호주는 독일 이외의 국가 중 어느 나라보다도 넓은 지역에서 리슬링을 재배한다. 그렇지만 한동안 호주 남부의 리슬링이 약간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듯 보였다. 샤르도네를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상당수가 미국의 식품업체 웨이트워처스사로 넘어가면서 극적으로 몸집을 줄였는데, 리슬링은 또 다른 의미의 고난을 겪어야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꽤나 낙담했다. 호주산 리슬링이 강철 갑옷을 두르고 그 안에 본모습을 꽁꽁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을 기점으로 호주 서부와 빅토리아 지방을 비롯해 클레어와 이든밸리에서 리슬링 품종의 기질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드라이한 맛의 세계 최고급 리슬링 와인이 호주 땅에서 난다.
뉴질랜드에서는 균형이 잘 잡힌 리슬링을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당수의 와인에서 약간 느글거리는 맛이 났다. 하지만 현재 피노 그리가 불러일으킨 아로마 열풍에 편승해 고급스러운 키위 향의 리슬링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특히 말버러 지역에서 생산한 프래밍엄 와인의 열혈 팬으로, 레인지별로 다채로운 리슬링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세계 어느 곳보다 리슬링 와인의 혁신에 기여한 나라는 미국이다. 화려하고 진귀한 독일의 모젤 와인으로 유명한 에르니 루젠이 워싱턴 주의 선구적 와이너리 샤토 생미셸과 함께 에로이카 리슬링을 선보여 큰 성공을 거두자, 캘리포니아 주의 와인업자들까지 리슬링을 심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리슬링을 재배하는 포도원의 총면적은 2003년에 비해 2012년에는 2배 이상 늘어났고, 캘리포니아 주와 워싱턴 주 사이에 있는 오리건 주에서도 리슬링을 샤르도네만큼 많이 재배한다. 리슬링 와인의 새로운 발전 양상에 대해 많은 이들이 흥분했다. 뉴욕 주의 핑거레이크스 지역과 미시간 주에서도 리슬링은 ‘특산품’으로 급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미국 내 리슬링 와인 열풍이 김이 빠질 듯한 징후가 포착된다. 루젠의 미국 현지 측근인 커크 윌리도 미국산과 수입산 리슬링 와인의 판매율이 모두 하락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개성 강한 리슬링은 한 번에 한 사람의 고객만 끌어들일 수 있는 와인이어서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샤르도네나 피노 그리조보다 확실히 판매하기 어렵다. 많은 판매상이 영업을 시도하다 지쳐서, 조지아 와인이나 슬로베니아산 와인 같은 신생 품목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 이런, 세계적 판매 동향을 보니 노르웨이의 와인 애호가만이 정말로 리슬링의 미덕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Editor’s Recommendation
1에로이카 리슬링 독일 리슬링의 대표 와이너리 닥터 루젠과 미국 워싱턴 주 샤토 생미셸의 협업으로 탄생한 와인. 은은한 계피 향과 달콤한 과일 향, 너트와 라임의 풍미가 인상적이며 당도와 산미의 조화가 아주 뛰어나다. 길진인터내셔날 2프리츠 하크 브라우네베르거 유퍼 존네누어 리슬링 아우슬레제 골트 카프젤 독일의 10대 와이너리로 꼽히는 프리츠 하크에서 만든 모젤 지역의 정수와도 같은 리슬링 와인이다. 최상의 귀부 포도가 선사한 정교한 밸런스, 최고로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50년 이상 숙성 잠재력을 지닌다. 길진인터내셔날 3투 핸즈, 더 보이 로버트 파커가 ‘지구 남반구에서 가장 좋은 와인 메이커라 극찬한 남호주의 투 핸즈 와이너리에서 선보이는 리슬링 와인. 그린 애플, 펜넬, 레몬의 향기로운 아로마를 풍기며 섬세하고 깔끔한 맛으로 고전적인 이든밸리 스타일을 보여준다. 빈티지코리아 4가트 하이 이든 리슬링 서늘한 기후를 갖춘 남호주 바로사밸리의 고원에 위치한 이든 스프링스 포도원에서 자란 리슬링만 사용해 만든 산뜻하면서도 드라이한 미감을 지닌 와인이다. 대한민국 대표 소믈리에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최고의 와인을 선정하는 코리아 와인 챌린지 실버 메달을 수상했다. 까브드뱅 5위겔 리슬링 주빌레 1639년에 설립, 명실상부한 알자스의 와인 아이콘이 된 위겔 패밀리 와이너리. 위겔이 소유한 그랑 크뤼 포도밭에서 좋은 빈티지만 선별적으로 생산(10년에 세 번 정도)하는 와인이다. 알싸하고 짜릿한 드라이 리슬링으로 복잡미묘한 개성이 잘 살아 있다. 나라셀라 6살로몽, 운트호프 쾨글 리슬링 오스트리아 최고급 와인 반열에 오른 살로몽 와이너리의 시그너처 리슬링. 시시각각 교차되는 꽃과 과일의 향기, 입안을 가득 채우는 산미와 볼륨감이 인상적이다. CSR와인 7발타자르 레스, 리슬링 모노폴레 12세기에 시작, 독일 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슐로스 라이하르츠하우젠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만 사용해 양조한다. 복숭아 향과 열대 과일 향이 풍성하며, 끈적이지 않는 당도와 생기발랄한 산미가 균형을 이룬 아주 맛있는 와인. CSR와인
잰시스 로빈슨
영국 출신의 세계적 와인평론가이자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글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