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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위스키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할 때. 동양의 신비주의를 간직한 일본 위스키, 높은 품질과 개성으로 무장한 미국 위스키의 성장세가 무섭다. 위스키업계의 차기 패권을 누가 가져갈지 흥미로운 대결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왼쪽부터_ 버번의 명가 브라운 포맨에서 정통 버번의 명맥을 잇기 위해 만든 우드포드 리저브. 부드럽고 강한 바닐라 향이 일품이며 너트와 당밀의 달콤한 맛이 오래 지속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브랜드 니카의 요이치 20년. 스카치위스키의 주조법을 계승했지만 이를 뛰어넘는 폭발적인 향과 달콤한 끝맛을 자랑한다. 프리미엄 버번의 전설 윌리엄 러루 웰러. 버번위스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풍미를 응축한 듯한 강렬함을 선사한다. 셰리 오크통에서 25년간 숙성한 산토리의 슈퍼 프리미엄 위스키 야마자키 25년. 복잡하고 중후하지만 야마자키 특유의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했다. 자타공인 최고의 숙성 싱글 몰트위스키 중 하나.
가장 꾸준히 팔리는 위스키에 관한 책 중 하나가 짐 머리(Jim Murray)의 <위스키 바이블>이다. 2015년판 <위스키 바이블>이 선정한 최고의 위스키 1~3위에 일본 위스키와 미국 위스키가 랭크되었다. 15년간 매해 수백 가지 위스키를 테이스팅하고 점수를 매겨 온 정성과 꾸준함(물론 상당히 전문적이다)에 많은 소비자와 위스키업계 관계자가 그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사실. 이번 결과는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1976년 ‘파리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일본 위스키 야마자키 싱글 몰트 셰리 캐스크 2013(Yamazaki Single Malt Sherry Cask 2013)이 당당히 1위에 올랐고, 2위는 윌리엄 러루 웰러 2013(William Larue Weller 2013), 3위는 사제락 라이 18년(Sazerac Rye 18 Year Old)이 차지했다. 일본의 거대 기업 산토리는 재빨리 이 사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어 여러 주류 저널리스트가 스카치위스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위스키 전문가 한 명의 의견을 과장해 해석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일본과 미국 위스키의 품질이 우리에게 친숙한 스카치위스키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다. 최근에 새롭게 주목받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두 나라의 위스키 역사 또한 장대하다. 그야말로 오랜 역사와 노력의 산물이다. 일본에 위스키가 처음 전해진 것은 1853년이다.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페리 제독이 1년 뒤 확답을 주겠다는 일본 관리에게 위스키 한 통을 전해줬는데, 이것이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위스키다. 일본은 15세기부터 증류 기술을 이용했지만 술 양조에는 이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 위스키가 전해지자 일본 주류업계에서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사카 회사 기헤이 아베는 1919년 다케쓰루 마사타가라는 젊은 기술자를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보냈다. 그는 1년간 스코틀랜드의 여러 증류소에서 위스키 양조 방법을 배우고 돌아왔지만 정작 회사에서 위스키 생산 계획을 포기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실망한 그에게 산토리 설립자 도리이 신지로가 찾아와 같이 일할 것을 제의했다. 그렇게 1924년 11월,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첫 번째 위스키 ‘시로후다’는 소비자에게 외면을 당했다. 당시 일본인은 스카치위스키 고유의 스모키한 풍미를 싫어했다. 이에 신지로는 위스키 타입을 바꿀 것을 건의했지만 다케쓰루는 현재의 스타일을 유지해야 한 다고 주장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다케쓰루는 독립을 선언, 스코틀랜드의 기후와 비슷한 홋카이도 지역에 요이치 증류소를 지었다. 이때가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 형성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일본 위스키의 품질이 향상된 이유가 3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양대 산맥의 라이벌 구도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다른 회사끼리 원액을 교류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일본에서는 절대로 원액을 교환하지 않는다. 원액의 가짓수가 위스키 풍미의 다양성을 결정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위해 증류기 모양을 각기 달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두 번째는 효모 발효다. 일본 위스키 회사는 맥주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새로운 효모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위스키 생산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 번째는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미즈나라로 만든 통에서 숙성시키는 것이다. 이 통이 스카치위스키와는 다른 독특한 풍미를 자아내는데 이것이 종종 ‘동양의 신비’로 묘사된다.
1 산토리의 싱글 몰트위스키 야마자키와 하쿠슈를 혼합한 블렌디드 몰트위스키 히비키의 최고 등급 히비키 30년
2, 3, 4, 5 엄선한 소량의 배럴 속 원액만 사용해 높은 품질로 선보이는 짐빔 스몰 배치 시리즈
이에 비해 미국 위스키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초기 청교도가 북미 땅으로 이주해 가장 먼저 만든 술은 럼이었다. 캐리비언 해안에서 흑인 노예가 재배한 사탕수수를 이용해 당밀을 만들었고, 이것이 술의 주원료였다. 이후 서부 개척 시대를 맞아 곡창 지대로 이주하면서 소비하고 남은 곡물, 특히 옥수수를 활용해 술을 만든 것이 오늘날 미국의 상징인 버번위스키의 기원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위스키는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진한 갈색을 내기 위해 위스키 통에 색소는 물론 담뱃재까지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증류소에선 위스키 양조만 하고 정부가 지정한 창고에서 숙성시키는 법(Bottled in Bond, 1897년)을 시행했다. 그 덕분에 어느 정도 품질을 보장하게 되었지만, 미국 위스키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전쟁이다. 금주법 시대를 겪고, 1·2차 세계 대전 당시 술을 만들지 못한 주류업자가 전쟁 직후 위스키 생산을 재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 그들은 국가에서 또다시 위스키 생산을 금지할 것을 우려해 엄청난 물량의 위스키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런 조치는 없었고, 과잉 생산한 원액의 재고를 떠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숙성 기간이긴 위스키가 나오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1984년 미국 위스키 업계는 스카치위스키의 싱글 캐스크를 본뜬 한 통의 원액만 담아 병입한 ‘싱글 배럴’이라는 미국 위스키 장르를 만들었다. 뒤이어 미국에서 가장 큰 버번위스키 회사로 꼽히는 짐빔에서 스몰 배치(Small Batch) 시리즈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름 그대로 소량의 엄선한 오크통에 담긴 원액을 혼합해 병입한 제품으로, 스카치위스키의 싱글 몰트위스키에 비견할 만하다. 이러한 싱글 배럴, 스몰 배치 제품은 기존 버번위스키의 저렴한 이미지를 완전히 깼다. 동시에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가 가장 주목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미국 위스키의 성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 있으니, 크래프트 위스키의 등장이다. 1970년대부터 미국에 하나 둘씩 생겨난 소형 크래프트 증류소가 이제 600개 이상 가동 중이다. 그들은 다양한 재료로 다채로운 모양의 증류기를 사용해 유례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위스키를 만들고 있다. 대표적 예가 홉이 잔뜩 들어간 맥주를 증류시켜 위스키를 양조하는 힐록(Hillrock)과 사과나무를 이용해 훈연시킨 위스키를 만드는 코퍼 폭스(Copper Fox). 이들은 색다른 맛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버번에 관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며, 미국 위스키의 상징인 버번이라는 단어를 과감히 버렸다. 이들처럼 뜨거운 열정을 지닌 많은 젊은이가 관습과 규제를 벗어나 저마다 개성이 담긴 새로운 스타일의 미국 위스키를 빚어내고 있다. 아직 초창기로 10년 이상 숙성한 제품을 만날 순 없지만 앞으로 10년 후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들로 인해 위스키 시장의 ‘대세 지도’가 또 한 번 바뀔 것을 점쳐본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글 유성운(한국위스키협회 사무국장) 사진 박한별 촬영 협조 와이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