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cleo Code
가구 디자인과 디자인 퍼니처는 다르다.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누구의 손을 거치느냐 그리고 공장에서 찍어내느냐, 사람의 손으로 한정 수량만 생산하느냐에 따라 제품과 작품으로 운명이 갈린다. 누클레오는 한 차원 높은 디자인 퍼니처를 만들기 위해 실험하고 도전하는 예술 집단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티스트가 된 디자이너, 피에르조르조 로비노가 있다.
디자인 퍼니처 아틀리에 누클레오, 그곳의 수장 피에르조르조 로비노 ⓒDaniele Ratti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운 여름의 끝. 약 한 달간의 긴 여름휴가를 당연시하는 이탈리아에서 누클레오(Nucleo) 작업실만은 그 관행을 엎고 쉼 없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누클레오를 진두지휘하는 피에르조르조 로비노(Piergiorgio Robino)는 빡빡한 일정 탓에 인터뷰 중에도 줄곧 스태프의 작업을 감독하고 지시해야 했지만, 지친 기색 없이 희열이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샤넬, 펜디, 디올 등 세계적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사랑을 받으며 쇼룸을 화려하게 장식해온 누클레오의 디자인 퍼니처가 디자이너, 조각가, 목수의 손을 거쳐 서서히 완성되고 있었다. 디자인과 예술을 결합한 ‘기능적 예술(functional art)’이라는 독자적 컨셉을 구축한 누클레오. ‘원자력’을 뜻하는 이름처럼 예술과 디자인의 접점에서 폭발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들었다.
19세기 바로크 양식 디자인을 픽셀로 구현한 프레센체 오브제

자신의 작품을 머리에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피에르조르조 로비노
성공한 디자이너를 넘어 아티스트로
디자인과 예술을 대표하는 유럽의 두 나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자취가 매력적으로 섞인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 과거 무기 공장이 있던 비토리오안드레이스 거리(Via Vittorio Andreis)에 둥지를 튼 누클레오가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아티스트의 아틀리에로 변모한 이면에는 이 지역에 팽배한 예술적 감성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로비노는 성공한 디자이너로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학교 IED와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교수로 활약한 인물. 그가 이끄는 누클레오는 한때 제품과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아티스트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가 새롭게 주목한 것은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VVIP를 타깃으로 한정 생산하는 디자인 퍼니처 제작이었다. 디자인 퍼니처 시장은 유니크한 디자인을 소유한다는 이점과 희소성에서 기인한 투자가치 덕분에 유럽의 장기 불황에도 예술 및 디자인 수집가와 투자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출신으로 일반 아티스트보다 공간과 가구에 대한 높은 안목을 갖춘 로비노는 10여 년 전 가구업계의 페기 구겐하임으로 불리는 유명 갤러리스트 니나 야샤르(Nina Yashar)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이끄는 이탈리아 최고의 디자인 갤러리 닐루파(Nilufa)를 통해 매해 아트 바젤, 디자인 마이애미 등 주요 국제 디자인 & 아트 페어에 참가하며 단숨에 이 시장의 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절친한 친구이자 펜디, 제냐, 디올, 지방시 등과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니나 야샤르의 영향으로 누클레오는 갤러리를 넘어 패션 브랜드의 매장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펜디는 이탤리언 아티스트가 디자인해 이탈리아에서 직접 제작하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철학을 공유하기 때문에 누클레오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프랑스 브랜드인 디올과 샤넬의 경우는 컨템퍼러리한 디자인, 실험성과 강렬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답했죠. 개인 컬렉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개인의 문화적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매력을 발견하죠. 컬렉터의 내밀한 취향과 깊이 소통하는 것이 이전에 대중을 기반으로 디자인 작업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매력인 것 같아요.” 지천명의 나이에 성공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모두 경험한 그만이 할 수 있는 비교가 흥미로웠다.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중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우선순위를 정할 순 없지만 그 일을 시작한 당시에는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선택이었죠. 많은 분이 제품과 식품,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하다가 디자인 퍼니처에 집중하는 지금 아쉬운 점은 없는지 물어요. 그런데 한 가지 영역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디자인적 예술성과 창의성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되었죠. 또한 세계적 불황기에 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 디자인 시장을 벗어나 VVIP 대상인 예술 시장을 겨냥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훨씬 여유가 생겼고요.(웃음) 그것은 다시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죠.” 현재 디자인 퍼니처 시장에서 누클레오의 위상은 ‘높은 가격’으로 입증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몇 배가 뛰어오르며 빠른 판단으로 그의 작품을 구입한 컬렉터에게 은밀한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
디자인부터 소재 실험, 작품 생산까지 한 자리에서 이뤄지는 누클레오 아틀리에 전경 ⓒFabio Oggero

프레센체 시리즈 의자

우드 스툴과 엑포시 레진의 절묘한 만남이 돋보이는 스툴
전과 실험, 기능적 예술의 탄생
일반적 아티스트와 달리 로비노의 예술 활동은 디자이너로서 전략적 접근에 기반을 둔다. 과거의 역사에 새로운 소재와 미래적 스토리를 입히는 그의 작업관이 아틀리에 운영에도 적용된다. 2000년대 중반 경제 위기를 겪으며 많은 이탈리아 중소 가구 브랜드가 대기업에 합병, 인수되면서 디자인 산업이 위축되던 상황. 그러나 다수의 디자이너처럼 한탄하며 뒷짐지고 있는 대신 로비노는 디자인 퍼니처로 새로운 노선을 정한 이후 자비를 쏟아부으며 작업실 규모를 키웠고, 소재 실험 도구와 가구 제조 시설을 갖추는 도전을 감행했다. 불황기에 쓸데없는 낭비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소규모 하이엔드 제조 공정을 통해 완성한 누클레오의 가구는 놀라운 매출 성장으로 이어졌다. 디자인부터 소재 개발, 모든 작업 과정에 로비노가 직접 참여하고 최종 단계의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다듬는다. 디자이너, 목수, 엔지니어, 조각가 등 10명의 스태프가 함께 일하는데, 이는 단순히 가구 제작자로만 이뤄진 작업장과 차별화된 모습이다. 재료에 대한 높은 이해와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이들이 합심해 최소 20일, 길게는 3개월 이상 시간을 들여 하나의 작품 같은 가구를 만들어낸다. 강렬하고 화려한 이미지의 누클레오 가구가 내구성과 실용성까지 갖춘 것이 바로 이러한 ‘스태프의 전문성’에서 기인한다. 엄밀히 말하면, 디자인 퍼니처는 디자인보다 예술에 더 가까운 영역이지만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 중에는 디자이너 출신이 많다. 마르텐 바스, 마르티노 감페르, 요리스 라만, 토머스 헤더윅 등. 이는 기능성과 소재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가구의 특수성 때문이리라. 로비노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는 출발점이 다르다”며, “컨셉을 중시하는 아티스트와 달리 디자이너는 예술을 통해 기능을 담으려는 성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기능적 예술’이라 명명한 그는 “일반적 아티스트와 달리 기능을 기본으로 학습해온 디자이너의 차별성을 더해 ‘사용할 수 있는, 기능할 수 있는 예술’을 창작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3D 프린팅으로 구현한 형태에 명반 결정을 입힌 익스트로플렉시드 크리스털

스톤 포실 시리즈 중 제이드(Jade)

옛날 가구에 신소재를 덧씌운 독창적인 형태로 업사이클링을 구현한 ‘Souvenir of the last century’ 시리즈 콘솔
과거와 미래를 잇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 철학
결과적으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했지만 그가 단순히 금전적 목적으로 커리어를 전환한 것은 아니다. 앞선 시대의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분리하고 산업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만의 분야를 창조했듯이 그도 시대적 필요에 따라 새로운 행보를 만드는 것 자체가 디자이너의 숙명이자 과제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누클레오를 디자인 스튜디오 형태로 운영할 때부터 아티스트가 된 지금까지 로비노의 작업관은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맥락을 찾고 대담한 접목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창출하는 것. 누클레오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프레센체(Presenze)는 19세기 바로크 양식 디자인을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픽셀화한 이미지로 구현했다. 수집가에게 가장 사랑받는 포실(Fossil) 시리즈는 과거를 상징하는 돌 또는 목재 같은 전통적 소재의 가구에 현대적 소재 레진을 덧입혀 미니멀한 형태로 재구성해 선보인다. 최근에는 ‘기능’을 단순한 사용성이나 실용성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기능’이라는 개념으로 확대 해석해 아트 피스에 도전하고 있다. ‘익스트로플렉시드 크리스털(Extroflexed Crystal)’이 그 예로, 스툴 형태를 띠지만 실사용은 불가능한 아트 피스다. 3D 프린터로 제작한 틀 위에 명반(明礬) 크리스털을 입혀 자연의 결정 형태를 인공적으로 표현해냈다. 더불어 2002년에 주목받은 야외 가구 테라(Terra)를 새로운 기술로 재창조하는 작업 또한 흥미를 끈다. 테라는 정원에 종이 상자로 만든 의자 형태의 가구를 펼쳐놓고 흙으로 덮은 후 잔디를 입힌 신개념의 디자인 퍼니처. 내구성을 강화한 소재를 활용해 반영구적 그린 디자인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많은 현대미술, 디자인 컬렉터가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으나 정작 로비노 본인은 예술이나 디자인 작품 수집에 관심이 없다. 대신 아프리카의 전통 가면을 수집하는데, 아프리카의 인간적 문화와 미학에 관심이 있다며 가면의 얼굴 표정에 담긴 감정 표현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긍정적 휴머니즘이 녹아 있는 이탈리아의 예술이나 디자인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시대와 나라, 문화를 넘어 이런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덧붙였다. 새로운 나라를 방문하면 꼭 마트에 들러 현지 양념을 사오는 그. 좋아하는 파스타나 바비큐 등에 양념을 넣어 만든 새로운 퓨전 요리를 친구들과 함께 맛본다고 했다. 음식은 그 문화권의 근원적 에너지와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 전통을 통념적인 문헌과 유적으로 탐구하기보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내재된 본질을 읽어내는 것이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제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은 아메리카, 특히 미국 위주의 앵글로색슨 문화권에 집중돼 있어요. 작품에 녹아 있는 제 디자인과 문화적 배경이 그들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스톤 포실 시리즈의 경우 다른 문화권에서도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 어떤 문화권이든 ‘돌’에 대한 기억과 경험만큼은 공통적으로 친숙한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보다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경험과 기억을 다루는, 따라서 다양한 문화권의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전통과 과거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지속적인 노력과 학습을 통해 저만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코드(code)를 구축하는 것이 아티스트로서 제 목표입니다. 다빈치 코드처럼 말이죠.”
스톤의 질감과 유니크한 컬러 구성이 돋보이는 콘솔 작품

닐루파에서 독점적으로 선보인 상감세공을 한 대리석과 철제 소재를 결합한 릴리프(relief) 벤치

누클레오 사람들. 디자이너, 목수, 엔지니어, 조각가 등 다채로운 커리어를 가진 이들이 한데 모였다.
최근 유럽의 장기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 테러와 난민 문제, 브렉시트 등이 세계의 경제 상황을 연달아 크게 흔들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 디자인 퍼니처 시장은 고공 행진을 잠시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라고 로비노가 말한다. 하지만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있고,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조심스레 이전의 핑크빛을 기대한다고. 더불어 오히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경직된 때일수록 예술이 대중에게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예술 활동에 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휴가마저 반납한 채 한여름의 무더위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작업실을 달구는 그의 모습은 그런 사명감의 발로다.
누클레오는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동북아, 특히 한국의 경우 아직 서로에게 미지의 대상이다. 로비노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며 전통과 첨단 기술,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서울의 모습이 자신의 작업관과 흡사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당시엔 첨단 건축물과 IT 기술을 주로 접했지만 다음에 방문한다면 여유를 갖고 한국의 전통을 체험하며 보다 깊이 있게 한국에 대해 학습하고 싶다고. 이 계절에 로비노의 끓어오르는 예술적 열정과 도전정신이 이탈리아와 유럽을 넘어 추풍을 타고 또 다른 문화적 DNA를 지닌 우리에게 와 닿을 수 있기를. 그의 정체성을 담은 디자인 퍼니처와 아트 피스를 통해 큰 감동을 느끼고 소통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