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i Hong Djien 외이 홍 지엔
인도네시아 근 · 현대미술의 허브는 단연 욕야카르타다. 인도네시아 근 · 현대미술 거장은 거의 욕야카르타 대학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도 1000명이 넘는 예술가가 이 도시에 살고 있다. 욕야카르타가 인도네시아를 너머 동남아시아 미술의 중심지가 된 역사를 외이 홍 지엔(Oei Hong Djien) 박사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욕야카르타의 최대 컬렉터로 OHD 미술관을 운영하는 인도네시아 미술 역사의 산증인인 외이 홍 지엔 박사를 만났다. 아직 변변한 인도네시아 미술 역사서도 없는 지금, 그 역사의 산증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1 인도네시아 작가 나시룬과 이야기 중인 외이 홍 지엔
2 OHD 미술관의 전시 전경
컬렉터를 인터뷰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컬렉터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적부터 집 안 곳곳에 미술품을 걸어놓으셨어요. 지금도 제가 그 작품들을 가지고 있지요. 제 사촌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미술평론가로 1950년대에 유명한 미술 잡지사에서 근무했고요. 그러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미술 관계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나셨나요?
네.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엄밀히 말하면 마겔랑(욕야카르타 근교의 소도시)이죠. 제 조상은 중국인이지만 1860년 즈음 증조할아버지께서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셨어요. 제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에서 태어나셨고요. 제가 어릴 적 두 부류의 중국인이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저희 가족처럼 정착한 지 오래된 중국인과 갓 이주해온 중국인이었죠.
두 중국인 사이에 차이점이 있었나요?
제가 태어난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어요. 부모님께서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치하에 있는 동안 네덜란드 교육을 받으셨고 저도 그랬습니다. 집안에선 네덜란드어를 사용했죠. 그러나 새로 이주한 중국인은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고 교육도 받지 못했어요. 저는 서양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서양 미술에 노출됐기 때문에 컬렉션도 일찍 시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욕야카르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요?
사실 엉망이었습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로 쳐들어오고 네덜란드가 쫓겨나면서 학교가 모두 없어졌죠.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했지만 1948년 네덜란드가 다시 쳐들어와 자카르타를 점령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밀려난 인도네시아 정부는 욕야카르타에 임시 수도를 세웠지요. 재미있는 점은 욕야카르타로 옮겨온 수카르노 대통령이 유명한 미술 후원자였다는 겁니다. 컬렉터이자 화가였죠. 자카르타의 예술가들이 그를 따라 욕야카르타로 와서 정착했기 때문에 지금의 욕야카르타가 미술로 유명해지게 된 겁니다.
그렇게 욕야카르타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셨나요?
제가 자카르타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시절, 제 사촌은 미술 잡지사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많은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고 점점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의대 졸업 후 네덜란드로 유학 가 공부하던 중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1968년 마겔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마겔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야카르타의 예술가들이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마겔랑에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난 거죠. 담뱃잎 브로커 사업을 시작하면서 의사로 일할 때보다는 돈이 있었기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어요. 아판디(Affandi, 인도네시아 근대미술 거장)와 친해져 그의 작품을 샀고, 아판디가 데려온 친구들의 작품도 샀죠. 그러다 위다야(Widaya)도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계속 젊은 예술가들과 어울렸어요.
작가들과 친구가 되면서 컬렉팅을 하신 거군요?
‘컬렉팅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친구처럼 어울리다 하나씩 사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작품이 너무 많아져 놓아둘 데가 없었어요. 25년 전쯤 위다야가 저에게 작품을 보여줄 특별한 방이 필요하겠다면서 미술관 설립 아이디어를 냈어요.
1년 전 처음 OHD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박사님께서 직접 미술관을 안내하면서 인도네시아 근·현대미술 역사를 가르쳐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많은 컬렉터를 만났지만 박사님같이 열정적인 분은 없었어요.
모두들 그렇게 이야기해요.(웃음) 많은 사람이 제 컬렉션에 강한 인상을 받아 저를 만나지만 만나고 보면 ‘여든이 다 된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 점이 더 인상적이라고 하더군요. 어제도 태국 대사가 미술관을 찾았는데 저와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다 결국 저녁까지 먹고 갔어요.
사람을 좋아하시나 봐요.
아주 많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예술가를 좋아했는데 음악 하는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죠. 제가 어릴 때 바이올린을 했어요. 오케스트라 리더였고 공연도 자주 했어요. 재미있는 건 우리 집이 항상 클럽하우스 같았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영향이었죠. 어머니가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재혼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 대신 친구, 이웃들과 어울려 지내셨죠.
친구들의 작품을 사주는 것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떤 컨셉으로 컬렉팅을 하시나요?
처음엔 방향이나 컨셉보다는 그저 좋아하는 그림을 샀어요. 컬렉션은 대부분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다 조금씩 취향이 생기고 결국 좋아하는 걸 다 살 순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되죠. 그래서 컬렉션은 궁극적으로 한 방향으로 집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단단한 컬렉션이 만들어지죠.
1 외이 홍 지엔과 담소 중인 나시룬은 2013년 싱가포르 비엔날레에 ‘Between Worlds’를 출품하며 더욱 이름을 알렸다.
2 인도네시아의 거장 아판디의 작품 앞에서
3 OHD Museum, Building II
4 Yudi Sulistyo, My Air Plane
현재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떤 부류가 아트 컬렉팅을 하나요?
수카르노 대통령 시기에는 정부 관료 대부분이 컬렉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시들해졌죠. 지금은 비즈니스맨과 중국계 아트 컬렉터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중국계 컬렉터가 급부상한 거죠?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서양인이 먼저 미술품을 소장했고, 그다음이 서양인과 사회적으로 교류한 부유한 중국인이었죠. 그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컬렉터인 수카르노 대통령을 따라 주변 사람들이 아트 컬렉팅을 시작한 것처럼 말입니다. 컬렉팅은 그렇게 주변으로 옮아갑니다.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하면서 인도네시아가 혼란에 빠졌는데 미술 시장에는 타격이 없었나요?
사업가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투자처를 잃고 새로운 투자 상품을 찾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미술품의 투자가치를 인식하면서 자금이 미술 시장으로 흘러들어갔어요. 그때는 미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투자가치로 선호했죠. 그 후 미술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수집한 컬렉션으로 OHD 미술관을 오픈했는데, 미술관 개관 전후로 인생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너무 바빠졌어요. 사업에서는 이미 은퇴했는데 예전보다 더 바빠요. 관람객이 매일 방문하고 집필이나 강연, 전시 오프닝 참석 요청 등이 끊이지 않아요.
박사님은 컬렉터인 동시에 전문 미술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 기획도 하셨죠?
2006년에 큰아들 결혼식이 있었는데, 뭔가 재미난 일을 꾸며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많은 예술가를 초대해 이벤트를 벌였죠. 같은 해에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홍콩 크리스티에서 < Tobacco and Art >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둘째 아들 결혼식을 계기로 욕야 아트 페스티벌을 열었는데, 그것이 아트 욕(Art Jog, 욕야카르타 아트 페어)의 전신이 되었죠.
이상적인 컬렉터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트 바젤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아트 컬렉팅이 선진국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참고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죠. 아카이브도, 인도네시아 미술 역사에 대한 책도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정부도 그 역할을 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컬렉터라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자기 소장 작품을 잘 관리해야 하죠. 작품을 목록화해서 잘 보관해야 하고 대중과 공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어려운 임무가 있는데, ‘역사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연구해야 합니다. 즐겁지만 어려운 일이죠.
특히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나요?
한 사람을 언급하긴 어렵네요. 아판디는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고 구나완도 마찬가지죠. 저에게는 위다야라는 작가가 가장 소중합니다. 매우 인도네시아적이죠. 작가의 어머니는 바틱(인도네시아의 전통 염색 기술) 장인이었습니다. 위다야도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바틱을 만들었죠. 이후 1970년대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런 삶의 여정이 그의 작품 세계를 매우 독특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미술 역사를 책으로 펴낼 계획은 없나요?
역사는 아니지만 이미 작가에 대한 몇 권의 책을 냈어요. 작가와 얽힌 개인적인 기억을 기록한 책이죠. 위다야가 생존해 있을 때 그를 데리고 싱가포르에 건강검진을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색약이라는 것을 알았죠. 작품의 색감이 독특한 것은 그가 색약이기 때문이었죠. 그런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금도 젊은 작가들과 교류하시나요?
물론입니다. 매일! 얼마 전에는 할렘 셰이크(일상적 공간에서 한두 명이 막춤을 추다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이 특이한 의상을 입고 막춤 댄스를 선보이는 퍼포먼스)를 젊은 작가들과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렸어요. 지난 연말에도 미술관에서 젊은 작가, 재즈 뮤지션과 함께 파티를 열었는데 결국 아침에야 끝났죠. 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젊은이들과 교류합니다. 즐거운 삶이죠. 그 덕분에 제 삶도 젊어지고요!
1 Nasirun, Perjalanan Absurd, Oil on canvas, 145×250cm, 1995
2 Hendra Gunawan, Fertile and Prosperous, Oil on canvas, 150×300cm, 1951
Hendra Gunawan
인도네시아의 컨템퍼러리 아티스트 헨드라 구나완은 조국애가 깊은 예술가로 알려졌다. ‘전위화가(Pusaka Sundan)’ 단체 설립 후 독립 투쟁, 혁명 등의 내용을 담은 작품과 포스터를 통해 조국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13년간 감옥에서 지냈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전한데, 수감 생활 이후 그의 작품은 더욱 밝고 화사한 색감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향 반둥(Bandung)을 모티브로 인도네시아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이 유명하다.
Handiwirman Saputra Weekend and an ‘Organic’ Project from ‘No Root, No Shoots’ #1, Acrylic on canvas, 300×280cm, 2012
Handiwirman Saputra
한디위르만 사푸트라는 주말디 알피, 루디 만토파니, 유니자르, 유스라 말투너스 등 인도네시아의 현대미술 거장과 함께 Jendela Art Group을 창립한 컨템퍼러리 아티스트다. 그는 일상의 사물에 의문을 제기하며 빛, 형태, 색감을 부각시켜 작품을 낯설게 만드는 것을 즐긴다. 작년 여름 베를린의 < SIP! Indonesian Art Today > 전시회에서 인도네시아의 개혁 이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어 작품을 선보였다.
Entang Wiharso Interconnection, Mixed media on canvas, 300×600cm, 2007
Entang Wiharso
엔탕 위하르소는 세상에 대한 편견 없는 시각을 추구하는 인도네시아 작가로 종교와 인종, 정치, 문화가 만들어내는 왜곡된 시야를 비판하고 온전한 인간 상태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작품에는 익살스러운 화풍으로 승화된 사람들이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상하이 펄 램 갤러리의 개인전 < Crush Me >에 이어 홍콩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3월 6일부터 4월 6일까지 ARNDT Singapore에서 만날 수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김정연(스페이스코튼시드 대표) 사진 제공 OHD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