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386 컴퓨터와 VGA 컬러 모니터의 조합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PC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닐까.
PC 시장의 생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HP의 오멘(Omen) 백팩 PC. VR을 수월하게 구동하기 위해 등에 멜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여전히 키보드는 버추얼 키보드보다 빠르며, 정밀한 작업은 손가락이 마우스를 따라가기 힘들다.
이 칼럼을 작성하는 동안 놀라운 뉴스가 나왔다. 삼성전자가 PC 사업 부문을 중국의 레노버에 매각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소식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지난 9월 HP에 프린터 사업 부문을 매각했다. 당시 이 사업 부문의 매출은 거의 2조 원이나 됐지만 매각 금액은 이보다 적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삼성전자가 PC 사업 부문에서 발을 빼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있었는데, 이 전망이 적중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PC 사업 부문 매각 절차는 사실 몇 개월째 진행 중인데, 그건 레노버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레노버는 베이징 사옥을 매각하고 자산과 인력을 정리한 후 삼성전자의 PC 사업 부문을 인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출하량으로만 보면 전 세계 1위인 이들의 상황이 이 정도니 다른 제조사의 상황이 어떨지는 안 봐도 훤하다. 이미 웹사이트 접속은 PC나 노트북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사용자가 더 많다. 여기에 PC나 노트북이 훨씬 앞서 있던 콘텐츠 생산성 격차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PC와 노트북 분야의 성장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굳이 PC(혹은 노트북)를 살 필요가 있어?’란 인식을 바꾸는 것이 전통적 IT 기기 제조사들의 숙제가 되어버렸다. 숙제는 언제나 하기 싫지만 결국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숙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몇몇 제조사가 있다. 첫 번째 움직임은 조금 다른 곳에서 숙제의 주제를 찾은 회사들.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VR 헤드셋을 위한 전용 PC다. 현재 VR 헤드셋은 크게 스마트폰을 삽입한 후 머리에 써서 스마트폰 화면을 눈으로 보는 제품, 스마트폰 역할을 PC가 대신해주는 제품이 있다. 후자의 경우 PC의 사양도 중요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바닥에 PC를 놓고 유선으로 VR 헤드셋과 연결하면 움직이는 사용자가 자칫 케이블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상황)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제조사들이 생각한 것은 일반 PC에 버금가는 사양을 지닌 VR 백팩 PC다. 현재 HP의 오멘(Omen) VR과 MSI, 에일리언웨어 등 여러 회사에서 같은 형태의 제품을 출시했거나 준비 중이다. 역시 백팩 형태다 보니 배터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배터리 팩 하나로 대략 1.5시간 정도 구동할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 가격이 2000달러 정도로 비싼 편이다. 백팩 형태라는 한정된 공간에 고사양의 부품들(그만큼 열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가격이 문제겠지만, VR 헤드셋을 사고 싶게 하는 재미있는 게임이나 의미 있는 콘텐츠가 많아진다면 이 숙제는 좋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방향은 사용자의 PC 사용 환경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힌트를 얹은 제품들이다. PC나 노트북 사용자는 일이나 작업을 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보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런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제조사에서 PC나 노트북을 위한 외장 DAC나 사운드 카드를 만들고 있으며, 이런 제품은 PC-Fi란 새로운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HP와 삼성전자는 비슷한 시기에 스피커를 강조한 PC를 출시했다. HP의 파빌리온 웨이브(Pavilion Wave)는 약 25cm 높이의 삼각형 원통에 PC 구동에 필요한 부품과 꽤 큰 크기의 스피커를 함께 집어넣었다. 최신 인텔 코어 i7 프로세서에 램은 최대 16GB까지 확장할 수 있으며, 1TB 용량의 SSD 혹은 2TB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저장 공간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픽카드 역시 AMD 라데온 R9 M470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전면의 잘 보이는 공간에 뱅앤올룹슨의 로고를 크게 붙여놨다. 그들이 이 소리를 튜닝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삼성전자의 아트 PC 펄스 역시 HP와 비슷한 컨셉의 PC로 사양은 HP의 제품과 비슷하다. 그래픽카드는 라데온의 RX460을 쓴다는 것과 함께 음질 튜닝은 하만카돈이 담당했다는 것이 차이다. 다만 이미 사용자에게는 PC나 노트북에 유·무선으로 연결해 사용하는 스피커가 있을 테고, PC나 노트북을 교체한다고 해서 이 스피커까지 교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음향 강조형 PC에 많은 사용자가 환호하고 있지만 실제 구매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재미있는 것은 삼성전자가 아트 PC 펄스를 소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만카돈의 모회사 하만(Harman)을 인수했다는 사실이다. 하만은 하만카돈과 JBL, 마크레빈슨, B&W와 함께 뱅앤올룹슨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 이제 조만간 뱅앤올룹슨의 로고가 붙은 VR 헤드셋이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한 건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때문이다. 세 번째 방향은 기존의 PC나 노트북에서 새로운 활용성과 기능성을 만든 회사인데 바로 MS와 애플이다. 둘 다 소프트웨어인 OS부터 하드웨어까지 직접 만드는 회사니 이런 제품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거다. 먼저 이름부터 전문가 냄새를 물씬 풍기는 서피스 스튜디오(Surface Studio) PC는 올인원 PC의 대명사인 애플의 아이맥보다 얇은 12.5mm 두께에 28인치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를 적용했다. 또한 이 디스플레이는 13억5000만 픽셀로 4K TV보다 63% 많은 픽셀을 제공한다. 가장 큰 특징은 화면의 위쪽을 지그시 누르면 28인치 사이즈의 거치형 태블릿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여기에 블루투스로 연결되는 다이얼이 있는데 이를 통해 볼륨을 조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면 위에 올리면 컬러나 포토샵의 붓 굵기를 선택할 수 있다. 단축키를 이용해 슬라이드 바를 마우스로 드래그하지 않고 직접 다이얼을 돌려 선택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만큼 빠르고 편리하다. 기타 사양은 앞서 소개한 스피커가 포함된 PC보다 한 수 위. 프로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니 작업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솔루션은 대단히 중요하다. ‘프로’라는 이름이 붙은 애플의 뉴 맥북 프로도 구체적 방식은 다르지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사용법을 담았다. 키보드의 맨 윗줄에 붙은 전통적 펑션 키를 없애는 대신 그 역할을 대신할 터치 바(touch bar)를 탑재했다. OLED 디스플레이는 사용자의 작업에 따라 꾸준히 모양이 변한다.
1 애플의 신형 맥북 프로. 펑션 키를 없애고 터치 바를 장착했다. 2, 3 MS 서피스 스튜디오. 애플 아이맥을 위협할 만한 고성능 PC다. 28인치 터치스크린과 블루투스로 연결되는 다기능 다이얼이 강점이다.
영상 작업을 하고 있다면, 전체 영상을 탐색할 수 있는 상태의 바가 된다. 문서 작업 중이라면 저장이나 문서 형식을 지정할 수 있는 아이콘이 보인다. 자주 쓰는 기능을 사용자가 직접 골라 넣을 수도 있다. 여기에 15인치 모델은 처음으로 무게를 2kg 안쪽으로 줄이고, 두께를 더 얇게 만들었다. 화면의 밝기는 500니트로 기존 모델에 비해 밝기와 명암비를 67%나 향상시켰다. 또한 현재 디지털 영화 산업 표준인 P3 색상도 지원한다. 물론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은 USB-C 포트 4개를 붙이고, 아이폰을 충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어댑터 구매가 필요하며, 전작에 비해 무선 랜 성능이 떨어진다는 등 많은 이들이 애플의 선택을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활용성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스티브 잡스의 뒤를 이은 팀 쿡은 아이패드 프로를 출시하면서 “PC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가트너를 비롯한 시장조사 기관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이들의 예측은 내년부터 고가의 경량 프리미엄 노트북과 고사양 PC 시장은 성장세로 돌아설 거라는 것. 또한 앞서 모바일 기기와 PC나 노트북의 생산성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고 했지만 여전히 키보드는 버추얼 키보드보다 빠르며, 정밀한 작업은 손가락이 마우스를 따라가기 힘들다. 물론 모바일 기기에도 물리적 키보드를 붙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최신 노트북과 같은 무게와 두께가 되어버리거나 더 무거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PC나 노트북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것 같다. 이제 자신의 사용 패턴이 생산이냐, 소비냐에 따라 어떤 디바이스를 선택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을 뿐이다.
삼성의 아트 PC 펄스. 원통형 디자인을 채택했고, 본체에 360도 무지향성 스피커 유닛을 장착했다.
에디터 이기원(lkw@noblesse.com)
글 고진우(IT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