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Story, Endless Love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가장 근사하게 결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은 기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과거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처럼, <노블레스 웨딩> 창간호에 소개하는 커플은 트렌드를 제시하기보다 트렌드를 넘어서는 커플 스토리다. <노블레스 웨딩> 창간을 기념하며 벨기에의 멋진 성에서 로열 웨딩 신과 전통 혼례를 준비한 줄리아와 줄리앙,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한 모습으로 결혼한 배우 봉태규와 포토그래퍼 하시시박, 가풍을 지키며 대대로 내려오는 웨딩드레스와 반지를 간직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제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을.”
솔직히 말해 <민들레 소녀>라는 단편이 인용된 일본 애니메이션 <클라나드>도 몰랐고, 소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도 들춰본 적이 없다. 로버트 F. 영이라는 작가의 이름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을 뿐 환상 문학이나 공상과학소설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짧은 문장 한 줄에 이끌려 도서관에 선 채로 후룩 흡입하듯 읽었다. 줄거리는 딱 한 줄만으로도 요약 가능하다. ‘미래에서 온 소녀에게 매혹된 남자가 사실 그녀가 자신의 아내였음을 깨닫는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와 중년의 남자를 사모하게 된 소녀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청년이었던 남자에게 찾아가 혼약을 맺고 아내로 살아왔다는 사연이다. 큰 감동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잔잔한 여운이 남았다.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 하나가 마음 언저리에 툭 떨어진 듯한 느낌. 1950년대에 쓰인 이 러브 스토리는 타임 워프나 타임 패러독스물이라 하겠다. 이제는 꽤 익숙해 차라리 고전적인 설정이지만 당시로서는 다음 세대 창작자들에게 꽤 강렬한 영감을 건넸음이 틀림없다. 어떻게든 맺어지고야 마는 사랑, 시간의 모순까지 뒤엎는 영원한 사랑은 푸딩처럼 촉촉한 감수성의 사춘기 소년 소녀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리라.
말랑해진 마음으로 촉수를 더 뻗쳐보니 선형적 세계의 틀을 깨는 또 다른 스토리 몇 편이 잡혔다. 가장 무겁고 뜨겁게 다가온 것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을 이렇게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시간이 일정한 방향과 속력으로 흐른다고 인식하는 지구와 달리 영화 속 미지의 별 헵타포드는 비선형, 즉 원형적 시간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헵타포드라는 외계어를 깨치기 무섭게 과거-현재-미래를 순차적이 아니라 단번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어쩌면 이미 벌어졌을) 사랑과 혼약은 물론, 딸의 예견된 불행까지도 꿰뚫는다. 그래도 그녀는 선택한다. 사랑하기를, 맺어지기를, 또 다른 삶을 출발시키기를. 그녀의 사랑에 대한 선택은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출발도 끝도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로 귀환해보자. SF나 판타지가 아닌 세상에서 일정 기간 살다 보면 더 이상 쓰지 않는 말들이 생긴다. ‘결코’, ‘절대’, ‘오직’ 같은 부사. 그 뒤에 붙는 말들을 떠올려보라. 오래전 연인에게 남발했던 부정 및 긍정 동사들. “우리가 변한다고? 결코 그런 일은 없어.” “당신은 절대 바뀌지 않겠지.” “오직 너뿐이야.” 그러나 한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은 어느새 구태의연한 로맨스 영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상투어로 변질될 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 만물 만사가 변한다는 사실뿐임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떻게 불변이 가능할까? 오늘의 구름은 어제의 구름이 아니듯, 미래의 지구가 현재의 지구일 수 없듯, 우리가 시간의 무거운 추를 달고 있는 한 변화의 속성을 거스른다는 건 힘들지 않겠나.
그러나 선형적인 시간만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분명히 있다. 눈에 뭔가 씐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발화점이 낮아 쉽게 불이 붙지만, 이런저런 장애를 이겨내며 오랫동안 지핀 부부의 인연은 군불처럼 생의 마지막까지 따뜻하니까. 프랑스의 작가이자 영성가 크리스티안 생제르는 변하지 않는 사람 같은 것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당신이 알던 그대로 있으리라 누가 보장하겠냐고. 결혼이란 한 쌍의 남녀가 돌아오는 차표도 없이 모험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이 무모하고 미친 짓을 결심하는 이들을 기꺼이 예찬한다. 시간과 공간의 미궁 속에서 그들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는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집 짓기와 같다. 그것은 인내심과 지속과 확고부동과 느린 성장의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의 속도에 휩쓸려 더 이상 쓰지 않는 말 대신 몇 가지 동사를 새롭게 추가하기로 한다. ‘철들다’, ‘물들다’, ‘맛들다’처럼 ‘~들다’가 붙은 합성동사들. 이들은 일정 시간이 점진적으로 쌓여야만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만나 뒤늦게 철이 들고, 서로의 색깔에 물들어가며, 장맛같이 깊은 인생의 맛이 드는 걸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앞날을 알고도 선택하는 <컨택트>의 루이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연인이 세상 만물처럼 변할 것임을 인지한 채 손을 잡자. 그리고 앞서 말한 새로운 동사들을 온몸으로 함께 익혀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당도해 나처럼 늙어버린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제는 당신을 보았어요. 어제도 당신, 오늘도 당신을.”
이 글을 쓴 칼럼니스트 정유희는 오랫동안 매거진 에디터와 편집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에디톨랩(EDITALL LAB)’ 작업실 공동 디렉터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실험 중이다. 네이버(NAVER) 디자인판(designpress)에 웹툰 ‘트라의 패션디자인 만담’을 연재하고 있다.
에디터 김수진(suze@noblesse.com)
글 정유희(칼럼니스트, 만화가, ‘EDITALL LAB’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