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ory Las Vegas
라스베이거스가 변했다. 갬블러의 손맛이 아닌 미식가의 입맛을 유혹하는 이곳의 매력을 혀끝으로 경험했다.
나의 두 번째 라스베이거스
사실 미국 음식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해야겠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사이즈부터 남다른 치즈 범벅 피자, 칼질 한 번에 핏물이 쭉 흘러나와야 제대로 먹는 것 같은 터프한 스테이크 등. 전형적인 미국 음식은 지나치게 기름지고 칼로리 또한 어마어마한 육식 위주라 채식주의자는 아니나 건강식과 담백한 음식, 저염식(미국 음식은 종종 너무 짜다)을 즐기는 내게 미국 스타일은 결코 적극적으로 찾아 먹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런데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 축제를 벌이는 뉴욕에 갔을 때 이런 편견이 깨졌다. ABC 키친에서 팜 투 테이블의 신선함을 경험하고, 마레아에서 이탤리언 코스 요리를 음미하고, 그 밖에 인도를 비롯한 아시안 음식(여기엔 뉴요커가 열광하는 모던 한식도 포함된다)과 쿠바, 멕시코 등 다채로운 남미 음식을 즐기면서 ‘다양성’에 매료되었다. 사실 미국은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모여드는 땅이 아닌가. 이민자가 세대를 이어 뿌리내리면서 저마다 자국의 음식을 전파했으니 미국 음식의 영역은 이제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에서 맛본 해산물 위주의 태평양 북서부 음식도 인상 깊었다. 아시안 터치를 가미해 토종 한국인의 입맛에도 무난한 음식이다. 그리고 이번엔 라스베이거스다! 모하비 사막 위에 세운 자그마한 향락 도시에선 밤낮 가리지 않고 화려한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라스베이거스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변에 늘어선 호텔은 카지노뿐 아니라 저마다 미슐랭 스타를 받았거나 셀레브러티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내세워 미식가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라스베이거스는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은 건 11년 전 갬블링을 좋아하는 한 선배를 따라서였다. 블랙잭은 확률 게임이라며 자신은 무작정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절대 돈을 잃을 리 없다고 큰소리치던 그. 돈을 따면 스테이크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시저스 팰리스 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에서 각자 돈을 내고 밥을 먹었다. 지금은 바카날(Bacchanal)이라고 부르던데, 당시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도 지금처럼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유명한 뷔페 레스토랑이었고, 길게 줄을 서서 입장한 기억이 있다. 평소 식사량이 적어 뷔페를 선호하지 않지만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무조건 뷔페를 먹어야 한다는 여론을 따른 것 같다. 그러나 그날의 분위기도, 음식 맛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갬블링으로 돈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는 선배를 위로하느라 지치고 힘든 하루였다. 라스베이거스의 첫인상은 밤낮없이 휘황찬란하게 빛나지만 외로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냄새가 가득 배어 있는 카지노,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욕망에 난 결코 공감하지 못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파리의 에펠탑, 베니스의 운하와 곤돌라,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세계적 관광 명소를 본뜬 호텔의 모습을 둘러보는것도 나름대로 흥미는 있었지만 실제가 아닌 페이크라는 점에서 감동까지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이면서 문화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기 때문일까. 페이크를 통한 새로운 에너지와 테마 창출, 화려하게 질주하는 듯하지만 단단히 균형 잡혀 있어 요동치지 않는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만큼 이 도시도 한층 성숙한 모습이다. 유흥 일색에서 벗어나 쇼핑, 다이닝, 엔터테인먼트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놀랍게도 다이닝, 바로 미식 산업이다.
보더 그릴의 수전 페니거(Susan Feniger)와 메리 수 밀리켄(Mary Sue Milliken)
기 사보이의 시그너처 메뉴, 아티초크와 블랙 트러플 수프
캐비아의 다채로운 맛을 품은 메뉴 ‘컬러스 오브 캐비아’
미식가를 유혹하는 도시
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저 접한 음식은 델라노 호텔 64층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유일의 루프톱 레스토랑 믹스(Mix)에서 맛본 알랭 뒤카스의 클래식한 쿡폿(cookpot) 요리였다. 채소의 풍부한 맛을 경험할 수 있는 음식으로 보기엔 마냥 수수했지만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이 느껴졌다. 메인으로 호박꽃튀김과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농어구이를 먹었는데 이 또한 채식 예찬론자인 알랭 뒤카스의 시그너처 메뉴다. 라스베이거스와의 두번째 만남, 그 시작을 알랭 뒤카스가 장식해주다니. 그러나 이 레스토랑은 6월에 문을 닫고 프렌치와 이탤리언을 믹스, 리베아(Rivea)로 이름을 바꿔 10월에 재개장한다. 다음 날에는 레스토랑 기 사보이(Restaurant Guy Savoy)를 찾았다. 미슐랭 스타 3개를 받았다가 하나를 잃고 다시 받는 등 부침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 이름은 정상에 올라있다. 진한 우드와 스톤, 가죽으로 포인트를 주어 모던하게 연출한 공간. 기 사보이를 직접 만나는 행운이 따랐는데 그는 친언론적 셰프답게 깔끔하게 정리한 주방 투어를 시켜주며, 웰컴 스낵을 라이브로 제공하고 다정하게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새콤한 맛의 아이스젤리를 곁들인 쿠시(Kushi) 오이스터, 캐비아 비네그레트·캐비아 크림·골든 오세트라 캐비아·강낭콩 퓌레·사바용 소스가 층을 이룬 캐비아 요리, 버베나 인퓨전 워터를 부어 먹는 푸아그라 구이, 블랙 트러플 슬라이스를 얹은 아티초크 수프, 바닐라-생강 소스 폼을 올린 지중해산 농어 요리 등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와인 페어링은 별로였는데, 기회가 된다면 주방 한편에 별도로 마련한 크루그의 셰프스 테이블을 이용해보고 싶다. 크루그 샴페인이라면 이 강렬하고 복잡미묘한 요리에 결코 밀리지 않는 파워를 보여줄 테니까.
이번에도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섰다. 행선지는 같은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었으나 뷔페 레스토랑을 지나쳐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시간은 해가 꼴깍 넘어간 저녁 8시. 야간 수영이 금지된 라스베이거스에서 야밤에 수영장을 찾은 건 이곳에서 특별한 미식 이벤트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베이거스 언코르크드(Vegas Uncork’d)’의 그랜드 테이스팅이다. 베이거스 언코르크드는 음식 전문지 <보나베티>가 주최하고 라스베이거스 관광청과 벨라지오, 시저스 팰리스, 아리아, MGM 그랜드 등이 지역 대표 호텔과 리조트, 70명의 셰프와 믹솔로지스트, 소믈리에 등이 참여하는 음식 축제다. 언코르크드라, 와인 & 다인을 의미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는 행사 첫해에 오픈 세리머니를 진행하던 중 30초간 500병 와인의 코르크를 딴 데서 유래한 이름일뿐 전적으로 음식, 아니 미식에 초점을 맞춘다.
2015 베이거스 언코르크드 오픈 세리모니. 훌리안 세라노가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다.
마이클 미나의 정통 프렌치 스타일 카페, 바르도 브라스리
우아함이 느껴지는 조엘 로부숑의 다이닝 공간
아리아 리조트 & 카지노 1층에 자리한 스패니시 타파스 레스토랑, 줄리안 세라노
베이거스 언코르크드 프로모션 중 하나로 진행한 벨라지오 호텔 라고(Lago) 레스토랑에서 이탤리언 브런치도 즐겼다. 벨라지오를 대표하는 분수를 바라보며, 테이블을 공유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유롭고 활기차게. 이탈리아어로 호수라는 뜻의 라고는 4월 초에 오픈한 신생 레스토랑으로 훌리안 세라노(Julian Serrano)가 총책임을 맡고 있다. 내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이미 슈퍼스타.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으로, 미국 서부에서 커리어를 쌓았고 제임스 비어드 재단의 셰프상도 두 번이나 수상한 유명 셰프다. 1998년 벨라지오 호텔에 연 프라이빗 프렌치 다이닝 공간 ‘피카소’가 첫 작품으로, 아리아 리조트 & 카지노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패니시 타파스 레스토랑 ‘줄리안 세라노(스페인어로는 훌리안이라고 발음하지만 영어식으로 줄리안이라고 읽는다)’도 운영하고 있다. 줄리안 세라노에서는 호스래디시 크림과 폰즈 소스를 곁들인 방어 티라디토(Tiradito, 페루 스타일의 날생선 요리)와 슬로 쿡으로 조리한 새끼 돼지 통구이가 예술이다. 라고는 베니스에서 유래한 치케티(cicchetti) 스타일 음식을 선보이는 곳. 스페인의 타파스처럼 작은 접시에 스낵과 사이드 디시를 내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취지다. 이는 곧 라스베이거스의 미식 트렌드를 대변한다. 바로 ‘다양성’이다. 스파클링 와인에 피치 퓌레를 믹스하고 민트 잎을 띄운 나만의 칵테일 벨리니를 주문한 후 훌리안 세라노 스타일의 이탤리언 음식을 맛봤다. 부라타 치즈를 넣은 레드 와인 소스 리소토가 별미였고 매콤한 이탤리언 소시지구이도 맛있었다. 베이거스 언코르크드 행사는 라고 같은 신생 레스토랑의 데뷔의 장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마이클 미나의 바르도 브라스리(Bardot Brasserie)도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베이거스 언코르크드 프로모션에 포함된 선데이 브런치에는 참석하진 못했지만 별도 디너를 통해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를 경험했다. 헤이즐넛과 샤르트 뢰즈 버터를 곁들인 달팽이 요리, 파테 드 캉파뉴와 푸아그라 파르페, 감자 프라이보다 담백한 칙피 프라이 등. 이집트 출신인 마이클 미나는 칙피, 렌틸콩 같은 중동식 식자재를 이용해 자신의 오리진을 드러내는데 렌틸콩을 곁들인 킹새먼구이도 훌륭했다. 따끈한 초콜릿 소스를 부어 먹는 라지 사이즈의 초콜릿 마카롱이 근래 먹어본 디저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훌리안 세라노는 “라스베이거스의 다이닝 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베이거스 언코르크드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저스 팰리스 호텔 로비 바의 믹솔로지스트 토니 아보-가님(Tony Abou-Ganim)은 음식뿐 아니라 주류 문화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달라고 말을 보탰다. 그가 17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탄산음료와 독한 위스키뿐이었지만 이제는 신선하고 맛의 균형이 잘 잡힌 칵테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즉석에서 ‘몽키 샤인(Monkey Shine)’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만들어줬다. 사랑스러운 빛깔, 상큼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정교한 맛이 일품이었다. 보드카, 캄파리, 코인트로와 프레시 레몬 주스, 핑크 구아바 넥타, 아가베 시럽을 섞으면 된단다. 언젠가 이곳을 추억하고 싶을 때 만들어볼 생각이다.
라스베이거스 미식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유일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조엘 로부숑( )이다. 10년 전에 오픈했지만 여전히 특별한 곳. 18개 코스의 테이스팅 메뉴는 파리를 제외하면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희귀 코냑 컬렉션을 갖춘 호화로운 리셉션, 다이닝룸은 우아했으며 한쪽 벽면을 가든처럼 디자인해 싱그러운 느낌도 들었다. 바카라의 크리스털 램프, 베르나르도의 접시와 큐티폴의 실버웨어, 리델의 와인글라스, 푸조의 소금·후추통 등 집기를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산뜻한 맛의 딸기 가스파초를 시작으로 바이올렛 아티초크를 곁들인 푸아그라 샐러드, 리코타 치즈로 속을 채운 토르텔리니와 양상추 수프, 폴렌타 크림을 곁들인 이베리코 돼지구이 등 이 계절에 가장 맛있는 식자재로 만든 모던 프렌치의 정수를 경험했다. 2000개에 달하는 와인 리스트 중 식사에 맞춰 준비한 3종의 와인도 손색이 없었다.
사실 라스베이거스의 모든 레스토랑이 좋다, 맛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에 비해 이토록 다양하고 풍족한 미식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으리라. 게다가 스타 셰프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행사라니. 그런 의미에서 라스베이거스는 충분히 매력 있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카 쇼
Another Attraction in Las Vegas
아리아 리조트 & 카지노의 스카이 스위트_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가 선정한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호텔 1위. 크리스털 쇼핑몰_ 설치 작가 제임스 터렐이 시공에 참여, 크리스털의 프리즘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형상을 재현한 유니크한 디자인의 쇼핑 공간. 구찌, 펜디, 프라다의 북미 최대 규모 플래그십 스토어가 있으며 루이 비통의 경우 프라이빗 투어 신청 시 다른 곳에는 없는 레어 아이템을 만날 수 있다.
프리몬트 스트리트_ 라스베이거스의 옛 모습을 간직한 흥이 넘치는 거리로 일몰 후 밤 12시까지 비바 비전 스크린을 통해 전자 쇼가 펼쳐진다.
패션쇼 몰_ 니먼 마커스, 삭스 피프스 애버뉴, 노드스트롬, 메이시스 등 미국의 대표 백화점을 하나로 묶은 대형 쇼핑몰.
카(Ka) 쇼_ MGM 그랜드 호텔에 전용 극장을 마련한 태양의 서커스단의 인기 쇼. 중력을 거스르는듯한 무용과 곡예가 웅장한 마술처럼 펼쳐진다.
파피용 그랜드 캐니언 에어라인_ 그랜드 캐니언과 미드 강, 후버 댐을 가장 편안하게 감상하는 방법은 파피용 그랜드 캐니언 에어라인의 경비행기 또는 헬기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취재 협조 및 사진 제공 라스베이거스 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