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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라는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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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 SNS.

선의 얼굴
21세기 인류의 동력은 피드(feed)다. SNS는 끊임없이 알람(push)을 전송한다. 사람들은 식당이나 사무실, 병원과 거리, 심지어 운전 중에도 틈이 나면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한다. 24시간 내내 SNS에 접속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크 저커버그와 케빈 시스트롬이 설계한 알고리즘 속에 산다. 이건 산업화 이후 인류가 맞이한 가장 큰 변혁이다. 참고할 과거가 없다. 전문가란 이들이 엉터리 예언을 쏟아내는 이유다.
나스미디어가 최근 발표한 ‘2017 인터넷 이용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SNS 사용자는 83.8%에 달한다. 스마트폰 보급률과 인터넷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여타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10~80대 인류의 대다수는 SNS에 접속해 있다. 쓸모를 논할 단계는 진작 지난 것이다. SNS는 전례 없는 전파력을 지녔다. 포스팅은 삽시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전달된다. 이전까지 정보(뉴스)가 특정 계층의 권력 수단이었다면 SNS는 산지에서 이뤄지는 직거래다. 정보 열람에 제약이 없고 비용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계 없는 하나의 인류를 만든다. 최근 정보통신연구정책원(KISDI)이 발표한 ‘SNS 이용 추이 및 이용 행태 분석’에 따르면 국내 50대의 하루 평균 SNS 사용 시간은 66.4분으로 30~40대(30대 64.8분, 40대 57.2분, 60대 60.5분)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장님과 사원, 할아버지와 손자가 격 없이 소통한다. 전 연령층이 고루 분포한 유일한 창구다. SNS에선 국가나 피부색, 종교, 성별, 나이가 중요치 않다. 갈수록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에 파티션 없는 유일한 광장인 셈이다.
2016년 치른 미국 대선 당시 SNS는 가짜 뉴스의 유포망으로 활용됐다. 이를 예로 SNS의 부정적 기능이 제기됐다. 그러나 SNS는 빠르게 자정 작용을 거치고 있다. 가짜 뉴스에 대한 유저들의 경계심이 높아졌고, 다수의 팩트체커(fact checker)가 사안을 입체적으로 검증한다. 시행착오를 겪을수록 SNS의 뉴스 기능은 견고하게 진화할 것이다.
단문과 줄임말에 길들여지는 디지털 난독증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SNS 시대에 장문은 매력적이지 않다. 심도 있는 담론과 철학, 문학의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넓은 단위의 지식 전파 측면에서 볼 때 SNS는 더욱 많은 역할을 해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지식 습득 기회를 제공한다. SNS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표현은 태생적으로 쉽다. 전문 분야의 지식을 씹고 삼키기 좋은 언어로 분쇄하고 이미지와 인터넷 용어로 양념한 자료는 문턱을 낮춘다. 상대성이론이나 미국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 배경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바꾸는 것이 SNS의 힘이다.
디지털 소통의 한계, 진짜 소통의 부재가 SNS를 통해 더 빠르게 확산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SNS는 서로 일상의 극히 파편적인 부분을 엿보는(혹은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보는) 틈이다. 댓글과 좋아요만으로 쌓은 관계는 얼굴을 맞대고 부대끼며 얻는 유대감보다 약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의 부재를 SNS가 촉발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그나마 SNS라는 ‘전서구’로 현재의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SNS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등장한 플랫폼일 뿐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이 사라져도 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인류는 언제나 그랬듯 ‘답을 찾을 것’이다. _조재국

악의 얼굴
때는 2011년 5월 1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앨릭스 퍼거슨은 후대에 길이 남을 명언 하나를 남긴다. “SNS 없이도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하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SNS는 인생의 낭비다.” 당시만 해도 트위터에서 팔로워와 설전을 벌이는 맨유 소속 선수를 향해 홧김에 뱉은 말이 훗날 현대인이 무릎을 탁 칠 인사이트를 남길 줄은 그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바닥w만 한 기기 속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실체 없는 괴물은 세상을 놀랍게 확장하는 동시에 누구나 어디로든 손을 뻗칠 수 있는 작은 우주를 만든다. SNS가 초래한 감당할 수 없이 윤택해진 삶에서 우린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새로운 변화는 늘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다지만, SNS가 비추는 빛과 그림자는 지금껏 알아온 파동의 폭을 훌쩍 넘어선다.
진짜와 가짜가 뒤범벅된 경계에서 제대로 된 판단력으로 바로 서기란 쉽지 않다. 문제는 SNS에서는 진짜보다 가짜의 힘이 훨씬 세다는 것이다. ‘진실은 승리한다’는 안일한 믿음은 그동안 우리의 뒤통수를 제대로 휘갈겨왔다. 오죽하면 ‘가짜 뉴스(fake news)’란 단어가 세계적으로 사전에도 등재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을까. 주로 혐오나 차별, 테러, 전쟁 등 자극적 이슈에서 무서운 힘을 발하는 가짜 뉴스는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실시간으로 확산되며 심각한 사회현상을 초래한 이후 여전히 세계를 농락하고 있다. 자극적인 거짓 뉴스에 소위 전문가 집단이란 지식인도 영락없이 속는다. 육하원칙에 입각한 수려한 문장에서 온전한 팩트를 가려낼 수 있는 도사(道士)는 많지 않다. 세계적으로 문제를 인지하고 팩트체커나 전문가의 사전 심의 제도를 만들고, 가짜 뉴스를 좌시하는 단체나 개인을 상대로 벌금을 부과하는 등 나름의 대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스스로 속도를 키우고 덩치를 불리는 가짜 뉴스를 따라잡으려 할 땐 이미 소동이 일어난 뒤다. 사건 현장에 뒤늦게 출동해 범인의 흔적만 더듬는 허무와 허탈. 차별 없는 정보의 창구이자 실시간 정보의 바다라는 SNS의 또 다른 얼굴.

최초 유포자를 잡는다 해도 가짜 뉴스가 아예 없던 것으로 ‘언두(undo)’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SNS의 공포다. 가짜 뉴스에 현혹된 이들은 후에 밝혀진 진실에는 정작 별 관심이 없다. 진실을 거대한 파도처럼 덮어버리는 가짜의 힘은 사실 초기 유포자보다 실어 나르는 수많은 유저가 심어준 것이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이런 맥락에서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익명이라는 달콤함에 숨어 마녀사냥을 즐기는 키보드 워리어들과 의문의 연쇄 자살 사건을 다룬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범인을 쫓는 데 혈안이 된다. 결국 범인은 그 누구도 아니었고, 동시에 그들 모두였음을 암시하는 결말을 떠올릴 때, 검증되지 않은 거짓 정보를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퍼 나르는 다수의 SNS 유저 역시 가해자라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저서 <오래된 미래>에서 지적한 것처럼, 본질에서 벗어나 익명성의 그늘로 숨어들려는 경향은 오늘날 SNS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소통이 부재한 가짜 소통의 사회도 SNS의 또 다른 병폐다. “함께지만 외로운, 새로운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SNS를 화두로 쓴 어느 책의 첫머리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SNS상의 소통이란 달콤한 유혹은 오히려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고, 내밀한 소통의 부재는 공허를 더해간다. 소통을 통해 배제하는 새로운 방법도 생겼다. 최근 청소년들은 특정 인물을 제외하고 SNS 채팅방을 만드는 식으로 손쉽게 누군가를 가볍게 소외시켜버린다. 21세기식 왕따는 이토록 잔인할 만큼 고상하고 간편하다.
만연히 드러나는 SNS의 역기능에 스스로 원시인이 되길 자처하는 현대인이 늘고 있다. 공공연하게 ‘SNS 금지’를 내세우는 공간이 늘어나는가 하면, 디지털 디톡스를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 정부는 최근 잇따르는 스마트폰에 의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5세부터 15세까지 학교에서 스마트폰 소지를 전면 금지했다. 우리는 과연 SNS에서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SNS로부터 완전한 도피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SNS는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부박하고 야만적인 유저로 SNS의 병폐를 더해갈 것인지, 혹은 그 반대가 될 것인지는 사용자의 손과 머리에 달렸다. _ 전희란

 

에디터 <노블레스 맨> 피처팀
일러스트 최익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