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fin’ USA
애슐리 비커턴의 작품은 키치적 성향을 띤다. 단, 내용적으론 늘 눈에 보이는 그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저속한 소재와 정제되지 않은 색을 사용해 모순된 이분법적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어두운 이면을 주목하는 것. 1990년대 초반, 불현듯 미국에서 발리로 건너가 서퍼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여전히 파도보다 거친 작품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Red Scooter Nocturne, Acrylic, Digital Print and Plastic Laminate on Wood, 166.4×194.9×12.7cm, 2010~2011
피진 영어(Pidgin English, 중국어· 포르투갈어·말레이어 등이 뒤섞인 영어)와 크리올 영어(Creole English, 오래전 중남미에 이주해 살던 프랑스인이나 스페인인이 쓰는 영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카리브해와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에 몸을 적시며 자란 애슐리 비커턴. 어려서부터 가족과 함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그는 원시 부족 문화와 팝 문화, 삭막한 도시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묘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주로 사회에 길들여진 문화적 실체와 날것의 자연적 실체의 만남, 그리고 그 관계적 긴장감에 중점을 두는데, 사진과 같은 회화적 요소와 산업 소재, 3차원의 비예술적 재료를 가미한 어셈블리지(assemblage)를 통해 이를 표현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발리에서 작업하고 있는 애슐리 비커턴.
1980년대에 뉴욕 이스트빌리지 지역에서 시작된 네오지오(Neo-Geo)의 선두주자 중 한 명인 그는 기하학적 형태를 기호화하거나 복제하는 방법을 통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풍자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현대 소비사회가 재생산된 모방사회라는 사고를 기반으로 모방성을 강조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는데, 이런 예술적 분위기는 1990년대 초반 증권시장의 폭락과 맞물린 뉴욕의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결국 쇠퇴했다. 이즈음 비커턴 역시 뉴욕을 떠나 발리에서 새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도 그곳에서 생활한다. 현재 발리에서 열대지방 여성의 아름다운 나체와 노골적인 대조를 이루는 백인 비만 남성의 그로테스크함을 그려내는 그의 모습은 폴 고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오지오는 과거의 예술 사조가 됐지만, 최근 그는 LSD를 복용한 후 플래시백을 경험한 것처럼 자신의 1980년대 후반 작품 ‘Wall-Wall’을 다시 창조해내기도 했다. 1980년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으나,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검은 별처럼 느껴진다.

1Tormented Self-Portrait: Susie at Arles(25 Years), Digital Print on Canvas, Acrylic Resin with Stickers on Plywood with Formaica, Anodised Aluminium, Chromed Steel and Canvas, 158.8×208.3×45.7cm, 2014
2Tormented Self-Portrait (Susie at Arles), Synthetic Polymer Paint, Bronze Powder and Lacquer on Wood, Anodized Aluminum, Rubber, Plastic, Formica, Leather, Chrome-Plated Steel and Canvas, 227.1×174.5×40cm, 1987~1988
Collection of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태어나 가족과 하와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옮겨다녔습니다. 청소년기엔 작은 섬에서 통용되는 ‘크리올’이나 ‘피진’ 같은 특이한 영어를 배우기도 했고요. 이러한 성장기 경험이 당신의 예술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크리올이나 피진을 ‘특이한’ 영어라고 하면 기분 나빠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웃음) 전 사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다섯 종류의 서로 다른 영어 사투리를 배운 덕에 말의 ‘의미’라는 게 얼마나 상대적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지 깨달았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늘 ‘아웃사이더’로서 지낼 수 있었죠. 지금 전 미국 작가로 통하지만, 아마 제 세계관을 형성한 유년 시절의 경험은 보통의 미국인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청년 시절엔 칼아츠(CalArts)에 다녔고,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와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를 사사했습니다. 그들과 지낸 시간은 어땠나요?
존 발데사리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지금도 작업할 때면 그분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치죠. 그분의 무정부주의적 사상이나 유머 감각 등은 거의 모든 제 작품에 배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애셔는 좀 다르죠. 칼아츠엔 몇 개의 학파와 친목 그룹이 있었는데, 애셔는 제가 속한 그룹과는 정반대에 있는 진영의 수장이었으니까요. 제가 느끼기로 애셔는 지나치게 이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메시지 또한 타협의 여지가 없는 교조적 감성이 있었고요.
그렇게 칼아츠에서 수학했지만, 1980년대 초반에 불현듯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왜 갑자기 뉴욕으로 떠났나요?
당시 뉴욕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칼아츠 출신 작가들도 로어맨해튼에서 활동하고 있었고요. 사실 당시 LA는 선택지로서의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LA를 현대미술의 허브로 만든 건 마이크 켈리(Mike Kelly)나 짐 쇼(Jim Shaw) 같은 제 바로 전 세대 작가들이죠.

3 2017년 런던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 전시 전경. < Ashley Bickerton: Ornamental Hysteria >
4m-DNA_eve 1, Oil and Acrylic on Digital Print on Wood, 224.8×189.2×12.7cm, 2013
지금은 많은 이가 1980년대를 ‘환상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뉴욕의 이스트빌리지를 두고 그렇게 말하죠. 이는 비단 미술뿐 아니라 음악에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당시 뉴욕의 전반적 상황이나 무드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당시 이스트빌리지엔 빈민 주거용 아파트가 많았지만, 수백 개의 작은 갤러리가 모여 활기를 띠던 곳이기도 했죠. 한쪽엔 다양한 그라피티 작가가 넘쳐났고, 다른 한쪽엔 현재 거장으로 추앙받는 바스키아(Basquiat)와 키스 해링(Keith Haring), 케니 샤프(Kenny Scharf) 같은 표현주의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죠. 또 다른 한편엔 미니멀리스트 세대와 픽처스(pictures) 세대에게 주로 영감을 받은, 서늘하고 엄격한 개념주의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고요. 더불어 당시엔 ‘우리’와 ‘상대’를 가르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런 문화를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습습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다양한 일이 있었죠. 누군가를 꼭 ‘적’으로 두고 활동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때 적으로 간주한 많은 작가의 작품이 이젠 제게 기쁨을 주고, 한때 ‘동지’로 여긴 작가들의 작품은 지금 보면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당시 뉴욕의 분위기였고, 그런 분위기가 뉴욕에 역동성을 부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제가 이스트빌리지 지역에서 꽤 오랫동안 활동한 당시 제게 전시를 의뢰한 이스트빌리지의 갤러리가 없었다는 거죠. 소호의 좀 더 명망 있는 갤러리들이 제게 관심을 보인 후에야 이스트빌리지 예술의 새로운 대표 작가로 인정받고, 여러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소호의 메트로픽처스(Metro Pictures)에서 첫 전시를 개최했죠.

Extradition with Computer, C-Print in Mother of Pearl Inlaid Artist Frame, 92×111.5cm(Print), 110×130cm(Framed), 2008
당시 몇몇 갤러리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를 한 후, 1986년 피터 핼리와 제프 쿤스, 마이어 바이스먼과 함께 소나벤드 갤러리에서 전설적 전시 < Hot Four >를 열었습니다. 실험 예술과 기성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 전시로 평가받는데, 실제론 어땠나요?
당시 그 전시가 이스트빌리지의 문화적 지명도를 높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치적인 전시이기도 했죠. 사실 소호의 주요 갤러리가 그 전시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했고, 각 갤러리마다 다른 작가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죠. 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중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작가는 저와 제프 쿤스뿐이었습니다.
< Hot Four >가 성공하면서 당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네오지오’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습니다. 기하추상을 뜻하는 ‘네오지오’라는 미술 사조가 잘 맞으셨나요?
네오지오라는 명칭은 당시의 매체 기자들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용어를 농담 삼아 처음 말한 이가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였죠. 하지만 저는 그 용어를 아주 싫어합니다. 지나치게 모든 걸 단순화해 신표현주의의 대척점에 놓아두기 때문이죠. 저는 네오지오보다는 덜 드라마틱하지만 종국엔 더 큰 논쟁의 대상이 된 ‘상품 미술(commodity art)’이란 용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1993년엔 뉴욕을 떠나 발리로 갔습니다. 마치 고갱을 좇는 것처럼. 왜 갑자기 발리로 떠났나요?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 한 거였나요?
발리로 떠난 건 사실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미국 동북부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1990년대 초반 뉴욕의 분위기가 급격히 죽어버려 더는 그곳에 머물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물론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걸 배우긴 했지만요. 하지만 당시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뉴욕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길 기대하며 망령처럼 갤러리 오프닝을 기웃거리는 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다른 이들이 제게 고갱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한 번도 고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얘긴 조만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껄끄러운 주제가 되어버렸죠. 사실 제가 발리에 와서 연 첫 번째 전시는 뉴욕을 떠나기 전에 거의 구상이 끝난 상태였어요. 실제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2017년 런던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 전시 전경. < Ashley Bickerton: Ornamental Hysteria >
발리에 정착한 후 회화와 입체, 색채, 어셈블리지, 구성을 포괄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인물을 정교한 액자나 상감세공과 섞거나, 거대한 구성 작업에 포토샵 이미지를 더하기도 하는데, 본인의 형식적 전략이나 구성 프로세스에 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사실 ‘사물 같은 그림’을 원하는 방식으로 제작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림과 사진, 조각을 비슷비슷하게 싫어하지만, 그것을 섞는 건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제겐 여러모로 도움이 됐습니다. 한 예로 다른 작가의 작품은 그림과 사진, 조각 등이 다 괜찮아 보이는데, 제 작업에선 그림만으로는 만화 같고, 사진만으로는 너무 건조하고, 조각만으로는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게다가 전 어떤 것이 보이는 그대로인 것, 분명하고 단일한 의미만 지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사물은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지녀야 하고, 심지어 상반된 의미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예술 오브제는 계속 변화해야 하며, 실험대 위에 얌전히 놓여 검사를 받는 게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작품 얘길 좀 더 해보죠. 근래의 페인팅을 보면 목욕하는 젊은 미인과 나이 든 비만 남성을 비교하는 게 주된 관심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생태적·생존적 관점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설명 좀 해주세요.
사실 인종과 문화, 성에 관한 온갖 관념을 포함해 사람들이 해외 거주자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는 제게 익숙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한 거죠. 이를테면 몇몇 작품에 등장하는 파란 얼굴의 남성은 19세기와 20세기 문학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 도피자가 갑자기 낯선 21세기에 뚝 떨어져 방황하는 상황을 상상해본 것입니다. 피카소가 입었을 법한 셔츠를 입은 작품 속 남자는 고전문학에 나오는 존재론적 반(反)영웅의 고집 센 분신 같은 존재이기도 하죠. 말하자면, 고갱을 고갱의 그림 안에 넣으려는 시도를 한 셈이에요.(웃음)
지난여름, 데이미언 허스트가 연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Newport Street Gallery)에서 당신의 1980년대 작품을 재현한 새로운 ‘Wall-Wall’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셨나요?
사실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떤 이들은 과거의 주제로 회귀하는 게 주제 자체를 흐리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데이미언 허스트는 달랐습니다. 제 (작업) 언어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죠. 그 말이 마음에 들었고, 마침 그가 가지고 있다가 수리가 필요해진 1980년대의 제 ‘Wall-Wall’ 작품 몇 점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복원 중 제 안에서 ‘Wall-Wall’ 작업이 마무리되기는커녕,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앞으론 ‘Wall-Wall’을 통해 제 경력을 완성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5Fat Body Vespa, Oil on Fibreglass with Rope, Wood and Found Object, 185×173×85cm, 2015
6 2017년 런던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 전시 전경. < Ashley Bickerton: Ornamental Hysteria >
불현듯 궁금해졌는데, 혹시 이전의 고향으로 다시 복귀하실 계획은 없나요?
늘 계획은 하지만 실현되지 않습니다. 실은 동남아나 미국 서부 해안에 적당히 자리 잡고, 전시나 작품 활동을 완전히 국제적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한데 발리에선 운 좋게 진지하게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올해는 가브리엘 오로스코(Gabriel Orozco)가 3년간 거주할 계획으로 이곳에 왔죠. 그는 진정한 코즈모폴리턴으로 제게 끊임없이 영감을 줍니다.
발리에선 매일 서핑을 즐기세요? 서핑과 관련된 음악이나 옷, 문신 같은 서퍼 문화가 당신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발리에 있는 다른 서퍼들과 비교하면 저는 서핑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많은 이가 매일 서핑을 하지만, 저는 일주일에 두 번쯤 나가죠. 일단 저는 서퍼이기 이전에 작가예요. 단,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서핑 컬처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평생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걸 관찰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작품 가운데 아마 가장 유명한 게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Tormented Self-Portrait (Susie at Arles)’ (1988년)일 텐데, 이 작품이 서핑 컬처를 관찰한 직접적 결과물이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죠. 서핑의 사회적 측면과는 비교적 가벼운 관계를 맺고 있지만, 수십 년간 제게 서핑은 일종의 개인적 문화 실험실로서 관찰 가능한 소우주, 더 큰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필터로 작용했습니다.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보다, 한 달쯤 전에 가브리엘 오로스코가 제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제 모든 작품 경력을 매끈하게 하나로 잇고자 하는 계획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왜 그걸 하려 해요?”라고 묻더군요.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Spot Painting’이 수조에 든 상어와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허스트가 그렇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글 김승덕(컨템퍼러리 아트 센터 르 콩소르시움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