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of Artist, Now
예술가들이 빠져 있는 대상은 그들의 예술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문신의 조각 권오상
학생 시절부터 문신 선생(1923~1995)의 작품을 봐왔지만 그저 고전적인, 정형화된 조각이라고만 생각했다. 1년 전쯤 이사 간 집 근처에 경매사 뷰잉룸이 있어 여러 번 오갔는데, 문신 선생의 조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가격도 접근 가능한 정도라 연구를 시작해보니 생각 외로 대단한 분이었다. 1970년대에 ‘세계 조각 대가 3인전’이라는 주제로 파리 당국에서 주최한 전시가 있었는데, 알렉산더 콜더와 헨리 무어 그리고 문신 선생이 주인공이었다. 피카소, 샤갈과 함께 3인전을 연 기록도 있더라. 지금의 이불, 서도호 같은 세계적 작가였던 거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문신 선생의 작품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재료를 다루는 능력이 출중하다. 특히 가공하기 까다로운 흑단(黑檀)으로 완성한 작품들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우주에 대한 동경이 드러난 것 역시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한국 예술의 특징으로 일컫는 소박하고 단아하고 고졸한 느낌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하는 미학이니까. 더 많은 사람이 문신 선생의 조각을 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문신 선생과의 2인전 〈깎아 들어가고, 붙여나가는〉(5월 1일~6월 22일)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최했다.
올드 BMW 이광호
1980~1990년대에 만든 차의 형태를 좋아한다. 속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릴 적 본 영화에 나오던 차들에 대한 동경일까. 나도 모르게 그런 차를 좋아해왔고, 몇 년 전부터는 직접 즐기고 있다. 더 오래된 차도 근사하지만 아무래도 관리하기 어렵고, 타고 다니면 너무 눈길을 끄는 것도 싫다. 그런 차 중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차종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포르쉐 정도. 여러 대를 들여 관리해가며 타는데, 요즘 가장 빠져 있는 차는 1987년식 BMW E28이다. 최초의 5시리즈. 세로로 작게 나 있는 키드니 그릴(kidney grill)도 요즘 것과 달리 귀엽고, 옆에서 보면 상어 코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앞부분도 마음에 든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 미래적으로 만들었을 내부도 좋고…. 하나하나 요소를 따질 것도 없이 첫눈에 봤을 때 내가 좋아하는 형태다. 기계장치인 자동차는 오래되면 고장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대를 돌아가며 타는 거다. 하나를 수리 맡기면 다른 걸 타면 되니까. 문득 생각해보니 정말 이유 없는 고장이 많이도 난다. 가끔은 그래서 더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형 놀이 김혜나
인형을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늘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다 문득 ‘내가 번듯한 사회 구성원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무렵,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기 시작했다. 경찰, 소방관, 간호사 등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겨 1960~1980년대에 생산한 바비 인형을 모으고 있다. 주로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구하는데, 화장이 지워졌거나 머리카락이 빠진 인형 등 하자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업하다 남은 유화물감으로 화장도 해주고, 옷도 지어 입히고, 디오라마처럼 인형이 살 공간도 만든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렇게 한참 인형을 만지작거리면 인형에서 나는 은은한 플라스틱과 고무 냄새가 어릴 때 새로 산 인형의 포장을 풀던 기억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10월 중순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 중이라 한참 인형 놀이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작업실 박스에는 저마다 하자가 있는 인형들이 벌거벗은 채 남아 있다. 시간이 나면 바지라도 입혀줘야지. 예쁘게 꾸며줘야지.
음반 OHMA 〈Between All Things〉 에릭 오
평소처럼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에서 랜덤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처음 접했다. 같은 이름의 타이틀곡 ‘Between All Things’에 매료되어 음반의 전곡을 듣게 되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미국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미아 가르시아(Mia Garcia)와 색소폰 연주자이자 키보디스트인 헤일리 니스웨인저(Hailey Niswanger)가 발표한 프로젝트 음반이었다. 유기적이고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음악의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전통적 어쿠스틱 악기와 전자악기의 디지털적 요소가 어우러지고, 동서양의 바이브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따금 보컬의 목소리가 음악에 더해지며 매우 자연스럽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든다. 작업할 때 주로 틀어놓는다. 그림을 그리거나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모두. 내가 표현하고 집중하고자 하는 내면의 감정과 아이디어에 더욱 깊이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없이 편안하고 차분해지는 한편으로 감각적으로는 날카로워지는 걸 느낀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 연필 선과 붓질이 음악의 선율에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고 느낀다.
동자석 토니 저스트
한국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머문 호텔 근처에서 나란히 서 있는 동자석을 처음 만났다. 갤러리로 걸어가던 길이었는데, 수풀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안녕?” 하고 인사했다. 처음 가는 곳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려 노력하곤 한다. 숨어 있고, 잘 보이지 않는 것들 말이다. 그런 내 마음에 동자석들이 답했으니, 나는 주의 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자석들이 서울에 있는 동안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만난 컬렉터가 내게 부암동 목인박물관 목석원을 소개해줬다. 그곳에는 동자석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후 동자석은 늘 내 의식 속에 존재하고, 나 자신과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력은 양방향으로 흐른다. 서울에 있는 동안 나를 통해 동자석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이들이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으니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기쁨이다. 동자석은 무덤을 장식, 죽은 이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라고 한다. 아티스트는 산 자들을 보살피고 삶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동자석은 내게 그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었다.
만화 〈마녀〉 박예림
이가라시 다이스케 작가의 만화를 즐겨 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역시 이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그중에서도 요즘엔 〈마녀〉에 빠져 있는데, 인간과 자연의 관계,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을 ‘마녀’를 매개로 다룬 작품이다. 인간 외의 존재는 우리의 사고 체계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여성과 판타지적 존재를 통해 강조했다는 점에서 〈모노노케 히메〉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지브리의 걸작 애니메이션 작품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볼펜으로만 그린 〈마녀〉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작가가 자연환경의 유기성과 섬세하고 미미한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영향인지 요즘에는 작업을 구상할 때 아이디어를 마치 만화처럼 수첩에 메모하기도 한다. 컷으로 구성되어 있어 시간이나 의식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고, 대사와 그림이 함께 있어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감정도, 정보도 많다. 작업에는 그런 어법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에 담기 어려운 것을 기록할 수 있어서 즐겁다.
아버지의 빈티지 오메가 이선근
최근 시간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업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자연스레 시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원래 잘 알던 분야는 아닌데, 파면 팔수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작업하는 시간 외엔 온통 시계에 대해 읽고, 보고, 생각하며 한참을 지내다 내린 결론은 중요한 건 브랜드도, 디자인도 아닌 시계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물려주신 빈티지 오메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1983년 모델, 빈티지 오메가 씨마스터. 아버지가 결혼 예물로 구입한 시계를 내가 결혼할 때 건네주셨다. 줄도 바꾸지 않고, 글라스에 흠도 많은데, 예전에는 관심이 없고 몰라서 그냥 두었다면 지금은 그게 진정한 매력이라는 걸 알게 되어 굳이 수리하거나 교체하지 않기로 했다. 내겐 어떤 값비싼 명품보다도 소중한 시계다. 내게도 언젠가 이 시계를 물려줄 자녀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 모습 그대로 최대한 오래 보존하고 싶다. 이 시계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가드닝 이원우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몇 년 전 작업실을 서울 외곽 지역으로 옮겼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었지만, 주변의 산과 계곡을 보고 주저 없이 선택한 후 자연스레 식물을 접하게 되었다. 아직 가드닝이라는 말은 어색하지만, 돌봐야 할 장소와 생명이 생긴 건 틀림없다. 처음 와서 심은 작은 묘목들이 몇 년 사이 키도 제법 크고, 가지도 굵어져가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다.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겁고, 작은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맛보는 것도 작지만 큰 행복이다.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나 역시 그 계절과 자연의 순환에 속해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이 큰 기쁨이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흔히 풀과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정말 공감한다. 잡초를 뽑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된 노동이지만 뿌듯함도 있다. 꽃이 예쁜 잡초도 있고. 끝없이 자랄 것 같던 무성한 잡초가 어느 순간 가을이 가까워지며 그 기세가 ‘탁’ 꺾이는 듯한 기운을 느낄 때가 있다. 정원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보고만 있어도 좋다. 자연이 만든 형태가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라는 건 조형 작업을 하는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정원을 넘어 숲을 가꾸고 싶다. 작업실을 옮기고 심은 묘목이 숲을 이루는 상상을 하곤 한다.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