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of the Year
제네바 그랑프리는 기계식 시계 제작의 전통과 혁신, 그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01년 출범한 시상식으로 전 세계의 시계 명가가 선보인 작품 중 옥석을 가리는, 명실공히 시계업계 최대의 축제. 비록 역사는 짧지만 공정성과 권위 면에서는 영화계의 아카데미, 대중음악 분야의 그래미, 미술계의 터너상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다. 지난 10월 29일, 스위스의 제네바 대극장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흥미로운 수상 결과와 더불어 시상식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까지 풍성하게 담았다.
올해의 대상을 수상한 그뢰벨 포시의 투르비용 24 세컨드 비전

자리를 가득 메운 시상식 현장

제네바 그랑프리 2015가 열린 제네바 대극장의 화려한 전경
영예로운 제네바 그랑프리의 얼굴
지난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 정교한 무브먼트가 외관을 휘감은 제네바 대극장(The Grand Théâtre de Genève)에 1500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극장 안팎의 모습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방불케 했다. 1년에 단 한 차례, 제네바 그랑프리 영광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현장이다. 제네바 그랑프리는 한 해에 선보인 최고의 시계를 가리는 시상식으로 전통적 시계 브랜드가 자신의 명성과 위상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젊은 워치메이커가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알리기 좋은 자리다. 세계 각국의 워치메이커와 브랜드들은 후보작과 수상작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특별한 시계 제작에 몰두한다. 시상식이 시작되고 긴장된 순간. 후보작 선정부터 순회 전시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몇 달을 뒤로하고, 수상자를 하나씩 호명하자 객석에서는 탄성과 함께 축하의 박수 소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 수상작을 소개하면, 여성 시계 부문은 케이스와 다이얼에 자수를 놓아 화제가 된 위블로의 빅뱅 브로더리, 크로노그래프 부문은 울트라 신으로 정평이 난 피아제의 알티플라노 크로노, 투르비용 부문은 컴플리케이션 전통의 강호인 율리스 나르덴의 율리스 앵커 투르비용, 캘린더 부문은 젠틀한 드레스 워치의 표본을 제시한 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QP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밖에도 블랑팡의 빌레레 카드랑 사쿠도는 아티스틱 크래프트상, 3700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오데마 피게의 다이아몬드 펑크는 주얼리 워치상을 수상해 단상에 올랐다. 피아제는 옛 시계를 복원해 전통을 잇는 리바이벌상을 또 한 차례 수상하며 2관왕의 명예를 차지했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제네바 그랑프리의 대상인 황금 손! 천재 워치메이커 로베르 그뢰벨과 슈테판 포시가 함께 설립한 그뢰벨 포시(Greubel Forsey)의 투르비용 24 세컨드 비전이 72개의 쟁쟁한 후보작을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뢰벨 포시는 역사가 10년 남짓한 비교적 신생 브랜드지만 투르비용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시계 애호가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워치메이커다.
앙투완 프레지우소의 ‘투르비용 오브 투르비용’

위블로의 ‘빅뱅 브로더리’

자케드로의 ‘더 차이밍 버드’

오데마 피게의 ‘다이아몬드 펑크’
Grand Prix d’Horlogerie de Genéve 2015 Prize List
| 에귀유 도르(그랑프리) | Greubel Forsey, Tourbillon 24 Secondes Vision |
|---|---|
| 여성 시계 | Hublot, Big Bang Broderie |
| 여성 컴플리케이션 시계 | Fabergé, Lady Compliquée Peacock |
| 남성 시계 | Voutilainen, Voutilainen GMR |
| 크로노그래프 시계 | Piaget, Altiplano Chrono |
| 투르비용 시계 | Ulysse Nardin, Ulysse Anchor Tourbillon |
| 캘린더 시계 | Hermès, Slim d’Hermès QP |
| 스트라이킹 시계 | Girard-Perregaux, Minute Repeater Tourbillon with Gold Bridges |
| 메커니컬 익셉션 시계 | Jaquet Droz, The Charming Bird |
| 프티 에귀유(5000유로 이하) 시계 | Habring2 , Felix |
| 스포츠 시계 | Tudor, Pelagos |
| 주얼리 시계 | Audemars Piguet, Diamond Punk |
| 아티스틱 크래프트 시계 | Blancpain, Villeret cadran Shakudö |
| 리바이벌 시계 | Piaget, Extremely Piaget Double Sided Cuff Watch |
| 혁신 시계 | Antoine Preziuso, Tourbillon of Tourbillons |
| 심사위원 특별상 | Micke Pintus, Yannick Pintus, Jean-Luc Perrin (Vacheron Constantin Ref. 57260 워치메이커 3인) |
| 인기 투표 | Antoine Preziuso, Tourbillon of Tourbillons |
자리를 가득 메운 시상식 현장

올해 수상한 영광의 얼굴들
제네바 그랑프리의 화려한 트로피
경이로운 시계 제조에 대한 찬사
제네바 그랑프리는 2001년에 시작해 올해 15회를 맞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시상식이다.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시간을 측정하고 기록하며, 또 시계를 제작한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 사실. 물론 이전에는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경합을 벌이거나 파리·그리니치·제네바·뇌샤텔 등의 천문대에서 열린 콩쿠르, 현재 COSC라 부르며 시계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크로노미터 경진 대회를 통해 시계의 정확성을 평가했다. 하지만 분야를 세분화하고 전 세계 전문가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수한 시계를 가리는 경우는 없었다. 기술뿐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서 시계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제네바 그랑프리만의 강점! 그래서인지 시계 제작자는 물론 시계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에게도 제네바 그랑프리는 특별한 존재다.
피아제의 ‘익스트림리 피아제 더블 사이드 커프 워치’

피아제의 ‘알티플라노 크로노’

지라드 페리고의 ‘미니트리피터 투르비용 골드 브리지’
기술력과 예술성을 인정받는 척도
시상식은 ‘제네바 그랑프리 재단’의 주최로 매년 10월 말 혹은 11월 초에 열리며, 후보작은 시계업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로 구성한 심사위원에 의해 보통 9월 초에 결정된다. 후보 선정에는 제한이 없다. 전 세계 모든 브랜드와 그해 발표한 모든 시계가 포함되며, 후보작 선정 기간 이후 발표한 시계는 다음 연도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시계를 만든 제작자와 브랜드가 후보에 올리기 위해 재단에 직접 시계를 제출한다는 것. 제출한 시계를 가지고 심사위원은 여러 차례 채점을 통해 최종 후보를 결정한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함인데, 신생 브랜드에 기회를 주고 시계 제작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영리한 의도가 숨어 있다. 역사와 전통을 뽐내는 강호와 어깨를 견주며 후보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치와 실력을 증명하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상까지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QP’

블랑팡의 ‘빌레레 카드랑 사쿠도’
넓어진 수상의 폭, 더욱 엄격해진 심사
2015년 현재 제네바 그랑프리의 메인 시상 부문은 여성 시계, 여성용 컴플리케이션, 남성 시계, 크로노그래프, 투르비용, 캘린더, 스트라이킹(차임 시계), 메커니컬 익셉션(하이 컴플리케이션), 프티 에귀유(5000유로 이하의 시계), 스포츠, 주얼리, 아티스틱 크래프트까지 총 12개이며, 이와는 별개로 대중의 온라인 투표로 선정하는 인기상, 시계업계에 공을 세운 이에게 수여하는 심사위원 특별상, 설립 10년 이하의 젊은 브랜드에는 신예 시계상을 수여한다. 그리고 올해의 대상 격인 에귀유 도르(Aguille d’Or, 황금 손이라는 뜻)는 12개 부문에 오른 후보 시계 중에서 가린다. 올해는 한 부문당 6점, 총 72점이 공식 후보에 올랐는데, 출품한 시계만 수백 점에 이르니 공식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시계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수상 작품 선정을 위해 25명의 심사위원이 모였다. 명망 있는 시계 전문지 편집장과 전문 칼럼니스트, 독립 시계 제작자, 시계 박물관 관장, 워치 컬렉터 등으로 구성했고, 올해는 특별히 스위스 뮤지션 디터 마이어(Dieter Meier)와 록 그룹 키스(Kiss)의 멤버이자 유명한 시계 컬렉터인 에릭 싱어(Eric Singer)도 올해의 시계를 선정하는 데 앞장섰다. 참고로 심사위원은 공정성을 위해 해마다 바뀐다고.
서울을 찾은 진귀한 후보작

요르크 알레딩 주한 스위스 대사
서울을 찾은 72점의 후보작
사실 지난해까지 제네바 그랑프리는 그저 먼 나라에서 열리는 ‘남의 집 잔치’에 불과했다. 시계를 실제로 접할 기회는커녕 시상식 자체를 아는 이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시상식이 열리기 전, 주요 대도시를 돌며 후보작을 소개하는 ‘제네바 그랑프리 순회 전시’의 리스트에 서울이 포함됐기 때문. 재단은 2011년부터 순회 전시를 마련했고, 그간 시계가 거쳐간 도시만 취리히, 홍콩, 상하이, 제네바, 파리, 뉴델리, 베이징, 모스크바, 마카오, 두바이, 싱가포르, 런던에 이른다. 그러니 시계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서울은 당연히 추가해야 할 도시였다. 서울 전시는 10월 6일부터 8일까지 한남동에 위치한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언더스테이지에 열렸고, 카를로 람프레히트(Carlo Lamprecht) 제네바 그랑프리 재단 이사장과 카린 마야르(Carine Maillard) 총괄 디렉터가 직접 서울을 찾았다. 주한 스위스 대사 요르크 알레딩(Jörg Al. Reding) 역시 전시를 찾아 축하 인사를 건넸다. “2001년 제네바 시와 스위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세운 제네바 그랑프리 재단은 2011년 5월부터 공익 단체로 인정받았고, 시상식을 통해 전 세계에 포진한 시계 제작자의 훌륭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국내 주최사인 매뉴얼세븐의 정희경 대표에 따르면 스위스 측에서 서울 전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전시가 꼭 성사되길 희망했다고 한다. 자국의 주축 산업이자 문화의 큰 축인 시계를 알리는 데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총 72점의 시계를 경쟁 부문별로 나눠 전시했고, 각각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시간을 측정하는 크로노그래프 시계라 할지라도 6점 모두 다이얼 배열과 구동 방식, 디자인이 달랐고, 보석을 세팅한 주얼리 시계는 제각기 내뿜는 화려한 광채 덕에 눈이 부실 정도! 후보에 이름을 올린 브랜드의 면면도 실로 다양했다. 피아제, 에르메스, 위블로, 블랑팡, 몽블랑, 태그호이어, 해리 윈스턴, 불가리, 쇼메, 론진 등 이미 국내에 이름을 널리 알린 브랜드가 대거 포진해 이들의 실력을 입증했다. 특히 올해 초 대규모 런칭을 통해 시계 시장에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 티파니의 CT 60 모델이 캘린더 부문에 오른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 하지만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국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시계였다. 매년 초 <노블레스> 본지의 SIHH 또는 바젤월드 기사를 통해 접하던 시계, 즉 MB&F, 로랑 페리에(Laurent Ferrier), 루이 모네(Louis Moinet), 앙투완 프레지우소(Antoine Preziuso), 그뢰벨 포시, 크리스토프 클라레(Christophe Claret), 드윗(Dewitt), HYT가 그 주인공.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걸출한 워치메이커의 실력과 비상한 연구를 통해 시계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이렇게 서울에 짧은 시간 머물다 간 시계는 두바이와 제네바 전시를 거쳐 시상식장으로 향했고, 앞서 언급했듯 몇몇은 영광의 순간을 맞았다(시상식 이후 시계는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사치 갤러리에서 마지막 순회 전시의 주인공이 됐다). 이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수상한 시계 대부분을 제네바 예술 역사 박물관에서 영구 전시하기 때문이다.
서울 전시 전경
에디터 이현상 (ryan.lee@noblesse.com)
사진 제공 제네바 그랑프리(www.gphg.org), 매뉴얼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