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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ESS LEGACY

LIFESTYLE

세월이 지나 빛바랜 유산이 브랜드의 후원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샤넬이 2018년부터 독점 후원하고 있는 그랑 팔레. © Laurent Kronental pour Chatillon Architectes

“과거 요소를 발전시켜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Make a better future by developing elements from the past).” 괴테가 남긴 말이다. 37년간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며 샤넬의 부흥을 이끈 칼 라거펠트는 살아생전 이 문장을 즐겨 인용했다. 그의 말처럼, 과거 유산에 깃든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현재로 연결하는 일은 럭셔리 브랜드에 의미 있는 도전 과제이자 견고하게 빛날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들은 종종 지은 지 수백 년 된 건축물이나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을 복원하고 후원하며 브랜드의 철학을 알리고 지속 가능한 가치를 세상에 전한다.
대표적 예가 에르메스 코리아의 ‘궁궐 전각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 후원이다. 2015년 문화재청과 업무 협약을 맺은 이들은 10여 년째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주도해 진행 중인 한국 궁궐 복원 사업을 돕고 있다. “한국의 궁궐 대부분은 복원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내부에서는 삶의 자취를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세대 간 장인정신의 전승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온 에르메스는 이를 계기로 궁궐의 내부 집기 재현 사업을 후원하게 되었다. 궁궐 장식과 집기에는 한국 장인의 전통 기술과 탁월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에르메스 코리아 측의 설명이다. 시간이 정지된 궁궐에 활기를 불어넣고, 국내 전통 장인에게 공예 기술을 전승할 기회를 제공하는 취지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차분하면서도 꾸준히 과거를 재현하고 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고종 황제의 집무 공간이던 덕수궁 즉조당 내 백수백복이 새겨진 자수 병풍, 평상, 경상, 붓·먹·벼루를 보관하는 연상, 좌등, 은입사 촛대 같은 집기들이 하나둘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이후 2021년부터는 덕수궁에서 경복궁으로 장소를 옮겨 사정전 내부 집기를 복원하고 있다.
구찌 역시 한국 문화유산에 진심이다. 역사적·예술적 의미가 담긴 장소에서 패션쇼를 열며 각 문화 유적지를 보존하고 지역 특색에 맞는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쳐온 이들은 2022년 말부터 3년 동안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경복궁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을 위한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23년 5월 경복궁에서 패션쇼를 개최했고, 올해 초에는 ‘왕비의 공간’인 경복궁 교태전 내부 벽면에 새겨진 부벽화의 모사도를 제작해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조선시대 궁중 회화를 계승하면서 왕비의 모성애를 투영한 원숭이, 왕비의 해로를 상징하는 앵무새를 섬세한 필치로 담아낸 부벽화 ‘화조도’와 ‘원후반도도’는 240여 일간 복원 기간을 거쳐 올해 연말에 공개된다.

경복궁에서 열린 구찌 2024 크루즈 패션쇼.

설화수가 복제품 제작을 지원 중인 조선 왕실 분재 공예품 ‘반화’.

에르메스 코리아의 후원으로 복원된 궁중 집기를 선보인 경복궁 사정전 상참의 재현 전시.

한편 아모레퍼시픽 대표 브랜드 설화수는 지난 8월 새로운 왕실 문화 복원 프로젝트 후원에 나섰다. 1886년 고종이 당시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에게 조선과 프랑스 수교를 기념해 보낸 예물로, 현재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왕실 분재 공예품 ‘반화’ 복제품을 제작하는 데 힘을 보탠 것. ‘접시에 놓인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반화는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나무에 달아둔 조화 장식품으로, 희귀한 조선 왕실 공예품으로 손꼽힌다. 장거리 이동 시 파손 위험을 고려해 설화수는 원본에 가까운 복제품을 제작해 국내에 전시하는 것으로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국립고궁박물관과 뜻을 모았다. 국가무형문화유산 보유자인 김영희 옥장이 재현을 맡아 총 두 점을 제작할 예정이다.
해외에서도 브랜드의 문화유산 후원 활동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2018년부터 그랑 팔레 독점 후원사로서 복원과 수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온 샤넬은 지난 9월 향후 5년간 이곳에서 열릴 문화·예술 프로그램 후원을 추가로 발표했다. 2005년 그랑 팔레 본당에서 쇼를 개최한 후 샤넬은 꾸준히 이곳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출해왔다. 샤넬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프스키의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랑 팔레는 꿈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계다. 우리에게 이곳은 캉봉가, 방돔 광장과 마찬가지로 샤넬 하우스를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다. 파리의 중요 문화 공간인 그랑 팔레를 계속 지원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 이곳의 변화는 파리와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에펠탑과 마찬가지로 수 세기를 이어갈 것이다.” 현재 임시 오픈 중인 그랑 팔레는 2025년 6월 공식 재개관과 함께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될 예정이다. 다양한 전시와 이벤트가 이어질 공간의 완벽한 활용을 위해 샤넬은 자수 공방 몽텍스의 인테리어 사업부 스튜디오 MTX를 통해 특별한 커튼을 제작 중이다.
1884년 로마에 설립한 불가리는 오래전부터 이탈리아 문화유산을 보존,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스페인 계단, 카라칼라욕탕, 평화의 제단, 라르고 아르헨티나 성역 등 로마 대표 유적지가 불가리의 후원을 통해 새로운 빛을 얻었다. 2017년부터는 현대까지 보존된 고대 조각품 중 가장 큰 규모의 개인 컬렉션으로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토를로니아 컬렉션’ 복원에도 참여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과거 위용을 되찾은 100여 점의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품을 최근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조각품은 월드 투어 전시 이후 새 단장한 로마 토를로니아 박물관 내 상설 전시 공간에 안착할 예정이다.
페라리는 2022년 말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위치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후원한다고 발표했다. 화가 조반니 치마부에가 1285~1290년 완성한 ‘옥좌 위에 앉은 성모자와 네 천사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가 주인공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담은 가장 오래되고 사실적인 초상화로 평가받는다. 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CEO는 “이탈리아는 수천 년 된 예술적 유산을 이어온 특별한 국가로, 페라리가 추구하는 럭셔리의 가치는 예술·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만큼 이탈리아 명작을 보존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이렇듯 각 브랜드는 저마다 방식으로 과거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유산 복원과 후원은 단순한 사회 공헌을 넘어 브랜드가 품고자 하는 가치, 지키고 싶은 전통에 대한 헌사다.

페라리가 복원을 후원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화. © Archivio Fotografico del Sacro Convento

올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된 <더 토를로니아 마블스> 전시 전경. 불가리의 지원으로 복원 과정을 거쳐 화려한 원래 모습을 되찾은 100여 점의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을 선보였다. © Fondazione Torlonia Ph Agostino Osio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