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UNKYUNG HUR, 허은경

ARTNOW

허은경은 솔직하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몸에 병이 날 정도로 거짓을 말하거나 숨기는 법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란 현재 당면한 사건이나 관심사를 작품화하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의 조각들을 이미지로 표출해 작품을 통해 말을 해야 한다고 믿는 그녀. 그래서 허은경의 작품에는 그녀의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로봇 싸움을 하던 기억이, 몸이 아프면서 화학물질이 아닌 천연 재료(옻칠, 나전칠기)에 눈을 뜨게 된 사연이, 2년여간 어머니를 병간호하며 생명의 숭고함과 기형(畸形)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소중한 기억이 일말의 거짓 없이 작품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지난해부터 반짝이는 외눈 박이 실리콘 생명체 ‘블라비(Blobby)’에 흠뻑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홍대 앞 작업실을 찾았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그녀의 작품도 재료나 형식이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녀의 작품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솔직한 작가, 허은경이다.

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퀴퀴한 옻칠 냄새가 진동한다. 그간의 작업량을 보여주듯 여러 겹 덧칠한 옻칠 작품들이 작업실 한쪽 온실에서 제 몸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빳빳하게 말라가는 옻칠 작품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허은경 작가가 입을 연다. “저는 무수리 팔자인가 봐요. 노동을 하는 게 이렇게 좋은 걸 보면…. 설치 작업할 때는 몰랐는데 옻칠 작업을 하면서 작가로서 살아가는 맛을 느낍니다.” ‘작업은 곧 노동’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여덟 번에서 스무 번 정도 반복한다. 매번 온도 25~28℃, 습도 70~80%의 까다로운 환경에서 8시간, 많게는 24시간까지 꼬박 말린다. 서울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허은경 작가는 1992년 미국 ACCD 갤러리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에 이어 1993년 LA에서 열린 단체전 < Art Bizarre >에도 참가, 해외 화단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 후 1998년 <젊은 모색>전, 2004년 <그림자의 이면>전 등의 전시를 통해 설치 작가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녀가 옻칠에 손을 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2000년대 중반까지 빛과 슬라이드를 이용한 설치 작업에 몰두했다. 색색의 투명 플라스틱 볼에 물을 담아놓고 색색의 물그림자가 벽면에서 어우러지는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선보였다.

“화학물질인 아크릴을 사용해서 그런지 원인도 없이 몸이 아팠어요. 그래서 천연 재료를 찾기 시작했죠.” 옻은 방습, 방염, 방충 등의 기능은 물론 간 기능 강화, 항암 효과 등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허은경 작가는 2008년 무렵부터 전통 옻칠 기법과 나전칠기(자개)를 모티브로 동양적인 빛의 어울림 속에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본디 장롱과 전통 공예품에 쓰이는 것이 옻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달라도 확연히 다르다. 앤티크한 자개장에서 느껴지는 대중적이고 키치한 속성에 예술가의 손길을 더해 드로잉과 설치 작품 등으로 탄생시켰다. 자작나무 패널에 옻칠을 한 뒤 정교하게 자개를 붙여 만든 ‘불의 신장’, ‘별의 신장’, ‘산의 신장’, ‘벌레의 신장’ 등의 작품은 로봇과 곤충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에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남자 형제들 틈에서 자란 그녀는 로봇 놀이에 친숙했다.

Odd-Bod Spectrum, 2012, 14x16x16cm~21x23x11cm, Silicone and glass, mixed media.

그런 그녀에게 가장 힘이 센 형체가 바로 로봇이었고, 그녀가 그린 로봇은 다섯 방위를 지키는 동양의 오방신장(五方神將) 같은 존재로 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의 다섯 수호신이 그녀를 보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2012년 9월 아트스페이스 루에서 열린 < Odd-Bod Spectrum > 전시에서는 그간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인체 성형에 쓰이는 실리콘과 유리를 결합해 독특한 재료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블라비’라고 명명한 이 실리콘 물체는 2.5~3kg의 무게로, 신생아의 몸무게와 같다. 현재 230개의 블라비가 그녀의 손을 통해 세상에 탄생했고 계속 생성해나가는 중이다.
그녀가 인공 재료로 오브제를 바꾼 이유는 다름 아닌 몸이 아픈 친정엄마 때문이었다. 지난 2년간 어머니 간병에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괴사가 심각하게 진행된 어머니의 다리를 보며 괴로워했고 결국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병간호하랴 작품 활동하랴 어느 때보다 바쁘게 보냈다. 썩어가는 피부 조직에서 기형적인 새살이 돋아났고 이것을 작품화하지 않으면 생병이 날 것 같았다. “매일 엄마와 피부를 맞대고 사는 동안 기형적인 살의 아름다움을 느꼈어요. 제가 만든 블라비는 아름다운 기형, 영혼이 아름다운 우주 생명체예요.” 허은경 작가가 기형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 안에 숭고한 생명의 의미와 우주의 원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Micro, Marcro, 2009, 24x24x6cm, Korean lacquer(Anacardiaceae), mother of pearl, hemp cloth, wood panel.

반짝이는 블라비의 눈동자는 우주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그녀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북두칠성 별자리를 새긴 칠성판(주검과 함께 관 속에 넣는) 위에 살포시 올라앉은 블라비들은 아름답고 장엄한 죽음을 상징한다. 작업실 한 귀퉁이에 신전처럼 모셔놓은 보물들에도 시선이 머문다. 동그란 종이 딱지와 인형들이 뒤섞여 있는데, 어릴 적 가지고 놀지 못한 마론 인형에 대한 동경과 로망이 분출되어 있다. 이것은 그녀 삶의 단편을 하나하나 모은 것으로,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허은경 작가는 작업 중에도 보물 창고를 들락거리며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4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서 개최하는 2인전과 9월 스페이스웰링앤딜링에서 열릴 개인전< Liminal Space >을 위해 새로운 작업에 매진 중이다. 작품에 대한 구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허은경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에디터 심민아
사진 안지섭(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