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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You Marry Me?

ARTNOW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 낭만의 결정체 같은 결혼식을 바라보는 아티스트의 시선은 이토록 달랐다. 그들은 어쩌면 식이 끝나는 순간, 낭만은 휘발하고 사랑도 현실이 된다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Pieter Bruegel, The Peasant Wedding, Oil on panel,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1567~1568

농가의 결혼식_ 피터르 브뤼헐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 브뤼헐
얼마 전에 개봉한 <뮤지엄 아워스>는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미술 애호가들이 누린 가장 큰 호사는 브뤼헐의 작품을 맘껏 감상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현재 전해지고 있는 브뤼헐의 작품 40여 점 중 대표작 15점이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농가의 결혼식’도 빈 미술사박물관 그림 중 하나입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가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라고 평한 브뤼헐은 인간의 삶에 주목한 화가였습니다. 특히 ‘농부 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농촌 사람의 일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우리는 브뤼헐의 작품에서 미술사 최초로 주인공이 된 농민을 봅니다. 그의 그림에는 도시민의 삶에 비해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농촌 세계에 대한 관심과 풍자, 웃음이 담겨 있습니다.

감상 포인트
여기, 한 농촌의 헛간에서 결혼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2명의 백파이프 연주자가 흥을 돋우지만 잔칫상에 놓인 음식은 죽과 빵이 전부인 아주 소박한 농촌 결혼식의 한 장면입니다. 서까래에 닿을 만큼 높이 쌓은 곡식으로 보아 막 수확을 마친 시기인 듯합니다. 화면 오른쪽 하단부에서 왼쪽 상단부로 길게 테이블이 놓여 있군요. 왼쪽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들어 술을 따르고 있는 남성과 바닥에 앉아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는 대각선 구도로 자칫 불안해 보일 수 있는 화면의 균형감을 잡아줍니다.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부터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 줄 서 있는 하객까지 얼핏 헤아려보아도 족히 40명은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함에도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브뤼헐의 주도면밀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 덕분입니다. 붉은색, 초록색, 황색, 흑색 등 전체적인 색 배치도 매우 조화롭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식의 주인공은 역시 신부가 아닐까요? 순박한 얼굴의 신부는 초록색 천을 등지고 양손을 모은 채 새초롬하게 앉아 있습니다. 신부는 대개 조금씩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얌전히 눈을 내리깐 그녀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농가의 결혼식’의 원근법적 공간에서 제일 크게 그린 인물은 문짝을 뜯어 음식 운반 도구로 쓰고 있는 화면 앞쪽의 두 사람이지만, 식탁 위로 죽을 건네는 남성의 오른팔이 감상자의 시선을 신부에게 향하게 하여 중심인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신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추측이 난무합니다. 신부 옆쪽에 앉아 숟가락으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남성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등을 보인 채 주전자를 들고 있는 검은 옷의 남성이 신랑이라고 말합니다. 신랑이 보통 신부 집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허드렛일을 거들었다는 16세기 혼인 풍습을 근거로 음식을 식탁 위로 옮기는 남성 또는 화면 왼쪽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남성이 신랑이라고 보는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논란 속에 숨은 따뜻함
브뤼헐의 그림은 여러 상징과 풍자를 담고 있기로 유명합니다. ‘농가의 결혼식’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논란을 낳은 대상인데요, 과거에는 브뤼헐이 농촌의 조야한 결혼식 묘사를 통해 인간의 탐식과 어리석음을 비판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작품을 냉소적 시각으로 가득한 그림으로만 볼 수 있을지요. 그러기엔 왠지 모를 따스함이 묻어나지 않나요? 그리고 이 그림을 주문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최근의 연구에서 브뤼헐이 안트베르펜의 인문주의자 그룹에 속한 지적인 화가였고, 그가 농민을 그린 것은 농촌 생활에 관심을 보이던 풍조와 후원자의 주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대도시 플랑드르의 삶에 찌든 사람들이 한적한 전원생활을 동경했으며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농경시>나 <전원시>를 애독했다는 것입니다. ‘농가의 결혼식’도 그들의 교외 전원 빌라 식당에 걸려 있던 작품이고,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웃음의 요소 역시 안트베르펜의 ‘상품’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동시대 전기 작가 카럴 판 만더르(Karel van Mander, 1548~1606년)는 브뤼헐이 친구들과 함께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시골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러 다니곤 했다고 전합니다. ‘농가의 결혼식’은 농촌에 대한 화가의 애정 어린 호기심과 후원자의 요구를 바탕으로 제작한 그림인 셈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림의 맨 오른쪽에 앉아 성직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귀족이 마을 영주가 아닌 브뤼헐 자신이라고 보는 이론가도 있습니다. 이렇듯 ‘농가의 결혼식’은 다양한 관점으로 감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Pieter Bruegel(1525(추정)~1569년) 브라반트 지방에서 태어나 1551년 안트베르펜 화가조합에 마이스터로 등록한 뒤 1552년경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는 기록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 화가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같은 종교적 주제의 그림과 신화 속 이야기를 담은 ‘이카로스의 추락’을 비롯해 농촌의 결혼식, 축제와 놀이 장면, 속담 등 플랑드르의 일상과 풍경을 뛰어난 관찰력으로 포착한 작품을 남겼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아들 피터르(1564~1638년)와 얀(1568~1625년) 모두 화가였는데 큰아들은 지옥 그림으로, 둘째 아들은 꽃 정물화로 유명했다. 손자 얀 브뤼헐 2세(1601~1678년)도 화가의 업을 이었다.

글 | 김보라(미술평론가)

Jan van Eyck, Portrait of Arnolfini, Oil on wood, National Gallery, London, 1434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_ 얀 반 에이크

특이한 초상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기존 초상화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의 초상화는 대개 손도 나오지 않는 상반신만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하기 전엔 주로 얼굴의 옆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이 그림은 당시 매우 독특한 스타일의 초상화였지요. 얀 반 에이크는 왜 이런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을까요? 이 그림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의 혼인 서약 순간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 뒤편의 벽면에 볼록거울이 걸려 있어서 이들이 서 있는 곳에서 마주 보는 곳, 즉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 안의 반대편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두 남자가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결혼식 증인으로 참석한 입회인일 것입니다. 그중 한 명이 이 그림을 그린 얀 반 에이크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뒷벽의 거울 바로 위에 ‘얀 반 에이크, 이 자리에 참석하다. 1434년’이라는 문구가 공문서의 장식적 서체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일반적 초상화나 요즘의 결혼식 기념사진 같은 그림이라기보다 부부의 혼인에 대한 증명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이 그림은 온갖 상징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보는 감상의 차원을 넘어 그림을 읽는 단계를 요구합니다.

감상 포인트
이제 그림이 담고 있는 다양한 상징과 내용을 들여다볼까요? 첫 번째로 결혼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의 촛불입니다. 왼편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면 대낮인데도 촛불 한 자루를 밝혔는데 이것은 중세부터 결혼을 상징했습니다. 신랑의 오른편 아래 놓인 신발이나 안쪽에 있는 신부의 신발은 신성한 서약을 할 때는 맨발로 서야 한다는 규범을 나타냄으로써 결혼식의 순결함과 신성함을 표현하고 있지요. 부부는 전통적 결혼 서약의 모습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은 상태입니다. 신랑은 오른손을 들어 서약할 때의 제스처를 보여주며 신부는 수줍은 듯 살짝 고개 숙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있는 개는 서양에서 ‘충성, 신실, 순종, 정직’ 등을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입니다. 이 도상을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그런데 오른편에 있는 신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합니다. 마치 요즘 말처럼 ‘속도위반’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만삭의 몸 상태를 보여주고 있지요. 결혼 먼저 해서 아이부터 갖고 정작 결혼식은 나중에 했기 때문일까요? 이것은 혼인이라는 신성한 예식을 통해 당시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결혼식 장소가 거실이 아닌 침실로 설정되어 있는데, 당시의 ‘수태고지’를 그리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남자의 손은 맹세의 제스처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의 수태를 알리기 위해 주목을 끄는 손짓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여자의 고개와 왼손 역시 마리아가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그대로 따르고 있지요. 부부가 맞잡은 손 뒤의 의자 등받이 조각은 출산을 보호하는 성인 마가렛과 용의 모양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임신과 출산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신랑 뒤편의 창가에 놓인 과일도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순결한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장면을 종교적 상징을 담은 도상으로 보는 이유는 거울 주위에 장식한 10점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입니다. 창세기에 묘사한 아담과 이브의 창조, 그들의 관계를 통해 신약의 에베소서에서 전하고 있는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 성도(교회)의 관계를 부부 관계를 통해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또한 불을 밝힌 단 하나의 초도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새로운 기법을 통해 변화한 시대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내용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중세의 상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미스터리한 결혼식
서구에서 결혼식에 입회인 참석을 의무화한 것은 이 작품을 제작한 100년 뒤의 일로, 1545~1563년에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후 시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성직자의 입회가 의무화되지 않은 시대에 화가 자신이 입회인으로 참석해 결혼식 장면을 남긴 것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인 조반니 아르놀피니는 반 에이크가 그린 초상화에도 등장해 가까운 친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부가 서로의 오른손을 잡고 서약하는 대신 신부의 오른손을 신랑의 왼손이 잡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완전치 못한 결혼식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당시 남녀의 신분 차가 클 경우 이런 식으로 ‘왼손 결혼’을 함으로써 첩을 들이는 것과 유사한 형태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하여튼 이 그림은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이며 화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최초의 초상화이기도 합니다.

Jan van Eyck(1390(추정)~1441년) 현재 벨기에 지역인 플랑드르의 리에주 근교에서 태어났다. 형인 후베르트 반 에이크와 함께 당시 불완전한 유화를 개량해 현재의 상태에 가까운 상태로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매우 정교하고 철저한 세부 묘사가 가능한 회화가 탄생했으며, 각 사물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특히 종교화와 초상화에 뛰어났고 네덜란드의 회화 전통을 세운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글 | 장원(미술평론가)

Marc Chagall,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Les Fiancés de la Tour Eiffel), Oil on canvas, 150×136.5cm, Centre Pompidou, Paris, 1938~1939

에펠탑의 신랑 신부_ 마르크 샤갈

행복한 결혼, 축복받은 남녀
여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결혼식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끌어안고 그녀의 귀에 사랑의 밀어를 속삭입니다. 밝게 빛나는 태양, 천사가 들고 있는 화촉, 꽃을 들고 승천하는 여인, 바이올린과 첼로, 피리 연주자의 모습은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모티브입니다.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신부와 신랑의 모습은 그들의 설렘,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뒤로 에펠탑이 보입니다. 이곳은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입니다. 사랑과 행복 그리고 낭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결혼식 풍경입니다. 화가는 무지개를 이루는 7가지 색을 사용해 결혼식을 화려하게 채색했습니다. 그렇게 화가는 이 행복한 결혼식을 온 마음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감상 포인트
샤갈의 그림은 자전적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신랑을 샤갈로, 신부를 그의 아내인 벨라(Bella)로 이해합니다. 실제로 샤갈 부부, 곧 마르크와 벨라 커플은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커플로 손꼽힙니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소도시 비텝스크에서 만났습니다. 이 도시는 두 사람의 고향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다만 벨라가 보석을 다루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의 딸인 데 반해 샤갈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나이 차도 제법 커서(마르크는 1887년에, 벨라는 1895년에 태어났습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5년에 결혼한 부부는 1944년 벨라가 병으로 숨질 때까지 항상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벨라는 마르크가 혁명 이후 소비에트 미술계와 불화 끝에 베를린으로 망명할 때도, 여러 사정으로 파리로 가야 했을 때도, 또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으로 프랑스를 여기저기 옮겨다닐 때도, 끝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을 때도 항상 그와 기쁨과 슬픔, 고통을 함께하는 생의 동반자였습니다. 샤갈은 “오랫동안 그녀의 사랑은 나의 예술을 채워왔다”고 말했습니다. 마르크가 러시아어로 쓴 <나의 인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사람도 벨라입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면 이 작품은 샤갈이 1939년, 50대 초반의 나이에 완성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24년이 지난 후에 그린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그림은 20대 청춘 남녀가 바라보는 결혼이 아니라 50대에 되돌아본 결혼을 그린 것입니다. 더욱이 1939년 당시 마르크와 벨라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나치와 나치의 프랑스 괴뢰 정부의 유대인 탄압으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림에 나타난 행복, 즐거움, 설렘의 느낌은 깊이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이 작품을 어려움을 함께 견뎌온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바치는 고마움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고향을 상실한 부평초 같은 존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안식처에 바치는 감사의 기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에펠탑의 이미지를 제외하면 이 그림은 온통 두 사람의 고향인 비텝스크를 암시하는 모티브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그 모티브는 오직 신부를 통해서만 활기를 띨 수 있습니다. 마치 화가는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희망의 색
생의 후반부에 샤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와 영적 깨달음, 종교적 감정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인생을 색칠해나가야 한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비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태도는 현실도피적이고 최면적인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암울한 시대를 견디는 진정한 힘은 사랑과 희망일지 모릅니다. 샤갈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을 돌아보게 하고, 그 주변의 것들이 ‘지금 여기’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흔히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가 ‘감각적 쾌를 유발하는 색의 배치와 조율에 능하다’는 뜻이기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삶의 여러 국면에 그에 합당하는 색채와 정서를 베풀 줄 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Marc Chagall(1887~1985년) 러시아 비텝스크 출신의 유대인 화가. 러시아의 민속적 주제와 유대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의 원초적 향수와 동경, 꿈과 그리움, 사랑과 낭만, 환희와 슬픔 등을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면서 야수파, 입체파, 오르피즘,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작업방식에 영향을 받아 그만의 환상적 양식을 창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미국으로 망명했으나 전후 프랑스로 돌아와 활동했다. 생애 마지막 20년간 남프랑스의 생폴드방스에서 살았고, 1985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글 | 홍지석(미술평론가)

에디터 고현경
김보라(미술평론가), 장원(미술평론가), 홍지석(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