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 도는 세상
맛있는 밥의 조건. 첫째도, 둘째도 쌀이다.

그릇은 모두 Choeunsook Art & Lifestyle Gallery 제품
최근 새로 생긴 곰탕집을 찾았다. 미슐랭 스타 셰프가 오픈해 기대감이 남달랐다. 매콤하고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인 매운 곰탕이 대표 메뉴. 그런데 이 집, 밥맛이 끝내준다. 분명 보기엔 흰 쌀밥인데 구수한 누룽지 향이 올라왔다. 입안 가득 달착지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퍼졌다. 밥맛의 근원이 궁금해 직원에게 물어보니 ‘월향미’로 지었단다. 이름조차 생소한 월향미는 ‘골드퀸 3호’라는 쌀 품종을 충청남도 서산 간척지와 전라남도 영암 인근에 심어 수확한 쌀 브랜드 이름이다. 골드퀸 3호는 히말라야 야생 벼와 국내 재배품종을 교배해 만든 향미로 일반 쌀보다 많게는 4배 이상 가격이 높다.
과거에는 밥맛을 좋게 하기 위해 콩이나 팥, 다시마 육수 등을 섞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쌀 자체의 맛을 음미해 취향에 맞는 쌀 품종을 고르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실 이런 흐름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도쿄 긴자 쇼핑거리에 위치한 아코메야만 봐도 일본의 쌀 소비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쌀을 테마로 한 다이닝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전국에서 재배되는 쌀 중 100여 가지를 선별해 판매한다. 매장에 밥 소믈리에가 상주, 원하는 스타일에 맞춰 적합한 쌀도 추천해준다. 반찬투정은 해도 밥투정은 안 했는데, 이렇게 쌀 품종을 골라 먹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요즘 사람 들이 배가 불러서 그래”라고 말하는 어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입맛과 식문화가 변했기 때문이다. 커피 원두를 고르듯 원하는 쌀 품종을 골라 최상의 상태로 도정해 가장 맛있는 밥을 지어 먹는 것. 즉 한 끼 식사라도 더 건강하고 의미 있게 즐기자는 인식이 생겼다. 그렇게 쌀을 선별하는 요즘, 밥상 위에 오르는 인기 품종으로 앞서 소개한 골드퀸 3호 외에도 호품, 추청, 신동진, 하이아미, 고시히카리 등이 있다. 밥맛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품종에 따라 조금씩 찰기와 윤기, 맛이 다르다는 사실. 예를 들어 추청은 쌀알의 투명도가 높고 단단해 밥을 지으면 탱탱한 식감이 살아 있고, 신동진은 쌀알이 크고 수분이 적어 꼬들꼬들한 밥을 맛볼 수 있다. 쌀알이 유독 맑고 투명한 고시히카리는 밥을 지으면 찰기와 윤기가 뛰어나다.
쌀 품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덩달아 토종 쌀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 국빈 만찬에서 우리 토종 쌀인 북흑조, 흑갱, 자광도, 충북흑미 4종으로 지은 돌솥밥이 상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오래전 우리 밥상에서 자취를 감춘 토종 쌀을 되살려 만찬에 제공한 주인공은 우보농장을 운영하는 이근이 대표. “토종 벼란 역사적으로 농부들이 키워온 씨앗입니다. 1500종에 이르던 토종 벼는 일제강점기에 다수확 품종을 강요당하면서 많이 사라졌죠. 그리고 1970년대에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전 국토를 통일벼로 통일하며 토종 벼의 99.9%가 사라졌습니다.” 토종 벼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 쌀의 근본을 찾고 맛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현재 100여 종의 토종 벼를 부활시켰다. “토종 벼는 야생입니다. 키가 크고 기후 적응력이 뛰어나죠. 개량종에는 없는 까락(수염)이 있어 새나 병충해로부터 낟알을 보호합니다. 화학비료를 주면 키가 너무 커져 저절로 쓰러지기 때문에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해야 합니다.” 그렇게 건강하게 키운 토종 벼는 종자별로 맛도 각양각색이라고 강조한다. 구수한 맛, 단맛, 거친 식감 등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다고. 대표적 토종 쌀로 북흑조, 자치나, 대춘도, 화도 등이 있다. 이근이 대표가 특별히 아끼는 자치나는 까투리의 깃털 색깔과 모양을 닮은 이삭이 특이해 붙인 이름.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키가 크고 은은한 단맛과 씹을수록 기름진 맛이 나고 찰기도 적당하다.
이렇게 토종 벼까지 합세해 쌀 품종이 다양해지자 셰프들도 쌀밥을 깐깐하게 짓기 시작했다. 정식당은 월향미를, 밍글스는 조선향미를, 페스타 다이닝은 추청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의 그랜드 키친도 쌀 품종을 바꾸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기른 토종 쌀인 고대미를 선택한 것. 일반 쌀보다 영양소가 몇 십 배 많고 소화가 잘되는 특징이 있다. 식감을 위해 고대미와 햅쌀을 섞어 밥을 짓는데, 찰기가 덜하고 끝맛이 고소해 제철 나물 메뉴와 잘 어울린다. 엘본 더 테이블에서 새롭게 오픈한 효정연은 갓 지은 따뜻한 1인용 솥밥을 제공하는데,우리나라 최초로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을 도입한 유기농 쌀인 강대인 생명의 쌀만 고집한다. 차지고 윤기가 나는 담백한 솥밥에 곤드레, 톳, 능이버섯을 더한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밥이 맛있는 집’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고객에게 직접 쌀 품종을 고르게 하는 식당도 있다. 일식집 고료리켄은 아키바레(여주 혹은 이천), 고시히카리,오대미를 조금씩 담아 고객에게 보여줘 고르게 한 다음 즉석에서 솥밥을 지어낸다.
일부 마트에서 다품종 쌀을 구매할 수 있지만 일본처럼 쌀 편집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쉬웠는데, 최근 성산동에 동네정미소가 출현했다. 카페처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이곳은 쌀 쇼핑에 최적화한 공간. 추청, 고시히카리, 신동진, 오대미, 삼광, 하이아미 등 국내에서 생산한 다양한 쌀품종을 직접 도정해 450g 소포장으로 판매한다. “쌀도 시간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떨어져요. 보관에 따라 빨리 산폐하는 경우도 있고요. 가급적 소포장을 선택해 빨리 섭취하는 것이 가장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매장 총괄이사 김동규의 말처럼 동네정미소는 단순히 쌀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쌀 소비 문화에 앞장서고자 한다.
쌀 품종이 다양해진다고 쌀 판매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매해 쌀 소비량은 줄고 있고, 몇 해 전부터 쌀밥이 더 이상 주식이 아니라는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더 귀하게 쌀밥을 지어 먹고, 다양한 쌀 품종으로 밥맛의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 그래서 결국 쌀로 취향을 드러내는 새로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일은 오랜 세월쌀을 소비해온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
사진 선민수 촬영 협조 동네정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