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를 입다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격외적인 그림, 민화. 민중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한국적 회화를 일상용품에 덧입혔다. 해학적이면서 아름다운 그 모습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1 매끈한 백자 달항아리에 민화를 그려 넣는 승지민 작가의 ‘Lotus in the Moonlight’.
2 정지희 작가가 청화 안료를 이용해 책가도를 그려 넣은 독특한 티웨어.
3 32개의 도자기 타일을 이어 붙여 호방하고 친근한 여덟 마리의 호랑이를 표현한 김소선 작가의 ‘소나무와 흰 호랑이’.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까치 호랑이’는 기존의 규범에서 자유로운 그림이다. 까치와 호랑이는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한데, 어미 호랑이는 속눈썹을 치장하고 밝게 웃고 있으며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이렇게 실재적 소재를 다루지만 그 표현은 이상을 향하는,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간단하게 넘나드는 그림을 민화라 한다. 조선시대에 도처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그림쟁이들이 일상의 친근한 모습을 그려 대문이나 벽에 붙인 것이 민화의 기원. 엄격한 장중함을 추구하는 궁중 회화나 드높은 격조를 지향하는 사대부 회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익살스럽고 우화적이며 친근한 멋이 있다.
예부터 병풍에 붙여 집 안 장식으로 활용한 민화가 최근 ‘쓰임’을 고심한 작가들 덕분에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민화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만든 가구, 도자기 같은 생활용품을 앞세워 실생활에서 민중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운 백자에 민화를 그린 접시, 달항아리 같은 장식품. “도자 표면에 민화를 그린 후 불에 구우면 색이나 모양이 변하고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마 안 위치나 날씨 등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가마를 열고 작품을 꺼낼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노르웨이 베르겐 국립박물관, 일본 미키모토 진주도 박물관,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 등 해외 초대 전시를 통해 민화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있는 김소선 작가의 말이다. 그렇다면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백자를 캔버스 삼아 민화를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화는 할머니한테 들은 옛날이야기처럼 다정하고 아늑한 정서가 느껴져요. 고생스럽게 완성한 작품을 보면 신선하고 천진하면서 현묘하다는 생각이 들죠.” 32개의 도자기 타일을 이어 붙여 호방하고 친근한 여덟 마리의 호랑이를 표현한 ‘소나무와 흰 호랑이’ 같은 전시 작품뿐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접시에도 민화를 그려 넣는다. 접시 대표작 ‘학과 복숭아’는 십장생의 일부를 그린 것인데, 흙이 젖었을 때 조각도로 그림의 윤곽선을 파고 초벌구이한 후 그 안에 안료를 상감해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복숭아와 그 위에 고귀하게 올라선 학의 모습은 과감한 구도와 힘 있는 필치, 화려한 색채감이 돋보인다. 승지민 작가는 매끈한 달항아리에 한국적 정서를 담는다. 2010년 청와대 시연회와 서울 G20 정상회담 시연회 당시 외국인에게 한국적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백자 달항아리에 민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소박하고 일상적인 미의식을 투영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본래 달항아리는 눈처럼 흰 바탕에 부정형의 원이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이 백미다. 하지만 승지민 작가는 달항아리의 형태를 한층 매끈하게 다듬고 거기에 백합, 대나무 등을 그려 세련되고 현대적인 스타일로 완성한다.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 대신 화사한 자태로 미감을 자극한다. 생활 식기 중에서도 티웨어를 고집해 민화를 그리는 정지희 작가도 있다. 하얀 백자 위에 영롱한 푸른빛의 청화 안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데, 민화 중에서도 익살스러운 호랑이와 까치를 표현한 작호도, 책과 문방구, 화병 등이 등장하는 책가도를 주로 선택한다. 그중에서도 원근법을 무시하고 사물을 입체화한 책가도에 매력을 느껴 여러 스타일로 변형하고 있는 중. 뚜껑 손잡이의 꽃 장식이나 호랑이 꼬리로 둔갑한 손잡이 등 형태는 화려한 데 반해 기물 표면에 새긴 그림은 두루뭉술하면서도 정감이 느껴진다.

4 강은명 작가는 콘솔에 나무색과 잘 어울리는 모란꽃을 새겼다.
5 팝아트 감성을 담아 민화를 재해석하는 마저 작가가 만든 ‘Pink Room’ 장식장.
6 노경선 작가는 화투의 동식물과 사물을 본래 형태로 되돌린 투화를 제작했다.
채색이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조형 감각이 독특한 민화는 가구와 만나면 또 다른 작품이 된다. 민화를 응용해 현대 공간에 어울리는 전통 가구를 제작하는 강은명 작가. “목재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엔 안료의 성질상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한지나 실크에 그린 그림을 가구에 붙여 마감하거나 목재에 직접 고해상도로 출력하는 방식을 활용합니다.” 민화의 비례와 색상, 형태 등 고유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구와 균형을 맞춘 작가의 작품은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 책가도의 한 장면을 새긴 사방탁자는 선반에 실제 기물이 놓여 있는 듯한 착시 효과를 주며, 나무색과 조화로운 모란꽃을 그린 콘솔은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는 은은한 멋이 느껴진다. 전통적 민화에 팝아트 감성을 담으면 어떨까? 2차원의 평면 회화에서 출발해 3D 미디어 영상 작품, 작품의 모티브를 활용한 가구 디자인 제작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마저 작가. 까치와 호랑이가 어우러진 배경에 섹시한 소녀를 등장시키는 식으로 그만의 풍자를 더한 작품은 민화풍이면서도 춘화적 요소가 엿보인다. 유화지만 한국화 화법을 응용, 겹겹이 쌓는 중첩 채색 기법으로 완성해 특유의 선명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의 변주를 이끌어낸다. 한 화분에서 여러 가지 꽃이 튀어나와 얽히고설킨 모습을 그린 장식장을 보면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생생함이 느껴진다.
민화의 매력은 가구뿐 아니라 우산, 손수건, 성냥갑 등 아기자기한 디자인 제품에 스며들고 있다. 최근 노경선 작가는 엇모스트와 손잡고 민화를 새긴 화투를 제작해 화제를 모았다. 옻칠 위주의 작업을 이어온 그녀는 레이어를 쌓아 완성하는 민화의 전통 채색 방식과 동식물을 의인화하는 표현 방식에 이끌렸다. 기존 화투가 동식물이나 사물을 단순화해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면, 투화는 한국의 채색화를 모아놓은 서적들을 참고해 동식물과 사물을 본래 형태로 되돌렸다. 화투의 강렬한 색채에 비해 은은하면서도 동화적 매력이 강해 소장 가치가 있는 새로운 놀이패다.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 발전해온 민화에는 시대상과 한국적 정서가 잘 담겨 있다. 게다가 기본 틀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구성과 섬세한 선의 아름다움, 오방색의 화려함은 단숨에 우리를 매료시킨다. 일상으로 들어온 민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