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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의 향기

BEAUTY

예술가에게는 사소한 일상도 영감이 된다. 하물며 자연에 그림처럼 녹아든 16세기의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은 어떨까. 보테가 베네타의 향수 컬렉션 파르코 팔라디아노는 바로 이 빌라와 정원이 영감의 원천이다. 베네토 지방의 베니스와 몬테벨로비첸티노에서 그 새로운 장면을 마주했다.

1 몬테벨로비첸티노의 보테가 베네타 공방 정원에 놓인 파르코 팔라디아노 컬렉션의 새 향수 시리즈.

베니스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감에 쫓기다 떠나온 출장이기에 이 특수한 지형을 마주하는 순간 잠시 백일몽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베니스를 모티브로 꾸민 도쿄 디즈니시도, 라스베이거스 베니션 호텔도 아닌, 아드리아해의 수평선과 14세기의 찬란한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건축물, 그 앞을 떠다니는 곤돌라가 있는 진짜 베니스니까. 마감 피로로 메말라 있던 감성은 운하를 따라가며 금세 생기를 찾았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감상까지 갈 것도 없었다. 의도했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색이 벗겨진 담장과 이끼가 스며든 대문의 오묘한 색감이 여기가 이탈리아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런 일상의 장면을 보고 자랐다면 나도 예술가가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왜 이 나라에서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2 몬테벨로비첸티노 마을에 자리한 보테가 베네타 공방 입구.
3 놋 클러치 장인의 데스크.
4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영감이 되는 공방 풍경.

보테가 베네타의 바탕
이번에 이탈리아를 찾은 건 이 나라에서 탄생한 세계적 명품 하우스 보테가 베네타의 초대 덕분이다. 이 브랜드는 지난 1966년, 베니스가 자리한 베네토 지방의 또 다른 도시 비첸차(Vicenza)에서 탄생했다. 비첸차는 수많은 박물관과 교회, 역사적 빌라와 르네상스 궁전의 본거지로 1994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지역. 사람에게 출신지가 자연스레 녹아들듯 브랜드가 탄생한 지역도 브랜드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당연하게 베네토 지역은 보테가 베네타의 문화적 베이스가 되었다. 이 지역의 유니크한 색조는 절제된 듯 우아한 보테가 베네타의 시그너처 컬러 팔레트가 되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대에 지은 규모 있는 개인 저택 팔라초(palazzo)나 무라노의 유리공예 같은 베네토 지역의 다양한 예술과 문화는 보테가 베네타 디자인을 낳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보테가 베네타 하우스의 헤리티지는 이튿날 찾은 비첸차 지역 인근 마을인 몬테벨로비첸티노의 아틀리에에서 좀 더 면밀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베니스 본섬에서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 다시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이다. 와이너리가 연상되는 넓은 잔디밭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뒤로 팔라디안양식의 빌라가 보였다. 2013년에 완공한 보테가 베네타의 공방은 18세기의 빌라를 복원한 것이다. 빌라의 본래 구조를 존중하며 신중하고 정밀하게 완공한 이 아틀리에는 이탈리아 환경유산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 빌라와 정원이 펼쳐진 아틀리에의 정문에 들어서면 언뜻 눈으로는 원근감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5만5000m²의 널찍한 대지에 잔디가 깔려 있고, 빌라 주변으로 가지각색의 나무가 가득하다. 이곳은 크게 뮤지엄과 공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뮤지엄에는 인트레차토 기법으로 완성한 백과 의상 등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장식한 대표적 작품을 전시했고,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환경친화적으로 설계한 공방은 그 아카이브에 더할 작품을 계속 탄생시키는 중이었다.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차토 기법으로 완성한 액세서리는 일상에서 이미 익숙하게 들고 만져서인지 그 작품성을 무심히 여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제작 공정을 들여다보니 디테일 하나하나에 새삼스러운 감동이 일었다. 가죽을 꿰매지 않고 이어짜는 기술은 그 자체로 감탄사를 자아냈고, 가죽이라는 재료에 염색과 미세한 펀칭을 더하는 등 다채로운 기교를 더하는 작업은 그 자체를 예술이라 칭송할 만했다. 그리고 카바 백 작업 데스크를 지나 놋(Knot) 클러치를 만드는 장인을 만나는 순간, 시선이 그 작업 데스크에 꽂혔다. 인트레차토 기법으로 엮은 가죽 피스가 각각의 색감을 드리우며 놓여 있는 가운데 그 색감을 꼭 닮은 보테가 베네타의 새 향수가 오브제처럼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5 2016년 첫 선을 보인 컬렉션의 첫 넘버인 파르코 팔라디아노 I 매그놀리아.
6, 7 작년 여름 컬렉션에 추가된 세 가지 시리즈 중 VIII 네롤리와 IX 비올레타.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첫 장면
보테가 베네타의 초대는 놋 클러치 장인의 작업 데스크에 그림처럼 놓여 있던 향수 컬렉션,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새 향수를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파르코 팔라디아노에 추가한 6개의 향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공방 안에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그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유는 이 컬렉션의 영감이 다름 아닌 공방이 자리한 빌라를 비롯한 베네토 지역의 팔라디안 빌라와 이를 둘러싼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디자인한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은 클래식한 건축양식, 주변 경관과의 완벽한 조화로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 많은 건물을 세웠는데, 아이코닉한 기둥과 페디먼트(건물 입구 위쪽의 삼각형 부분)로 장식한 팔라디안 빌라는 16세기 초 베니스 상류층이 농지를 얻기 시작하면서 장미 정원, 과일나무, 포도밭과 풍성한 목초지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자연과 한 몸처럼 어우러진 정자에서 선조들의 시조가 흘러나왔듯 주변 경관과 완벽히 어우러진 팔라디안 건축물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렇게 보테가 베네타의 향수 컬렉션, 파르코 팔라디아노가 탄생했다.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시작은 지난 2016년이다. 팔라디안 빌라의 클래식한 헤리티지를 반영해 이름도 로마숫자 I, II, III, IV, V, VI로 붙였고, 대표적 원료와 영감을 연상할 수 있는 단어가 부제목처럼 따라 온다. 하루가 시작되는 정원의 아침, 그 안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나무, 배나무 옆을 거니는 가을의 어느 순간, 팔라디안 빌라 밖에 피어 있는 아젤리아, 빌라 근처의 허브 정원을 거닐 때의 기분, 따뜻한 햇살아래 활짝 핀 장미 등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에서 비롯된 영감은 그 첫 장면의 스토리다. 2017년 6월에는 여기에 3개의 향수를 더했다. 팔라디안 정원에 흐르는 라일락 향기, 태양이 가장 높이 떴을 때 오렌지 과수원의 공기, 이른 저녁 차가운 공기가 깔리는 순간의 바이올렛꽃 향기를 영감으로 하는 VII, VIII, IX가 그것이다. 그리고 2018년, 여기에 다시 6개의 장면이 추가되었다.

8 거울을 통해 무엇이 진짜인지 모를 눈속임 효과를 보여준 파르코 팔라디아노 컬렉션 새 시리즈의 전시 존.
9 테아트리노 디 팔라초 그라시에서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 현장.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새 장면
파르코 팔라디아노는 철저한 사실적 묘사로 눈속임 효과를 주는 트롱프뢰유를 후각적으로 표현한 향수로 알려졌다. 향을 통해 자연에서 얻은 최상의 원재료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컬렉션의 새로운 향수 시리즈는 몬테벨로비첸티노의 정원 가운데에 설치한 커다란 거울 기둥 사이에도 숨어 있었다. 깨끗한 거울에 반사된 하늘과 잔디는 무엇이 진짜 자연이고 무엇이 그 그림자인지 모를 만큼 황홀한 혼란을 주며 이 향수 컬렉션이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다.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흘깃 눈길만 주는 기분으로 스친 새 향수 시리즈와의 공식적 통성명은 다음 날 이루어졌다. 새 향수 시리즈의 프레젠테이션이 열린 베니스의 테아트리노 디 팔라초 그라시(Teatrino di Palazzo Grassi)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레노베이션한 255석 규모의 홀이다. 1951년 야외 공연장으로 대체된 이후 다시 오랜 시간 방치되다 지난 2006년 레노베이션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기존 컬렉션과 함께 올해 새롭게 등장한 6개의 향수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호기심을 지닌 채 스친 누군가의 스토리는 흥미로울 수밖에.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이 전하는 무궁무진한 장면 중 이번 향수에 영감을 준 순간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10 팔라초 그라시에서 펼쳐진 공식 디너 모습.

우선 대망의 열 번째 향수, X의 영감은 올리브다. X라는 로마숫자 옆에 붙은 부제목은 기억하기도 쉬운 올리보. 이 향수를 만든 아망딘 마리(Amandine Marie)는 어린 시절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던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올리브나무 그늘의 분위기를 향으로 재현하고 싶었다고. 그린 계열의 톱 노트가 시더우드와 코파후 에센스의 향으로 전개되는 향은 상큼한 피클보다는 잘익은 열매의 느낌에 가깝다. XI은 알렉시 다디에(Alexis Dadier)와 소피 라베(Sophie Labbe′ )가 합작해 완성한 카스타뇨다. 단단하고 웅장한 밤나무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달콤하면서도 스모키한 텍스처가 피부를 감싼다. 이끼가 뒤덮은 오크 나뭇가지가 팔라디안 빌라를 넘어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조향사 퀸틴 비슈(Quentin Bisch)는 XII 퀘르시아를 만들었다. 말린 과일과 위스키, 럼의 향이 숨어 있는 우드노트를 크리미하게 감싸 안는 듯한 향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기분을 선사한다. XIII 콰드리포그리노는 산들바람에 실려온 허브 향을 떠올리게 한다. 조향사 오렐린 기샤르(Aure′ lien Guichard)는 이 향수를 통해 맑은 이슬과 생기를 불어넣는 바람, 바질 잎의 텍스처까지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다음 넘버인 XIV도 싱그러운 향의 느낌을 이어받는다. 팔라디안 정원에서의 봄날 산책을 주제로 시도니 랑스쇠르(Sidonie Lancesseur)가 만든 XIV 멜라그라나는 블랙커런트 열매와 만다린의 조합으로 석류를 한 입 깨문 듯한 느낌을 준다. 조금 더 개성 있는 시트러스 향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향. 새로운 시리즈의 마지막 XV 살비아 블루는 XII에 이은 퀸틴 비슈의 작품이다. 블루베리 주스 같은 향수는 세이지, 라벤더, 장미를 조합한 플로럴 머스크 향을 내뿜는다. 조향사의 의도대로 눈부신 새벽녘 팔라디안 정원을 상상하게 한다. 이 6개의 새로운 작품은 기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인트레차토 패턴 유리병에 담겨 컬렉션을 더욱 풍성하게 완성한다.

11이번에 6개의 향수를 더한 파르코 팔라디아노 컬렉션은 이로써 총 15개의 향수 시리즈로 채워졌다.

흘깃 눈길이 간 근사한 상대와 이야기를 나눈 후 호감도가 더욱 상승하는 경우가 있다. 파르코 팔라디아노에 새롭게 등장한 6개의 향수가 꼭 그렇다. 보테가 베네타 공방에 놓인 가죽 조각과 베니스 운하를 지나며 스친 담장, 몬테벨로비첸티노의 정원에서 만난 꽃잎을 꼭 닮은 색감으로 호기심을 끌더니 그 안에 품은 깊은 향기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파르코 팔라디아노 숫자의 끝은 무엇이 될지 감히 예상할 수 없다.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며 보여줄 장면은 아직 끝없이 남아 있으니. 이번 6개의 작품만으로는 그 캔버스를 다 채우지 못했을 조향사의 생각은 어떨까? 테아트리노 디 팔라초 그라시에서 만난 아망딘 마리에게 슬쩍 물었다. 파르코 팔라디아노의 또 다른 향수를 만들게 된다면 그때는 팔라디안 빌라와 정원의 어떤 장면을 포착할 것 같은지. 그녀의 개인적인 생각만으로도 이 컬렉션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만약 이 컬렉션에 다시 참여하게 된다면, 제가 선택할 재료는 아마도 화이트 스톤일 것 같아요. 이 역사적 건축물을 이룬 스톤이 향기로는 어떻게 태어날지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에디터 이혜진(hjlee@noblesse.com)
사진 제공 보테가 베네타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