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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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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없는 세상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이야기.

이즈음 달력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저축은커녕 담배도 못 끊고 허리 사이즈만 몇 센티미터 늘린 1년이 또 간다.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는 시점이 다가오면서 결혼이나 성공만큼 뭉근히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바로 ‘사람 노릇’. 돌아가신 외조모는 항상 “사람은 본디 제 나이에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제때 장가 못 간 막내 삼촌과 매일 동생과 푸닥거리하는 내 꼴을 보고 한 쓴소리였다. 사람 노릇엔 여러 구실이 있었다. 자식 구실, 학생 구실, 친구 구실, 애인구실, 거기에 밥벌이까지. 그중 어른 노릇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고 살았다. 해본 역할이라곤 20대 초반 학생회장이라며 거드름 피우던 기억이 전부다. 후배가 늘고 조카들이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야 할 시점이 왔다. 아, 물론 어른이란 상대적 개념이지만 그런 자리가 잦아진다는 얘기다. 그룹에서 가장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혹은 직급이 높은) 사람이 될 때가 많다. 내가 현재 어른의 사전적 의미인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고 경제적으로 완벽히 독립한 것도 아니라 발을 빼고 싶지만, 한국 사회에서 어른은 거의 반강제적 인사이동에 가깝다. 그래서 어른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걸 해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게 되는 걸 상상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30~40대는 이와 다를 바 없다.
어른이 뭔지 알 수 없으나, 나이가 차면서 ‘되고 싶은 것’보다 ‘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쯤은 깨달았다. 유난히 뉴스가 많은 한 해였지만 꺼림칙하게 마음에 남은 사건이 있다. ‘송도 아파트 주차장 봉쇄 사건’이다. 입주자인 자기 차량에 주차 단속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은 50대 여성이 주차장 입구를 자신의 일본 중형 세단으로 틀어막은 일이었다. 주민들은 망치로 차량을 부수기보다 메모지에 쓴 아주 정중하고 고상한 말로 차주를 타일렀다. 그중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됩시다”라고 쓴 메모를 뉴스 카메라는 오래 비췄다. 아주 천박한 가십이었다. 벌거벗고 세상을 혼자 사는 것 같은 이기심이 감지돼 입안이 썼다. 한 가지 더 있다. 한동안 인터넷을 달군 서울 시내 한 곳의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장애 아동 부모들과 지역 주민의 대립이었다. 학부모들은 “때리면 맞을 테니 부디 학교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반대편 주민들은 ‘주거 환경 침해’와 ‘교통 불편’ 등의 이유를 들며 극렬히 반대했다. 노년에 자산이라곤 꼴랑 집 한 채뿐인 대한민국 기성세대들 사정은 이해가 됐지만 끝끝내 마스크를 벗지 않고 그들 앞에 선 어른들이 괴물처럼 보였다. 천박함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추악한 얼굴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자주 그런 것과 마주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죄책감은 점차 커져간다. 이젠 아무리 부정해도 아이보단 어른에 가깝다. 기성세대로 강제 이동된 것이다.
지난해에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직후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인터뷰를 했다. 주제는 다소 심오한 ‘불확실성의 시대, 그들의 고민’이었다. 세상이 하 수상한 때였고 주제가 주제인지라 자연스레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화의 골자는 사회적 천박함의 회복, 그리고 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건강한 가치관 같은 것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가슴이 먹먹했고 스멀스멀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대체 왜 이 모양이냐고 엄하게 따져 묻자 씁쓸하게 읊조리던 그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어른이 없어서 그래. 지금 사회엔 어른이 없어.”
어른이 없다. 지난해에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14%를 넘어선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에서 무슨 개풀 뜯는 소리냐 물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사회엔 노인만 있고 어른이 없다. IMF와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뒤로 한국에서 어른 노릇은 오지랖이 됐다. 가정이 해체되고 내 새끼가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마당에 어른 노릇은 가당치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주가는 회복했고 사회도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회를 아우르던 가치관은 재생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던 최고 권력자들의 민낯(아무리 관대하게 평가해도 그들은 수준 이하였다)이 미디어를 통해 전국에 방영됐고, 사회・예술・경제・학계의 어른이라 불리던 권력자들의 추악함이 미투 운동을 통해 까발려졌다. 이 사회는 최소한의 자기 검열도 의무화하지 않은 채 성장만 해왔다. 그런 어른 따위는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았다. 조선시대엔 60세만 돼도 나라에서 포상을 했다. 평균수명이 40대를 웃돌던 시절 장수는 하늘이 감화할 만한 삶을 산 사람이 누리는 보상 같은 거라 믿었다. 21세기 한국에서 나이는 물리적 시간 외에 큰 의미가 없다. 유교적 관습에 의한 예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어른이 되는 건 일종의 도제 시스템 같은 거다. 마음속에 존경하고 닮고 싶은 좌표 하나 모셔두고 그 발자취를 좇으며 완성하는 거다. 목적지 없이 성장한 우리는 성인이 됐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돼라 한다. 그 채근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전시는 오세경 작가의 개인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였다. 작품 중 ‘아수라’는 말 그대로 지옥을 담아냈다. 죽은 상어를 먹던 개가 해변에서 교미하는 뱀을 바라보는 풍경을 그린 회화였다. 그 혼란스럽고 불안한, 끔찍한 광경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자라버린 아이들이 바로 우리다. tvN의 <어쩌다 어른>은 적잖이 당황한 우리끼리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답 같은 건 나도 모르고, 나는 이렇게 살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대화다. 거기서 얻는 위로와 그려지는 앞날이 있다.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어른 노릇, 사람 노릇>엔 무엇이 어른 노릇이고 사람 노릇인지 애석하게도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자신의 유년기부터 6・25사변과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삶을 꾸리기까지 과정, 글 쓰는 것과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을 뿐이다. 비법이나 지침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읽고 나니 흐릿하게 당대의 어른이 어떻게 사람 노릇을, 어른 노릇을 하고 세상을 떠났는지 알 것 같았다. 선생은 자신의 삶과 역사에 당당했다. 선생은 스스로 ‘정통 6・25세대’라 칭하며 숱하게 일어를 사용하면서도 일본을 욕하는 자신들에 대해 “그렇다고 그분들의 반일 감정이 가짜라고 비웃지 마라. 우리 세대의 운명적인 이중성일 뿐인 것을”이라고 말한다. 또 “우리는 기꺼이 현재 너희들이 누리는 부의 밑거름이 됐으면서도, 돈의 중요성과 함께 돈의 가치의 부정적인 면을 꿰뚫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겠냐”고 되묻는다. 스스로 “너희들을 사랑하는 잔소리꾼 할미”라 칭하는 선생은 젠체하지 않고 타이르지 않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적는다. 선생의 자취와 경험이, 적어놓은 글과 억세지 않은 가치관이 켜켜이 싸여 어떤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무수한 시간과 기억, 경험이 완성한 모자이크가 선생을 어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또 한 명의 어른이 세상을 떠났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투병 중에도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엮어 냈다. 처음 글을 배울 때 선생의 <말과 시간의 깊이>를 읽었다. 여전히 소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평론집 중 하나다. 그건 내게 소우주였다. 거기서 당대 작가들의 글과 그 글의 의미를 배웠다. 말과 언어의 무게를 어렴풋이 가늠했다. 선생은 번역하고 평론을 쓰고 강단에 오르면서도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글을 썼다. 마지막 산문집엔 당시 시국에 대한 가감 없고 진중한 의견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 글에서 원로는 현역이었고 가장 뜨거운 논객이었다. 무엇보다 특정 대상이나 세상에 대해 막연한 비판만 하지 않았다. 선생은 기성세대로서 죄책감과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는 걸 알았다. 아랫사람으로서 그런 모습에 감화된다. 선생에겐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삶을 살아왔으며 현재도 플레이어 위치에 서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문장이 있었다.
추석 연휴엔 생각지도 못한 눈물을 한바탕 쏟았다. KBS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공동 주최한 <도전 골든벨: 만학도 100인의 도전>에 한글을 늦게 깨친 노인들이 출연했다. 가난과 전쟁, 성차별과 장애로 배움의 시기를 놓친 그들은 생의 반을 훌쩍 넘기고서 한글을 배웠다. 그림일기 쓰는 게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 막내아들이 십 수년 전에 보낸 편지에 답하기 위해, 집을 나간 자식을 찾기 위해,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글을 배웠다. 그들은 아이처럼 정성껏 획을 그어 보드에 글자를 적었다. 그런 시도와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삶의 종반에 체면이나 피로를 잊고 배우는 모습이 좋았다. 아마도 저런 게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일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 첫발을 내딛는 세대가 될 것이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엔 대체 어떤 노릇과 구실을 하며 살아야 할지 단서조차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늙어야 한다. 품위 있고 공동의 가치를 염려하는 지혜로운 노인으로 나이를 먹어야 한다. 우리가 첫 발자국이자 좌표가 될 수 있다. 이건 어떤 종류의 의무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일러스트 최익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