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보다 돋보이는 파리의 그라피티
거주민과 관광객, 예술가와 정치 행정가 모두를 만족시킨 모델, 파리 13구의 스트리트 아트.

파리 13구 전경.
에펠탑, 루브르, 센강으로 대변되는 낭만의 도시 파리. 하지만 막상 가보면 더럽고 냄새 나고, 노숙자와 소매치기가 많은 뉴욕의 뒷골목과 많이 닮았다. 땅에 발을 딛고 바라본 파리가 전 세계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어 실망감이 몰려온다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파리의 하늘은 정말이지 높고 푸르러 그것을 배경 삼는다면 그 어떤 것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술을 발휘한다.
그 하늘을 배경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고층 건물의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린 대형 벽화 50여 점을 선보이는 것. 딱히 입구도, 출구도 없지만 관람객은 이 건물들을 따라 산보하듯 거닐면서 혹은 지상으로 달리는 전철을 타고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언제 전시가 열리느냐고? 전시는 이미 5년 전부터 시작됐다. 수년간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이 작품 전시, 보수(또는 파기), 재작업을 지속하고 있어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건물의 외벽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바로 파리 13구에서 진행 중인 ‘스트리트 아트 13’ 프로젝트다.
먼저 파리 13구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13구는 파리의 전체 20구 중에서 아주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촌도, 빈민촌도 아닌 지역이다. 하지만 아시아인, 특히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그래서 독특한 색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3구의 특징 중 하나는 고층 아파트가 많다는 것. 고층 아파트를 선호하는 한국인과 달리 ‘고층 아파트=HLM(공공임대주택)’이라는 선입견을 지닌 프랑스인에겐 그저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시끄러운 동네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이 오래된 잿빛 고층 건물들이 어떤 이에게는 ‘빈 캔버스’로 보였다.

파리 13구 전경. 에토스(Ethos)의 ‘무제’.
그들은 13구의 구청장 제롬 쿠메(Jerome Coumet)와 갤러리 이티네랑스(Galerie Itinerrance)의 대표 메디 벤 셰이크(Mehdi Ben Cheikh),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다. 그 시작은 이러했다. 제롬 쿠메는 13구에 미스 틱(Miss Tic)이나 네모(Nemo) 같은 전설적 그라피티 작가의 아틀리에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13구의 이미지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마침 13구의 센강 변에 스트리트 아트에 특화한 갤러리 이티네랑스가 문을 열면서 함께 손잡고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3년 시작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철거 예정인 10층 아파트 ‘라 투르 13(La Tour 13)’ 한 동 전체를 100여 명의 스트리트 아티스트에게 내준 것. 4~5개의 방이 있는 빈 가정집 36채, 그 4500m2의 공간을 각 아티스트에게 ‘분양’하고 마음껏 변경(파괴 가능)하거나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아티스트들은 방 안이나 계단뿐 아니라 건물 외벽에도 각자의 스타일로 라이팅이나 그라피티, 벽화, 캘리그래피, 설치 작품 등을 남겼다. 거주민이 모두 떠나버린 장소에 온갖 귀엽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어우러져 임시 거주하게 된 것이다.
아파트가 완전히 철거되기 전, 딱 한 달만 일반인에게 개방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순식간에 라 투르 13은 꼭 방문해야 할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라 투르 13을 구경하려는 수천 명의 관람객이 4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사회현상을 각종 미디어에서 앞다투어 다루었고, 이후 라 투르 13은 예술계의 새로운 이벤트 유형(아티스트들이 철거가 예정된 장소를 점유(occupation)해 작업하기)의 선례가 되었다. 이런 이벤트는 일시적 예술, 작품을 팔거나 남기지 않고 소멸한다는 스트리트 아트의 특별한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1 디페이스(DFace)의 ‘사랑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것이다’.
2 엘 시드(eL Seed)의 ‘인간의 심장보다 도시의 형태가 더 빨리 변한다(라 투르13 프로젝트)’.
라 투르 13의 성공에 힘입어 갤러리 이티네랑스의 프로젝트는 지속, 확장되었다. 센강 변의 산책길 2km 바닥에 작품을 새긴 ‘스트림’ 프로젝트, 외곽순환도로의 4500m2에 3D 효과로 작품을 제작한 ‘페리페리크’ 프로젝트, 그리고 에펠탑 등 파리의 관광 명소나 튀니지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을 후원해왔다. 그러나 가장 지속적으로, 가장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파리 13구에서 진행 중인 스트리트 아트 13 프로젝트다.
이미 지난 5년간 전 세계에서 온 유명 아티스트 22명이 13구의 건물에 대형 벽화 50여 점을 남겼다. 관공서의 승인과 후원, 자발적인 아티스트의 참여 외에 이 프로젝트의 일등공신은 주민이다. 아티스트들은 보통 작업 준비 단계부터 주민의 의견을 구한다. 주민들은 몇몇 스케치 중 실제 실현될 작품을 선택하고, 오랜 시간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작업하는 이들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곤 한다. 작품이 완성된 후 주민들이 자신 있게 “내가 C215의 ‘고양이’에 산다”, “내 집은 작가 오베이(Obey)의 ‘저항’이다”라고 말할 때 아티스트들은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에 함께한 아티스트 대다수가 불법일 수밖에 없는 그라피티 작업을 하다 경찰에게 잡혀가고 재판받는 등의 과정을 겪었기에, 지역에서 환영과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경험은 그들 작업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세스(Seth)의 ‘센강 변’.
물론 그 전환점은 아티스트뿐 아니라 13구 주민 그리고 일반 관람객에게도 해당된다. 즉 이들 ‘대중’은 난해하고 값비싼 작품이 걸린 현대미술관에 입장하지 않아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예술 장르를 선도하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무료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기념비적 대형 벽화라는 형태로 거리에 장엄하게 전시된 작품들은 파리 13구라는 장소가 스트리트 아트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담당하도록 해주었다.
스트리트 아트 13 프로젝트를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 아무것도 없다. 보들레르가 말한 파리를 걷는 산보자, 플라뇌르(flaneur)처럼 정처 없이 13구를 걷다 보면 우연히 눈앞에 펼쳐지는 대형 프레스코화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만약 정해진 동선에 따라 한 작품도 빠짐없이 감상하고 싶거나, 아티스트에 대한 정보나 작품 해설을 보고 싶다면 streetart13.fr에 접속하는 것이 좋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적용 가능한 지도 앱을 다운받으면 본인의 현재 위치에서 출발하는 상세한 여정 설명은 물론, 각 작품 아카이브에 접속할 수 있다. 작품별로 준비 과정과 실행 과정을 담은 동영상과 인터뷰, 작품 해설과 작가 설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스를 좀 더 빠르게 주파하고 싶다면 전철 티켓 한 장으로도 충분하다. 파리 메트로 6호선이 플라스드이탈리(Place de l’Italie) 역에서 센강 변까지 지상을 달리는 동안 창문 너머 펼쳐지는 벽화들은 하늘이라는 캔버스에 순식간에 명작을 그려내는 신의 솜씨처럼, 우리에게 파리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줄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글 한의정(미학·미술 이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