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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참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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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고 절박하게 연기하는 배우, 권율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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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종의 파티다. 타인을 연기하며 대중 앞에 서는 삶. 여기엔 온갖 달콤한 향과 샴페인이 넘친다. 스포트라이트와 시선이 쏟아지는 필름 속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권율은 그런 화려함을 즐기지 않았다. 과장된 웃음이 퍼지고 플래시가 터지는 연회장에서 그는 ‘어쩌면 이 모든 건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권율은 가끔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럴 때면 어떤 공포가 밀려왔다. 벨벳 턱시도 버튼과 타이를 풀고 비상구로 뛰쳐나갔다. 텅 빈 새벽 거리를 홀로 헤맸다.
권율의 데뷔는 자연스러웠다. 단역과 조연을 거쳤고, 이젠 무대 인사에 빠지지 않는 배우가 됐다. 손쉽게 해낸 것 같지만 부침이 있었다. 그는 한동안 작품을 찾지 못했다. 배우 인생의 시작점이었다. 무수히 많은 오디션을 보고 거울 앞에서 대사를 중얼거렸다. 꽤 긴 공백의 시간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 파티의 여흥을 즐길 수 없다. 태연하게 해내는 듯 보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기 전날엔 극도로 예민해진다. 연기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권율에겐 그게 유일한 진짜며 실존하는 세계다. 그걸로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을 증명한다. 사력을 다해 연기해야만 그 세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권율은 밋밋하다. 이렇게 즐길 것 많은 세상에서 일상을 오롯이 연기를 위해 쓴다. 운동을 하고 대본을 연구하며 대사를 웅얼거린다. 작품이 끝난 뒤에도 모니터링하며 부족한 것을 체크한다. 그런 진지함이 데뷔 10년 남짓한 배우에게 3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쌓게 해줬다. 절실히 맨몸으로 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 그게 권율이란 배우다.

(쉐라톤 팔레스 호텔 서울 펜트하우스에서) 창밖을 자주 내다본다. 어떤 풍경이 시선을 잡아 끄나.이 근처에서 운동을 한다. 자주 오는 편인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다. 저곳이 이런 형태였구나, 저 골목이 이렇게 좁았구나, 그런 걸 봤다.

운동을 좋아하나? 배우에게 운동은 일종의 필수과목 같은 거라서 어쩔 수 없이 한다. 사실 스포츠는 보는 걸 더 즐긴다. 집도 삼각지 인근인데, 혼자 하면 못할 것 같아 이 근처에 사는 윤계상을 좇아 정했다. 그래서 그나마 빠지지 않고 한다.

파티는 즐기는 편인지, 턱시도가 잘 어울린다. 아마 파티와 세상에서 거리가 가장 먼 사람이 나일 것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게 좋다. 오늘 차림처럼(권율은 맨투맨 셔츠와 청바지, 사파리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수수한게 편하다.

서울이란 도시와 잘 어울린다. 외모나 말투, 그냥 서울 사람 같다. 나고 자란 곳은 동부이촌동이다. 부모님은 아직 거기 계시고. 독립을 해야겠는데 멀리 가진 못하겠더라. 걱정하실 것 같고 귀찮은 일도 많아질 것 같고. 그렇다고 귀찮은 걸 부모님께 떠맡기겠다는 건 아니다. 근처에 살아야 밥도 자주 얻어 먹으러 갈 것 같아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 20대 중・후반으로 생각했다. 필모그래피도 굉장히 빡빡하다. 거의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30편 가까이 했다. 그냥 열심히, 겸손히. 그게 모토다. 일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하나.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 한다. 데뷔 직후 일이 없었다. 선택받지 못하던 때를 떠올리면 축 처져 있다가도 힘이 난다. 그때 끓는 에너지만큼 일을 못했던 게 힘들었다. 그러니까, 내게 일을 하면서 힘든 건 힘든 게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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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잘 팔리는 배우가 하는 고민인 ‘소모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물론 경계하는 부분이다. 연기를 하면서 매번 신경 써야 하는 것이고. 그런데 늘 다른 캐릭터가 나올 수는 없다. 권율이라는 중심은 있어야 한다. 다만 작품마다, 배역마다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가려 한다. 작품을 본 뒤 관객의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심플한 이미지. 그런 건 작품마다 다르게 가져가려 한다.

데뷔가 2007년이다. 데뷔 이후 작품까지는 공백의 시간이 있다.큰 기회를 잡고 데뷔를 했다. 그때는 이게 수순이고 앞으론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기고만장해질 수도 있었는데, 덕분에 겸손해졌다.(웃음) 데뷔 이후 한참 동안 일이 없었다. 꽤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도 그런 티를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 버틸 수 있었던 건, 힘들긴 했지만 나 자신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쌓인 내공이 조금 있다. 감사한 시간이다.

브라운관, 스크린. 특별히 나누지 않는다. 요새 배우들 특징이기도 한데, 어느 순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미지를 위해서도.아직까지 매체를 가리진 않는다. TV든 영화든 내게 도움이 되고 뭔가를 배우고, 또 그걸 통해 성장할 수 있다면 가리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연극이나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이든 일장일단이 있다. 영화는 공부와 연구가 길다. 정제된 장면을 완성해야 한다. 드라마는 함께 호흡하고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순발력도. 그런데 진심으로 해야 하는 건 모두 같다.

10년 남짓한 활동 기간 중 최근 몇 년이 권율에겐 중요했다. 배역의 비중이 늘고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특히 올해.물론 이전에도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났다. 그때부터 쌓인 것들을 이제 조금씩 알아봐준다고 생각한다. 찾는 배우가 된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그래서 불안함도 커졌다. 2017년 드라마 <귓속말>을 정말 힘겹게 끝냈다. 이후에 바로 영화 <챔피언>과 드라마 <보이스2>에 출연했다. 연달아 작품을 하면서 나를 사랑해준다는 건 기대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걸 알았다. 압박감이 늘면서 촬영 전날이나 후에도 복습과 예습을 절실히 하고 있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예민해질 때가 많다.

연기를 보면, 꽤 수월하게 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리 없이 자연스럽다.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만, 실상은 꽤 치열하게 하고 있다. 모든 연기자들이 마찬가지일 거다. 카메라 뒤에선 무수히 많은 땀을 흘린다. 대중 예술을 하는 사람이니 카메라 앞에 설 땐 열과 성을 다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

굉장히 전형적인 외모다. 모범생이나 부잣집 아들, 대기업 실장 같은 역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얼굴이다. 배우로서 그런 이미지가 있다는 건 장점이라 생각한다. 다만, 실제 나와 달라서 고민이지. 사실 그런 배역이 들어오면 어색해서 고민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캐릭터를 맡되 내가 가진 부분을 입혀서 입체적으로 표현하면 되겠다 싶다. 거기서 오는 이율배반적 쾌감이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2>에서 맡은 이상우가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부유한 집안, 성공한 스펙이지만 소심하고 지질한 모습을 연기하는 게 즐거웠다. 어쩌면 이상우가 권율의 평소 모습과 가장 닮은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멋진 캐릭터도 좋지만 1차적 이미지에 갇힌 역은 싫다. 물론 그건 배우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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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영화 <잉투기>를 재미있게 봤다. 희준이 굉장히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맞다. 그런 부분을 고민했다. 애초에 감독님과 이야기한 캐릭터의 정의가 ‘선이 또렷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부유한 듯하지만 그렇게 부자는 아니고, 공부를 좀 하지만 그렇게 잘하지도 않는 캐릭터. 그냥저냥 같은 인물이 분명 내 주위엔 많았으니까. <잉투기>는 현장이 젊었다. 많은 부분을 논의하면서 만들어갔다. 내가 거의 가장 형이었다. 한 번 더 하고 싶어 감독님께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 <박열>의 이석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었다. 클래식한 연기도 잘 어울렸다. 이석은 고리타분하지만 강직한 캐릭터다. 조선에서 온 지식인 기자가 ‘불령사’를 바라봤을 때 가질 수밖에 없는 불신을 생각했다.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닐까?’, ‘소꿉놀이하듯 장난치는 건 아닐까?’ 같은 의심을 갖다가 그들에게 감화되고 지지하게 되는 과정을 상상했다. 외부에 있다가 영화 후반부엔 그들과 동화되는 모습을 어색하지 않게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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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과 극점에 서 있는 게 영화 <챔피언>의 진기다. 개인적으로 권율이란 배우에게 꽤 호감을 갖게 된 이유다. 까불거리면서도 연민이 느껴졌다. <챔피언>은 개인적으로 꽤 힘들었던 작품이다. 영화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이라 드라마가 심각하게 흘러갈 때마다 적절한 위트를 보여줘야 했다. 이제껏 맡은 역 중 가장 행복해하는 인물이지만, 나는 가장 힘들었다.(웃음) 자주 벽에 부딛혔다고 할까? 스스로의 부족함을 많이 느낀 작품이다. 그래도 그 벽을 몸으로 들이받으면서 영화를 마쳤다. 맨몸으로 부딪히다 보니 어떤 실마리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인 권세인은 어떤 사람인가? 인생을 즐겁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평가는 아니다. 무미건조하다, 재미없다, 지루하다 같은 평이 대부분이다. 원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도 하고, 요란한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즐거운 이벤트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거다. 큰 매치가 있으면 제일 친한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경기를 본다. 술은 맥주 한 캔 정도?

겉모습은 화려해 보인다. 연예인과 잘 어울린다.회사에서 내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배우처럼 행동해라, 연예인처럼 해라’ 이거다.(웃음) 연기자 혹은 연예인은 직업일 뿐이다. 배우가 되어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령 길에서 요구르트 아주머니를 만난다면 “안녕하세요? 이거 맛있어요? 새로 나온 거 있으면 하나 주세요.” 난 이렇게 한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게 맞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내겐 당연한 거다.

무미건조까진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진 않다. 가령, 입체적 캐릭터 연기를 위해 밋밋하게 사는 연기자 같다. 그래서 요샌 다른 걸 생각한다. 난 가능한 한 정해진 루틴에서 움직인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 가고 사무실에서 책 보다 직원들과 농담 따먹기 하는 하루. 저녁엔 다시 운동을 가고 집에 가서 영화 보고 그런 일상. 이걸 지켰을 때 오는 뿌듯함도 있다. 그런데 변주를 주고 싶다. 즉흥적인 여행이나 이제껏 하지 않은 걸 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다. 그런 경험도 배우로서 밑천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중 ‘절박하게’, ‘절실히’, ‘진심을 다해’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연기는 정답이 없다.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모두 가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영화 <명량>을 하면서 최민식 선배에게 많이 배웠다. 특히 작품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 선배는 누구보다 유쾌한 분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다른 사람이 된다. 제사를 올리는 듯한 성스러운 느낌. 가장 깨끗한 상태에서 연기를 한다. 아직까지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가 거기에서 오지 않나 싶다. 배우라면 그런 모습을 갖춰야 한다.

이젠 더 큰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올 거다. 원 톱으로 극을 끌고 나갈 수도 있다. 신인 시절엔 한 작품을 내가 오롯이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지금은 아니다. 겸손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준비가 됐을 때 맡았으면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만큼 책임감이 커지는 거니까 착실히 준비하고 싶다. 지금은 첫 번째, 두 번째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한 작품에 동화될 수 있는지, 거기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좋은 배우들과 여러 작품을 했다. 여복보단 남자 배우 복이 많다. 로맨스도 하고 싶을 것 같다. 물론 로맨스도 해보고 싶다. 진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사랑 영화. 그런데 예쁘기만 한 건 싫다. 현실적 요소가 듬뿍 묻어나는 생활형 사랑 영화를 해보고 싶다.

차기 작품이 사극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맡았다. 방정맞을 정도로 발랄하지만 가슴이 뜨거운 인물이다. 박문수는 챔피언의 진기처럼 극의 완급 조절을 담당한다. 이전에 몸으로 들이받으면서 배운 것이 쏠쏠하다. 사극이지만 기존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연기할 작정이다. 내가 상상한 당시 사람들도 지금 우리가 표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2019년엔 더 많은 일이 일어 날 것 같다.매년 비슷한 바람인데, 여러 작품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거기서 좋은 경험을 했으면 싶고. 성장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이번 드라마는 아마 봄까지 촬영할 것이다. 차기 작품은 영화가 될 것 같다. 드라마를 마치는 대로 곧장 들어갈 예정이다.

마지막 질문, 권율의 무기는 무엇인가?두려움 없는 도전, 치기 어린 패기, 무모하리만큼 넘치는 자신감.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김참   스타일링 정윤기, 황선영(Intrend)   헤어 임정호(블로우)   메이크업 임정현(블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