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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예술 55년

LIFESTYLE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로 데뷔한 뒤 <밤으로의 긴 여로>, <신의 아그네스>,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세일즈맨의 죽음>, <장수상회>,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의 연극과 영화, 드라마 그리고 라디오 진행까지,
배우 손숙은 지금껏 수많은 배역과 역할을 소화하며 어느덧 현장의 원로가 됐다. 그간의 연륜과 노고를 인정받아 지난해 9월 예술의전당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현장과 행정을 연결하는 키맨으로 활동 중인 그녀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6일 개막한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2월 10일까지 2주간 연장 공연을 결정했다는 뉴스가 떴다. 새로 추가한 공연은 총 19회.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석’과 파지 줍는 ‘송 씨(송이뿐)’의 사랑, 주차 관리소에서 일하는 ‘장군봉’과 치매로 기억을 잃은 ‘조순이’ 부부의 연민 등 네 노인의 인연과 우정,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무대는 달동네 언덕길이다. 한 공연에도 수십 번 무대 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원로 배우들이 그렇지 않아도 힘겨워 보였는데 늘어난 공연 횟수만큼 더 수고해야 한다니, 더 많은 관객이 연극을 볼 수 있다는 건 환영할 만하나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든다.
매회 만석, 거기에 공연이 연장됐다는 건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결코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서울 공연을 마무리한 뒤 지방 순회공연까지 잡혀 있는 상황. 아무리 이 연극의 원작 웹툰이 단행본으로 출간돼 15만 부라는 판매고를 올렸다 해도, 2011년 영화로 제작해 160만 관객을 동원하며 7주 연속 실관객 평점 순위 1위를 달리는 저력을 보이고 2012년엔 공중파에서 다시 드라마로 제작해 좋은 시청률을 찍었다 해도, 극본과 연출의 퀄리티, 그리고 이순재 . 박인환 . 손숙 . 정영숙이라는 한국 대표 배우들의 연기 예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흥행은 그야말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새벽녘 낡은 오토바이로 우유 배달을 다니는 까칠한 할아버지 김만석은 아침마다 마주치는 송 씨 할머니와 차츰 가까워지며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송 씨 할머니의 과거 상처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이별한 뒤 천국에 가서야 행복한 재회를 맛본다. 한편 건물 주차 관리를 하는 장군봉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데, 아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자 한날한시에 함께 죽는 방법을 택한다. 양쪽 모두 가슴 먹먹한 사랑이다. 네 노장 배우는 이 작품을 통해 연극이 왜 ‘배우 예술’이라 불리는지 몸소 증명하며 한국 연극의 저력을 또 한번 보여주었는데, 그중 젊은 시절의 아픔을 간직하고 홀로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송 씨 할머니를 연기한 손숙의 절제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선사했다.
쉬는 시간 없이 110분간 이어진 무대에서 관객들이 무엇보다 가장 크게 탄식한 부분은 송 씨 할머니와 만석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별 장면. “왜 꼭 헤어져야만 했나?”라는 질문에 손숙은 누구라도 송 씨 할머니였다면 그랬을 거라 말한다. “송 씨 할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에게 버림받고 연이어 아이를 저세상으로 보낸 아픔이 있는 인물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또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겠죠. 언젠가 죽음으로써 만석 할아버지와 헤어져야 한다면 차라리 살아 있을 때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사랑을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느 하나 ‘애정’하지 않는 연기가 없지만, 손숙이 유독 마음이 가는 장면은 따로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싹 틔우던 중 죽은 전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만석 할아버지가 며칠간 송 씨 할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잠수탄 장면. “매일 동네 어귀에서 마주치던 만석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자 송 씨가 ‘어, 이거 뭐지?’ 하며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며칠 동안 애타게 기다려요. 그때 할머니가 난생처음 느꼈을 사랑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손숙은 지난해에도 노부부 각자의 가슴에 묻어둔 진심과 아련한 사랑을 그려낸 <사랑별곡>, 70세 첫사랑의 설렘 가득한 로맨스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장수상회>를 통해 세월의 회환이 묻어나는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 바 있다. 당시 상대 배역은 이번에 함께 호흡을 맞춘 이순재와 국립극단에서부터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한 신구. 특히 신구와는 오랫동안 무대에서 합을 맞춰왔기에 새삼스레 ‘호흡을 맞춘다’는 표현이 더 어색하다.
“신구 선생님은 그 연세에도 여전히 연극을 너무 사랑하고, 연극에 대한 경외심을 지닌 분이세요. 연극을 대하는 태도도 놀랍죠. 예를 들어, 연극 작품을 시작하면 TV에서 섭외가 들어와도 거절하세요. 공연에 방해된다고요.” 그녀는 <장수상회> 기자회견장에서도 “신구라는 배우가 주는 믿음은 상당히 강해요. 눈빛만 봐도 신뢰와 믿음이 느껴지죠”라며 신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드러냈다.
최근 무대에서 부부로 자주 만나는 이순재 또한 그녀에겐 좋은 선배이자 파트너다. 특히 2016년 소시민의 비극을 통해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내용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이순재와 손숙은 부부로 분해 무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이끌며 흥행을 책임졌다.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벌어진 중산층의 몰락을 그린 <세일즈맨의 죽음>은 주제도 무겁고 시간도 길어 기존 다른 작품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연습이 요구되는 작품이었다. 특히 발성은 매우 중요했다.
“연극의 가장 기본은 말, 즉 언어예요.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연극을 보면 가장 정확한 언어와 발성을 확인할 수 있죠. 연기도 중요하지만 연극배우라면 저 멀리 2층에 앉은 관객까지 다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크게 내야 해요.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편집이나 효과가 불가능합니다. 오직 대사를 통해서만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장르죠.”
젊은 날 남편의 사업이 실패해 어쩔 수 없이 TV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해 <짝>, <현정아 사랑해>, <그래도 좋아>, <블러드>, <나인룸>, <뷰티인사이드> 등 최근까지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고,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개 같은 날의 오후>, <아이캔스피크>, <챔피언>, <귀향>, <꽃손> 등에도 출연한 까닭에 시청자 입장에선 그녀를 전방위 연기자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의 눈빛과 호흡, 반응이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연극만이 손숙 자신의 ‘본질’이란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관객과 소통이 가능한 예술이라는 점 외에도 그녀가 연극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또 있다. “연극은 민주주의 교육의 기본이 되는 예술이에요. 함께 모여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때 비로소 완성되죠. 좋은 연극은 감독이나 연출의 일방적 지시가 아니라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고 배려할 때 만들어져요. 주역과 단역, 의상, 소품 등이 서로를 기다려주고 이해하는 과정, 이 모든 것이 사실 민주주의의 토대 아닌가요?” 그녀는 초등학교 국어책에 연극에 관한 콘텐츠와 대본 지문을 넣어야 하고 초등학교 교실에서 사라지고 있는 학예회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학예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인성 공부의 기초가 된다고 그녀는 믿는다.
이처럼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온 예술 교육에 대한 철학과 현장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간 예술의전당과 국립극단 등 공공 기관 이사와 아시아나 국제 단편 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 같은 문화계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며 쌓은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지난해 9월 예술의전당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55년을 현장에서 뛴 배우로서, 행정가 입장이 된 그녀의 심정은 어떨까?
“들어와서 보니 아쉬운 점이 참 많아요. 일단 정책 입안자들이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가 낮고 그 중요성을 너무 몰라요. 말로는 예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왜 중요한지’ 물으면 대답하지 못해요. 예술을 깊이 있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행정을 하다 보니 늘 겉도는 정책이 많습니다. 지원이 필요한 분야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눠주기식, 생색내기식 배분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이사장으로 취임하기 한참 전부터 정치인과 공무원을 만날 때마다 꾸준히 이야기하고 강조하고 있는데, 여전히 실행으로 옮기질 않네요.”
예술의전당 운영만 해도 그렇다. 1년 예산이 약 500억 원인데, 정부 지원금은 그중 30%가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금액은 예술의전당이 스스로 벌어 쓰라는 말. 이는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예술의전당을 대한민국 최고 공연을 볼 수 있는 곳,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공연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그녀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순수예술이 어떻게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겠어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죠. 그건 선진국도 마찬가지예요. 해외의 유명 공연장을 들여다보면 국가나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지원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술의전당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이에요. 적어도 전체 예산의 최소 30%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받아야 좋은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무대에 올릴 수 있어요. 그게 안 되면 지금처럼 대관으로 수익을 내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죠.” 충분한 지원금을 주지 않으면서 간섭이 심한 것도, 국가가 필요 이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하기 어렵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은 행정적 문제점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녀가 ‘고대극회’라는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배우 생활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공연 예술계의 인프라가 장족의 발전을 거둔 것은 그녀도 인정한다. 우선 전국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공연장이 생겨난 게 그렇다. “작년에 지방 공연만 30군데 이상 다녔어요.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죠. 전두환 대통령 시절만 해도 지방엔 공연장이 없었어요. 죄다 체육관뿐. 그런데 지금은 인구 10만 명인 도시에도 공연장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있다. 10만 명의 도시에는 그 규모에 어울리는 공연장을 설계해야 하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크게만 지어놓은 것.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장은 “예술의전당이 약 2500석이니 우리는 1500석 정도하면 되지 않겠어?” 같은 이상한 셈법을 적용하며, 문화 예술 분야에 할당된 예산을 공연 기획이 아닌 건물에 쏟아부었다. 인구 10만~20만 명 도시에 건립한 1500석 극장은 관객을 동원하기도, 큰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또다시 예산을 지출해야 하니 결국 질 높은 공연을 기획하기란 점점 요원해진다.
희망적인 건, 공연장이 늘면서 공연 예술을 즐기는 관객이 증가하고 관객의 수준 또한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공연을 보며 관객이 음식을 먹거나 옆 사람과 잡담하고, 심지어 아이가 우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휴대폰이나 기침, 옷깃 소음 등 관객 스스로 각별히 주의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요.”
손숙은 그동안 아그네스와 원장 수녀 사이의 갈등을 그린 <신의 아그네스>, 한 일가족의 몰락을 이야기한 <밤으로의 긴 여로>, 굴곡진 현대사를 인간적으로 다룬 <침향>, 두 자매의 욕망과 시기를 그린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성폭행 피해 여성의 변호를 맡아 열연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소외된 여성의 지위를 인식하고 투쟁하는 <개 같은 날의 오후> 등 여성이 주체가 되는 많은 작품에 함께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녀를 페미니즘적 성향의 배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여성의 아픔이 직접적으로 녹아 있는 작품, 여성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많긴 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생각이 다르다. 페미니즘적 작품을 스스로 골랐다기보다, 그런 성격의 배역이 들어왔기 때문에 함께했다는 것. “난 사실 페미니즘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잖아요. 다를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봐요. 요즘 세대는 자꾸 남성과 여성, 청년과 장년, 고용주와 고용인, 그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 가르던데, 다르다고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하면 좋겠어요. 나는 그런 역할을 연극이 할 수 있다고 봐요. 연극은 소통의 예술이니까.”
대학교 3학년 때 결혼해 일찍 아이를 낳고, 남편 사업이 어려워 빚을 지고, 그것을 갚느라 힘든 시간을 보낸 그녀.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활발하게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는 그녀에게도, 한국 연극계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어제도 박정자 선생님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자’고 했어요. 아직 대본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도, 그걸 보러 오는 관객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죠. 매일 감사 속에서 살다 보니 이제는 내일 간다 해도 아쉬울 게 없네요.” 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