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만의 내러티브
지난해 12월,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자에 전소정 작가가 선정됐다. 이번 수상으로 2020년 가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기회를 얻은 전소정 작가를 만나 그녀의 작품 안에 흐르는 내러티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 안에 내러티브를 꾸준히 활용하는 전소정 작가.
에르메스재단이 후원하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은 잠재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상으로 그동안 장영혜, 박이소, 서도호, 박찬경, 구정아, 송상희, 정은영, 정금형, 오민 등 국내에서 손꼽는 작가가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심사위원단에게 “넓고 깊은 사유를 기반으로 시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과 신체적 수행성을 결합해 설득력 있는 작업을 보여준다”고 평가받은 전소정 작가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유령들, 싱글 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20분 30초, HD, 2017
작가님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신 후 조각에서 영상으로 매체를 바꿨어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조각 작업을 하면서도 회화나 사운드를 연결 짓거나 내러티브를 꾸준히 활용해왔어요. 제가 만든 조각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전후 관계를 맞추다 보니 이 매체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졌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과 방식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다양한 영상 매체 중 미디어 아트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실험성, 정치성, 운동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영화의 파급력은 미디어 아트가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지만, 예술 내의 실험성은 미디어 아트가 담보하는 것이니까요.
전업 작가가 된 후 작업한 첫 번째 작품은 무엇인가요? 2008년에 제작한 ‘The Finale of a Story’입니다. 핀란드 여행 중에 구상한 작업인데, 나중에 ‘Three Ways to Elis’(2010)와도 연결되죠. 약 50년 동안 혼자 집을 짓고 본인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던 한 무용수의 삶을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추적하는 내용인데요. 작업을 구상하면서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를 떠올렸어요. 한 광대가 ‘굶기’를 시작하다 어느 순간 굶기 자체가 신념이 되어 결국 굶어 죽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예술가가 자신이 상정한 이상을 추구하고 믿게 되는 과정을 엘리스를 통해서 다시 질문해보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삶을 산다는 것, 예술가의 태도, 예술과 대중이 맺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죠.
그것이 전문가들과 함께 한 ‘일상의 전문가들’ 시리즈군요? 총 열두 편의 영상이 ‘일상의 전문가들’ 시리즈에 포함되는데요, 첫 번째가 ‘노인과 바다’(2009)라는 작업입니다. 제가 핀란드에 머물 때 낚시를 하며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당시 저에게 낚시하는 법을 알려준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핀란드에 가게 된 계기는요? 헬싱키에 위치한 히압(HIAP)이라는 레지던시에 갈 기회가 있었거든요. 저는 레지던시를 통해 새로운 도시와 환경에서 사람을 만나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구조를 작업에 활용하는 걸 즐겨요.
파리에 있는 빌라 바실리프(Villa Vassilieff )에도 다녀오셨죠? 베통살롱(Betonsalon)이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제가 그곳에 입주한 첫 번째 한국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리서치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큐레이터와 작가가 함께 연구하는 식의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당시 저는 공감각이나 감각의 전이 같은 문제에 관심이 있었어요. 차학경의 텍스트를 안무가들과 함께 신체 언어로 번역한 프로젝트 등이 그때 진행한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작업실 운영이나 팀 운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근까지도 전시나 레지던시 등으로 해외에 머무느라 작업실이 따로 없습니다. 앞으로는 작업실을 만들어야죠. 팀은 따로 없고, 촬영이나 사운드 등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친구 5~6명이 함께 돌아가면서 서로의 작업을 도와주는 형태로 작업하고 있어요. 이들 중 영화감독 김유석(베이스 기타), 작곡가 도재명(드럼), 아티스트 안정주(기타, 신시사이저)와 함께 밴드 ‘검은 밤(Black Night)’을 결성하고 작년 가을에 1집 앨범을 냈습니다.
검색해보니 실험적인 가사와 과감한 사운드를 지닌 밴드라고 설명되어 있네요. 지난 12월에 뮤직비디오 쇼케이스도 있었군요. 저는 아코디언과 테레민을 담당했는데, 해당 곡을 연주할 만큼만 간신히 연습해서 무대에 섰어요. 또 지인들이 1집에 담긴 12곡 모두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낙원상가에 위치한 d/p라는 공간에서 연말 파티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이것도 매우 재미있었죠.

1마지막 기쁨, 싱글 채널 비디오, 6분 58초, HD, 2012
2소리를 만드는 사람들, 스리 채널 비디오, 16분 50초, 설치 전경, 2015. 201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장미로 엮은 이 왕관> 전시 전경.
3Interval. Recess. Pause., 싱글 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23분 47초, HD, 2017
작업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프로젝트마다 다르지만 ‘마지막 기쁨’(2012), ‘보물섬’(2014)과 같은 작업은 인물을 관찰하는 시간만 해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려요. 완벽한 시나리오가 있다기보다 결론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하죠. 마치 벽돌로 벽을 쌓아가는 과정과 같이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직조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열린 작업 방식이 비디오 매체가 실험성을 유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같아요. 저와 잘 맞아요.
대부분의 작품에서 내레이션을 많이 쓰는 이유가 있나요? 내레이션은 모두 주인공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시 쓴 것인데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역사적 자료나 문학 텍스트를 활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허구적인 제 목소리가 강조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방식은 등장인물의 현실을 좀 더 생생하게 보이게 하죠. 작업을 텍스트로 시작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원래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문학적인 영감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 작업에 소설이 주는 영감은 매우 큽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의 언어적인 장치가 주는 효과가 흥미롭죠. 그의 문장들은 종종 반복하고 변주하는데, 마치 푸가처럼 음성적으로도 그렇죠. 또 문학가들이 언어나 감각의 전이를 이루는 방식에도 관심이 많아요. 다와다 요코나 차학경 작가의 작품도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차학경 작가의 작품은 어떻게 참고하게 되었나요? 프랑스 친구를 통해서 <딕테(Dictee)>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프랑스어, 라틴어가 섞인 책이었죠. 저자의 개인적인 스토리이자 여성의 신화, 한국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텍스트에 관심이 갔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고 다시 프랑스에서 수학한 삶의 경로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인지 텍스트를 쓰는 방식이 영화의 편집 기술과 흡사한 것도 특이했어요. 이 책은 제가 ‘Interval. Recess. Pause’(2017)뿐 아니라 ‘보물섬’(2014)을 제작할 때에도 참고했습니다.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해오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을 고른다면요? 스페인 한네프컨스재단(Hans-Nefkens Foundation) 초청으로 2016년에 바르셀로나에서 3개월 동안 머문 적이 있어요. 그때 ‘광인들의 배’(2016)를 구상하면서 아는 분을 통해 맹인 댄서 후안 카사올리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시력을 잃은 사람’이 아닌, ‘맹인이라는 감각을 가진 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때 후안의 제안으로 저는 눈 주변을 테이프로 완전히 동여매고 지팡이를 짚고 도시 전체를 3시간 정도 헤맸어요. 의도적으로 시각을 제거한 3시간은 저에게 도시의 형태를 촉각으로 느끼게 해주었죠. 그동안 제가 얼마나 시각에만 의존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후안과 함께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그림 ‘광인들의 배’를 신체적 언어로 재해석한 퍼포먼스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시각 장애가 없는 사람도 걸어 다니기 어려운 기둥이 많은 공간에 함께 모여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어쩌면 후안만 볼 수 있는 상황이었죠.
후안만 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역설적이네요. 완성된 영상 작품 파일을 전달해드렸더니 이메일로 답장을 보내셨어요. “잘 보았다. 작품 안에서 내가 정말 광인이 된 것 같다”라고요. 완성된 작품을 함께 작업한 분들에게 전달할 때가 작업 과정에서 가장 기쁜 순간입니다.
10년 가까이 작업을 하고 계신데, 혹시 그동안 관심사에 변화가 있었나요? 초기엔 한국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나 경계에 선 인물에 관심을 가졌어요. 좀 더 미시적으로 인물의 삶에 접근해 예술과 삶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 관찰했죠. 당시엔 저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질문과 답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에 비해 지금은 좀 더 물리적인 경계나 이동과 같은 변화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수상하셨는데, 관련한 계획을 알려주세요. 올해 하반기에 파리 시테(Cite Internationale des Arts) 레지던시를 통해 4개월간 체류하면서 신작을 구상하고, 2020년 9월 초에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4보물섬, 싱글 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11분 09초, HD, 2014
5광인들의 배, 싱글 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22분 50초, HD, 2016
전소정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적 시도와 감각의 번역을 통해 미시적 관점에서 현재에 질문을 던지는 전소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했다. < Kiss Me Quick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5), <폐허>(두산갤러리, 서울, 2015), <심경의 변화>(인사미술공간, 서울, 2010) 등의 개인전과 <동시적 순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8), < Tell Me the Story of All These Things. Beginning Wherever You Wish, Tell Even Us >(빌라 바실리프, 파리, 2017), <제8기후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광주비엔날레, 광주, 2016), < What We See >(오사카 국립미술관, 오사카, 2013)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글 류정화(전시 기획자) 사진 JK(인물) 사진 제공 전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