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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의 회귀

ARTNOW

유기그릇이 현대인의 밥상으로 돌아왔다.
고루한 이미지를 벗고 시대에 맞는 실용성과 세련된 모습을 갖추었다.

1 전면에 스컬 디자인을 적용한 백코브7822의 밥주걱.
2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만든 유기제작소의 1인 반상기.

예로부터 ‘유기’라 부르는 놋그릇은 왕이나 귀족을 위한 상차림에 올랐다. 고아한 금빛과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함, 부지런히 공을 들여야 하는 까다로운 관리법이 그들의 고귀함을 대변했다. 조선시대에는 놋그릇에 대한 애정이 일반 백성에게까지 퍼져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계층을 가리지 않고 놋그릇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습기와 세균에 민감한 유기는 주기적으로 닦아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일산화탄소와 천적인 탓에 연탄이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유기그릇의 명맥을 이어온 건 유기 공방을 운영하는 무형문화재 장인과 이들의 제품을 판매하는 몇몇 업체였다. 다채로운 유기의 활성화 움직임은 비교적 최근 일. 생산 인력의 고령화, 수요 감소 등으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전통 공예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관련 사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행정·재정적 지원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줄곧 한정적인 디자인 안에 갇혀 있던 유기는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작업적 영감을 불어넣었고, 한층 현대적인 옷으로 갈아입으며 점차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채훈 작가의 ‘다문(Damoon)’ 플레이트 시리즈가 대표적 예다. 문채훈 작가는 전통 소재를 일상 속에서 부담 없이 쓰기 바라는 마음으로 옻칠과 유기를 조합한 그릇을 만든다. 옻을 붓으로 칠하면서 생긴 독특한 결이 밋밋한 디자인에 포인트 역할을 하고,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완성하기에 그릇마다 텍스처가 조금씩 다른 것이 매력이다. 화려한 그릇은 아니지만 두 가지 소재의 대비, 정교한 질감을 통해 한국적 모던함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윤(YOON)’은 주얼리 디자이너 이윤정과 무형문화재 이형근 유기장, 옻칠 전문 공예가 허명욱 작가가 함께 운영하는 유기 브랜드다. 다문과 마찬가지로 유기에 옻을 칠해 만들지만, 사용하는 색이 보다 풍성하다. 본인의 취향에 맞는 유기그릇을 디자인하던 중 우연히 허명욱 작가를 만나 옻칠을 접하게 되었다는 이윤정 디자이너는 “유기가 여러 색의 옻칠을 입으니 완벽한 전통이라 할 순 없지만 더없이 한국적인 작품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유기는 습기에 약해 오래 두면 색이 거뭇거뭇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릇 겉면에 옻칠을 더하면서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공방 세 곳을 거치다 보니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완성도가 높고, 서양 상차림과도 잘 어울리는 모던한 디자인 덕에 한국을 찾은 귀빈을 위한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3 컬러풀한 옻칠로 포인트를 준 윤의 그릇 세트.
4 다문의 플레이트는 짙은 옻색과 금빛 유기의 대비가 고급스럽다.
5 소재 특성상 술의 온도를 오랜 시간 유지해주는 놋담의 와인잔.

‘유기제작소’를 운영하는 공예가 김범용은 본인의 유기 공법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와 협업을 진행한다. 최근엔 산업디자인 스튜디오 ‘BKID’의 박예연 디자이너와 함께 1인 가구를 위한 반상기를 제작했다. 밥그릇과 국그릇, 찬기, 간장 종지, 여기에 맥주잔을 추가해 혼술을 즐기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섬세하게 반영했다. 제품 가운데를 중심으로 아래와 윗부분의 광을 각각 다르게 처리해 젊고 경쾌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 색감과 광택이 과하지 않기 때문에 잔잔한 무늬 그릇이나 깨끗한 백자와 매치하면 공들이지 않고도 멋스러운 식탁을 완성할 수 있다.
실생활에 밀접한 제품군을 확대하며 유기의 대중화를 이끄는 브랜드의 활약도 눈여겨볼 만하다. 국내 도자기업체 죽전도예가 선보이는 유기 브랜드 ‘놋담’에서는 기본 반상기를 비롯해 샐러드 볼, 와인잔, 샤부샤부용 냄비 등 다채로운 제품을 판매한다. 쓰임새는 다양해졌지만 심플한 디자인은 유지해 유기 고유의 멋과 담백함을 잃지 않았다. 사실 유기가 실생활에 유용한 이유 중 하나는 항균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백코브7822’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각종 주방용품에 녹여낸다. 얇고 긴 타원형으로 가공한 트레이가 그중 하나로, 식품을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유해균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유기로 만든 밥주걱, 유아용 식기도 소개하는데 스컬, 타이포그래피 등 기존 유기 제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키치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향후 신발 걸이나 살균 패드 등 유기의 항균력을 활용한 다양한 생활용품도 출시할 예정이다.
유기의 오랜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혹자는 징과 꽹과리를 이유로 꼽는다. 타악기의 진폭이 커지고 작아지는 맥놀이 현상은 오직 방짜 유기로 만든 악기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유기그릇이 모습을 감춘 시기에도 악기를 통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물 악기 소리를 민족의 얼에 비유한다면, 유기그릇은 선조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지혜로운 식탁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를 거듭하며 모양과 쓰임새가 발전하고 있는, 진화하는 유산으로서 말이다.

 

에디터 최별(choistar@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