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갤러리
연차가 무색한 관록과 연차에 맞는 신선함을 두루 지닌 갤러리 제이슨함은 밀레니얼 시대가 원하는 공간이다. 이 모두는 갤러리와 예술을 쉼 없이 생각하는 함윤철 디렉터의 공이 크다.

새하얀 캔버스를 닮은 갤러리 제이슨함.
아름다운 건축물이 밀집한 성북구에서 건축 작품으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외적으로 아름답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서울에서도 지대가 높은 지역인 만큼 자연과의 조화와 몇 세기가 지나도 통용되는 미를 갖춰야 그 많은 건축물 사이에서 비로소 작품으로 등극할 수 있다. 갤러리 제이슨함처럼 말이다. 아이보리색 직사각 외관은 캔버스를, 비스듬히 놓인 울타리는 동양화 재료인 먹을 연상시킨다. 건물 안과 밖을 이어주는 문은 목재를 둘러 주변 자연환경을 건축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며 곳곳에 시원하게 창을 내어 자연광을 온몸으로 흡수한다. 그 앞에 자리한 소나무는 건축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림자를 늘어뜨려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고 ‘JASON HAAM’이라고 쓴 황금빛 문패는 낙관으로 분해 화룡점정을 찍는다. 과거와 현대의 조우, 인간과 자연이 합심해 만들어낸 지속 가능한 작품. 그렇기에 갤러리 제이슨함은 어느 방면에서 봐도 예술적 위용을 갖춘 공간이다.
2018년 문을 연 갤러리 제이슨함은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신생 갤러리지만, 라인업과 활약상은 신인이라 보기 어렵다. 올리버 암스(Oliver Arms)의 회화를 건 개관전을 시작으로 워커 아트 센터와 LA 카운티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앤서니 피어슨(Anthony Pearson), 다수의 비엔날레에 참여한 미르체아 수추(Mircea Suciu)같이 세계 아트 신에서 유명하지만 비교적 국내 인지도가 낮은 작가들을 소개해왔다. 오는 10월 29일까지 그 기세를 이어 사라 루카스(Sarah Lucas)의 아시아 첫 개인전 < Sarah Lucas: Supersensible, Works 1991-2012 >를 개최한다.
흔히 사라 루카스를 yBa의 일원이라 부르지만, 작가의 또 다른 별명은 미술계 악동이다. 외설적이며 대범하고, 사회 풍자적이며 장난기 넘치는 작품으로 아트 신을 발칵 뒤집어놓은 게 그 이유다. 초기에는 외설적인 B급 신문 기사를 소재로 했고, 애연가로서 담배로 만든 가슴 위에 속옷을 입힌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다. 2000년대 후반에는 대표작 ‘Nud’를 시작한다. 속을 채운 스타킹으로 만든 조형물로 정체 모를 형상이지만, 그 안에는 강한 생명력과 연약함이 공존한다. 성(性)에 관한 내용을 과감히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은 노골적이지만, 어디서나 당당한 태도 덕분에 감상할 때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매력이다.
전시 이력만 나열해도 A4 15장을 가볍게 넘기는 이 사랑스러운 악동을 향해 많은 아시아 미술관과 갤러리가 러브 콜을 보내는 건 당연지사. 지금껏 정중히 거절하다 이제야 아시아 첫 전시 개최에 응한 건 갤러리 제이슨함 함윤철 디렉터의 공이 크다. 그것도 뉴욕 뉴 뮤지엄, LA 해머 미술관에서 순회 회고전을 열며 숨 가쁜 나날을 보내는 중 서울 전시 개최를 결정한 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 전시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갤러리와 미술에 관한 깊은 이야기 그리고 KIAF 첫 참가를 앞둔 소감 등 함윤철 디렉터와 나눈 대화를 공유한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해왔기에 뉴욕이 아닌 서울에 갤러리를 오픈한 점이 놀랍다. 그것도 서울의 갤러리 밀집 지역이 아닌 성북동 끝자락을 택했다. 요즘 작가들은 여러 도시에서 전시하길 원한다. 만약 런던에서 갤러리를 오픈했다면 사라 루카스의 전시는 이뤄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와 일하기 좋은 도시다. 서울에 갤러리를 오픈하기로 한 뒤 예술적 느낌이 나는 곳을 찾아 헤맸는데, 이 공간을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했다. 성북구는 우리나라 전통의 맥을 잇는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이 있으며, 서울에서 처음으로 구립미술관이 생긴 지역이다. 예술적 감성이 물씬한 이곳은 내게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차를 타고 이동하면 삼청동에서 그리 멀지도 않다.(웃음)

1 갤러리 제이슨함 함윤철 디렉터.
2 < Sarah Lucas: Supersensible, Works 1991-2012 >전 전경. 오른쪽에 걸린 작품이 ‘Supersensible’이다.
3 ‘Hard Nud’, 2012.
컬렉터인 어머니를 도우며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컬렉터로 지내도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갤러리 디렉터의 삶을 택한 이유가 있나? 사실 공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연구소에 근무했는데, 그 당시 틈틈이 미국을 오가며 어머니가 부탁한 작품을 사 왔다. 그걸 알게 된 주변 지인들이 대신 작품을 구매해줄 것을 부탁했고, 덩달아 옥션이나 예술 시장 등 현장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점차 지인이 아닌 고객이 생겼고, ‘이런 작품도 있다’라며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즐거웠기에 갤러리를 열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에 항상 감사한다.
현재 갤러리 소속 작가가 모두 외국인이다. 한국 작가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갤러리는 한 작가와 함께하기로 결정할 때 많은 점을 살핀다. 나의 경우 작품성, 작가의 철학은 물론 독창성과 영속성을 중요하게 본다. 독창성은 말 그대로 그간 미술사에 빗댔을 때 얼마나 신선한지, 영속성은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논의될 수 있는지 여부다. 작가와 갤러리가 함께 롱런하려면 모든 이가 공감할 만한 작품을 선보여야 하기에 글로벌 아트 신에서 통할 수 있는지도 살핀다. 아쉽게도 아직 이에 준하는 한국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한국 작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살피고 기다릴 것이다.
소속 작가 중 한 명인 사라 루카스의 전시를 진행 중이다. 심사숙고 끝에 전시를 결정하는 작가라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3년 전 아트 바젤에서 사라 루카스의 작품 한 점을 구매해 집 안에 걸어놓았는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다. 그녀의 작품을 컬렉팅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초기작이자 대표작 ‘Supersensible’(1994~1995)을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사라 루카스는 런던의 갤러리 사디 콜 HQ와 30년째 관계를 이어올 만큼 그곳 디렉터 사디 콜(Sadie Cole)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 또한 사디 콜과 친분이 있어 그녀가 서울에 왔을 때 사라 루카스의 작품과 우리 갤러리를 보여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Supersensible’을 중심으로 사라의 1990년대 작품에 근작을 더해 세미 회고전을 열자는 내용으로 대화가 발전했다. 그렇게 그녀의 아시아 첫 개인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얻었다.
시애틀 아트 페어, 아트 부산, 대구 아트 페어에 참여하며 국내외 무대를 경험했지만, KIAF는 처음이다. 오는 9월 26일 열리는 KIAF를 앞두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국내에서 가장 큰 무대인 만큼 다양한 작품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올 부스로 꾸릴 예정이다. 방문은 언제나 대환영이니 많이 찾아와주길 바란다.
몇 개월 후면 갤러리 제이슨함이 3년 차에 접어든다. 앞으로 운영 방향은? 방문객이 지금껏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한 예술을 경험한 뒤 그 여운을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한다. 눈앞의 이익만 좇는 게 아니라 항상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갤러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도 노력할 것이다. 또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 앞으로 갤러리에서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선민수(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