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밖 전복자
무대미술가 박동우에게 일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늘 ‘우리는 지금 여기서 왜 이 공연을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 무대를 그리기 시작하니까. 언제나 새롭고 적절했다.

그는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지금 막 무대에 올린 뮤지컬 <사랑했어요> 관람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staff’라고 쓴 명찰 하나로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제 몸인 듯 자연스러운 티셔츠와 운동화 그리고 청바지. 무대 위 클래식 연주자부터 제작 스태프까지 으레 검은 옷을 입기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평상복이라 봐도 좋겠지만 인터뷰를 마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만한 디테일을 무시로 생각하는 30여 년 경력의 무대미술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사욕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대답에 군더더기마저 없다면 더 어렵다. 글이나 말을 무기로 삼는 직업이 아닌데 대답을 짧은 한 문장, 완성형으로 끝내는 사람이라면 달리 보게 된다. 묵묵해 보이는 무대미술가 박동우가 그랬다. 모든 말의 어미를 흐리지 않는다. 오랜 팬들은 무대 위 미니멀한 요소로 그의 작품을 골라낼 수 있다. 평소 생각하는 방법이 항상 완성형이라는 뜻이 아닐까. 인터뷰 기사를 읽은 후 그의 이름을 검색하거나 경력을 가늠해보길 권한다. 그 이름을 뮤지컬 <명성황후>나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신과 함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예술감독으로 들어본 사람이라면 더 이해가 빠르겠지만.
지금은 중앙대학교를 거쳐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교수로 계시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만, 경영학을 전공하셨더군요?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우상이었거든요. 그분 소설에 연세대학교가 묘사되곤 했어요. 자유로운 공기가 느껴졌죠. 그걸 느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재수하면서 또 한 명의 우상이 생겼는데 김우중 회장이었죠. 매일 서울역 대우빌딩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그분처럼 되어야겠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실의 대학은 4년 내내 가장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었어요. 당시 군사정권 시절이었잖아요. 그때 대학 연극 동아리(연세극예술연구회)에 우연찮게 들어갔어요. 건축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구조적 공간을 구상한다든지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서 미술 동아리에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친구 따라 놀러 간 연극 동아리의 분위기가 좋더군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머물게 된 거죠. 연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요즘 표현으로 처음부터 ‘1’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할 일을 찾아 무대미술을 하게 됐어요.
말씀을 들어보면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큰 스케일도 즐기고요. ‘무대미술 하는 박동우’가 될 수 있었던 전환점은 무엇일까요? 그런가요? 우연일 수도 있는데, 대우에 들어갔다가 내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 못 견딘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1년 6개월 정도 다녔죠. 창의적인 일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뭘 할까’ 하다 ‘대학교에서 4년 동안 한 일을 해야겠다. 무대미술을 해야지’라고 정한 후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때 남대문시장에 화방들이 있었거든요. 대우를 그만둔 날 남대문시장에 가서 그림 재료를 샀어요. 그날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대학원 입시 준비를 했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재학 중 데뷔해 초기부터 각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놀이공원과 광고회사 계약직, 포스터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30년 정도 됐겠죠? 무대미술가로 처음 이름을 건 작품은 1987년 4월 산울림소극장 무대에 올린 연극 <숲속의 방>입니다. 무대미술을 한다고 하면 영화관 간판을 그리느냐고 물어보던 때였죠. 당시에는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워낙 초기여서 하나하나 해내는 게 힘겹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죠. 한국에서 공연이 늘어난 만큼 전공 학과도 늘었습니다. 저와 같은 무대미술가의 수도 늘었죠. 다양한 공연을 실험하면서 같이 성장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학생 때나 지금이나 개념 작업부터 시작하는 건 마찬가지예요. 학창 시절 지금만큼 전문적이지 않았을 뿐, 기본 작업 과정은 비슷했죠. 언제나 제게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도 비슷하고요. 21세기 대한민국의 뮤지컬은 예산 규모가 크지만 여전히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작품은 예산이 많지 않아요. 공간도 열악한 경우가 많습니다.

1 故 가수 김현식의 레퍼토리로 만든 뮤지컬 <사랑했어요>. 박동우는 극 중 철조망 장면이 가장 자신의 스타일에 가깝다고 했다.
2 뮤지컬 <영웅>(2009).
극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은 아마추어와 프로 간에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인가요? 무대를 디자인하려면 그게 어떤 공간인지부터 설정해야 하잖아요. 사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이 최종 공간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내 해석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나오기 때문이죠. 어쩌면 ‘사랑’처럼 굉장히 관념적인 텍스트일 수도 있고요. 그걸 이미지로 다시 한번 전환하는 거죠. 전환된 이미지를 가지고 실제로 무대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거고요. 공연이 이 시대에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먼저 생각하고, 우리가 여기서 왜 이걸 하는지 되짚다 보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죠. 그래서 전달자 입장에서 작품의 주제나 개념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고요.
공연계에서는 무대미술가 박동우를 말할 때 연출자 못지않게 분석력이 좋다고 합니다. 제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은 ‘우리는 지금 여기서 왜 이 공연을 하는가’예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묻습니다. 그게 제 작품 해석 방식인데, 우리는 현시대 한국 사람이죠. 한국 사람으로서 다들 몸속에 같은 역사와 DNA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고민 없이 예쁘게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일해서는 어렵겠죠. 기본적으로 시대와 사회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두고 생각합니다. 어떤 예술가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서 자유로울 순 없거든요. 무대미술가는 낯선 관객과 스태프 등 다양한 관계속에서 일하고 있어요. 결국 시대와 사회라는 것이 관객이 되어 극장에 오는 셈이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2500년 전 그리스 작품을 오늘의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세상을 잘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죠. 그래서 내가 이런 걸 해서 튀어보겠다 하는 욕구는 전혀 없어요. 가장 적합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만 고민하죠.
예를 들면요? 예를 들어 뮤지컬 <갬블러>(2008)는 주 무대가 카지노인데, 원 대본에는 간판 이름이 중국에서 따온 ‘자금성’이었어요. 독일 작가가 유럽인의 시각으로 아시아 문화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맡았을 때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공연으로 일본 순회공연을 할 예정이었거든요. 한국이나 일본 관객에게 자금성의 이미지는 규모가 클 뿐, 환상적인 공간은 아니었어요. 극 속에선 현실을 떠난 판타지의 이미지여야 하니까 저는 그걸 타지마할 같은 건축 요소가 있는 인도 무굴제국 배경으로 바꿨죠. 헨리크 입센의 연극 <사회의 기둥들>(2014)도 그래요. 원래는 노르웨이 어느 대부호의 거실인데, 난 그걸 침몰해가는 선실로 바꿨어요. 선실이 계속 기울어지는 거예요. 1막, 2막, 3막, 4막이 전개될수록. 그래서 배우들이 나중에는 이만한 경사에서 연기를 했죠. 자기 욕심으로 배가 침몰해가는 것도 모르고 그 안에서 계속 욕망에 불타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그것이 그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죠. 사회의 기둥이 지도자를 가리키는 거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부패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거죠. 그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세월호 참사예요.
무대의 시대 배경을 완전히 바꾸는데, 그런 것까지 허용이 되나요? 왜 허용이 안되죠? 그게 내 해석인데. 대부분은 다들 좋아해요.(웃음)
‘박동우 선생님’이니까 다들 좋아해주는 게 아닐까요? 시공간을 전복시키면 연출방식도 바꿔야 하잖아요. 예전부터 그랬어요.(웃음) 당연히 모든 게 바뀌죠. 의상, 음악, 소품까지 다 바꿔야 하고 배우들의 연기 패턴, 안무 등 모든 게 달라져요. 그런 아이디어를 연출가가 내는 경우도 많아요. 신라시대 역사 기록관에 관한 이야기인 <내마>(1997)도 그랬습니다. 원래는 왕궁이나 귀족의 집이 배경이었는데 그걸 현대의 목욕탕으로 바꾸었어요. 관객도 모두 목욕탕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극장 의자를 다 치워버리고 타일로 만든, 몸 담글 때 걸터앉는 곳을 좌석으로 바꿨죠. 어떻게 보면 너무 과감한 변화잖아요. 대부분은 그런 아이디어를 싫어하지 않아요. 얘기하면 수용합니다.
그걸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을까요? 원안에 충실해야 할 때도 있을 텐데요. 원안에 충실한 것이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해요. 극작가 차범석의 연극 <산불>(2011)이란 작품은 전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참혹한 폭력을 전쟁으로 표현한 게 아니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줄기로 풀어낸 거예요. 이미 한 번 치환된 작품인데 그걸 또다시 다른 걸로 치환할 경우 그 자체의 본질과 스타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요. 그걸 제가 또 바꾼다면 과한 것이라 생각해서 그대로 디테일만 묘사했어요. 한때 자작나무를 많이 써서 동료들이 ‘박자작’이라 부른 적도 있죠. 하지만 그보다는 공연의 본질을 하나의 이미지로 승화시켜야 할 때 ‘가장 적절한 게 뭘까’생각하면서 그 개념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해요. 가령 <왕위 주장자들>(2017)이라는 작품에선 공허한 권력을 표현하려고 거대한 나무뿌리가 공중에 매달린 무대를 그렸어요. 그걸 결정한 뒤엔 보통 ‘레퍼런스’라고 부르는 걸 찾아 사실적으로 만들어요. 실재하는 여러나무를 알아보고 가능한 한 비슷하면서 배우나 그걸 설치하는 스태프에게 안전한 소재를 찾는 거죠.
어떤 창작자든 남과 완전히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 욕구나 유행하는 요소를 더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거예요.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며 적정선을 찾아가는 박동우만의 방법은 뭔가요? 우리는 컨셉과 묘사를 구분해야 해요.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있겠죠. 다만 영감 자체에 대한 레퍼런스는 찾으면 안 돼요. 학교에서 학생들 과제를 받아보면, 핀터레스트나 구글 검색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타인이 정한 이미지에 자신이 귀속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게 원래 하려던 극의 본질을 다른 걸로 치환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해결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면 독서를 많이 하라는 거예요. 저는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소설이나 시에서는 구체적 정황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상상하며 읽게 되잖아요. 문학이라는 게 이미지를 텍스트로 표현한 것인데, 그걸 내가 풀어서 다시 이미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를 오가는 훈련을 계속하는 셈이죠.

3 연극 <왕위 주장자들>(2017).
4 연극 <사회의 기둥들>(2014).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뮤지컬 <명성황후>나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등을 맡은 분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작은 공연을 포함해 연간 스케줄을 빼곡히 잡고 쉼 없이 일하시기로 유명합니다. 무심코 창작극 공연을 보다 이름을 발견한 적도 많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직장 다니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쉼 없이 회사에 가세요?”라고 물으면 “내일이니까” 하겠죠. 저도 무대미술이 제 일이니까 그러지 않을까요? 그리고 즐겁잖아요. 무대미술의 좋은 점은 같은 일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늘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작품 속에서 새로움을 만나요. 스태프들도 그렇지만, 작품 속 캐릭터 역시 만나잖아요. 다른 이야기와 역할을 만나는 것이 늘 새롭고 즐거워요. 대본을 받아든 순간, 그것이 아직 음악 단계든 시나리오 단계든 하고 싶어져요. 행복한 순간은 대본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무대가 머릿속에 그려질때예요. 그런데 안 하면 아깝잖아요. 작품과 시대의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컨셉과 이미지를 찾아낼때도 쾌감을 느끼고요. <신과 함께-저승 편>(2018)은 대본을 보기 전 웹툰만 보고 어떻게 작업해야 할지 그려졌어요.
어떤 일이든 나이가 들고 경력도 30년 정도 넘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시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주변의 시기심도 늘고요. 질투한다고 누가 말을 하겠어요.(웃음) 특히 공연 같은 흥행 산업은 원래 대중적인 요소에서 출발해요. 굉장히 다양한 성향의 디자이너가 필요하고 그만큼 다양한 활동을 해요. 그런 면에서 경쟁이라 여기지 않고 그만큼 우리나라 공연 예술계가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늘 즐겁기 때문에 게으름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무슨 일이든 체력이 떨어지면 게을러지지 않을까 싶어요. 좀 더 파고들고 싶은데, 체력이 달리면 쉬고 싶은 생각이 들잖아요. 저는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어요. 환경도 보호할 겸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작업실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스키를 너무 좋아해서 겨울에는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그렇다면 무대 디자이너는 항상 젊음을 유지해야 할까요? 생각에도 나이가 있나요?
적어도 감각적인 면에서는요. 해외 무대를 따로 두드려보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산업계의 디자이너도 80대가 많은 걸 보면, 단순한 숫자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나이에 대해선 유연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한창 활동할 때는 그런 게 어려운 시대였어요. 앞으로 활동할 후배 세대는 많은 기회를 맞을 수 있을 거예요. 대신 최근에 일을 하나 기획했어요. 원형이 잘 보존된 지중해 고대 극장을 공연 팬들과 함께 여행 삼아 둘러보려고요.

주요 수상 경력
서울연극제 무대미술상(1989, 1991, 1995, 2005, 2010), 한국연극무대예술상(1998),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1991, 2000, 2015),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1995, 1996, 1997, 201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0), 문화부장관표창(2003), 이해랑연극상(2006), 더뮤지컬어워즈 무대미술상 (2010), 예그린어워즈 무대미술상 (2012), 예그린어워즈 혁신상 (2016),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예술감독, 대중문화예술제작스태프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2018), 2018 평창동계올림픽 국가유공자 국무총리 표창(2019)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촬영 협조 성남아트센터 뮤지컬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