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는 계속된다
은퇴 후 더 멋진 삶을 개척 중인 손연재의 이야기.

블랙 슈트와 이어링 Bottega Veneta.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리프 챌린지 컵’이라는 국제 리듬체조 선수권 대회를 직접 기획해 몇 달 전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1회를 열었어요. 리프 챌린지 컵은 만 5세부터 15세까지 주니어 선수들이 참가하는 리듬체조 국제 대회예요. 한국 리듬체조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별로 없다는 점이 항상 안타까웠거든요. 대회 전에는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끝낸 뒤 여행을 다녀왔고, 지금은 제가 운영하는 리듬체조 학원 ‘리프 스튜디오’ 수업 관리, 클래스 기획으로 정신없이 지내고 있어요.
은퇴 직후 리듬체조에 질렸다는 말까지 했어요. 왜 다시 리듬체조로 돌아온 거죠?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약 2년 동안 학교생활하면서 학생 기분도 만끽하고 뉴욕, 영국, 일본 등으로 닥치는 대로 여행도 다녔어요. 자유롭게 많은 경험을 하면서 앞으로 뭘 할까 고민도 많이 했죠. 결국 리듬체조가 가장 재미있고 또 제가 잘하는 거더라고요.
자유를 즐겨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가 마냥 달콤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어색하긴 했지만, 사실 너무 편해서 좋았어요.(웃음) 뭔가 하나를 보고 달리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게 없어지니 공허하긴 했죠. 선수 생활보다는 무대가 그리웠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번 리프 챌린지 컵의 갈라쇼를 준비했죠.

‘너무 기뻐해도 안 돼’, ‘울면 안 돼’. 기복이 큰 성격에 비해 선수 시절엔 마인드 컨트롤을 엄격히 한 걸로 알아요. 은퇴 후 스스로 감정에 충실하게 됐다는 점이 손연재를 변화시켰나요? 그때는 마인드 컨트롤이 책임감 같은 거였어요. 지금은 다른 부분의 책임감이 생겼죠. 사회인으로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대회를 주최하면서 책임감의 형태나 모양은 다르지만 중압감은 비슷하게 다가와요. 그래도 운동할 때처럼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최근에 가장 기쁜 일이 있었나요? 지금 하는 일과 관련된 거요. 리프 챌린지 컵을 준비하면서 여러 힘든 부분이 많았는데, 무사히 끝내서 기뻤어요. 3년 만의 첫 공연인데, 선수 시절이 떠올라 벅차더라고요.
울기도 했어요? 원래 자주 우는 편이에요.(웃음) 감정적으로 솔직한 편이라 영화 보면서도 울고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때와 장소는 가려야겠지만요.(웃음)
요즘 가장 큰 고민이나 걱정은 뭔가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리듬체조를 가까이할까, 리듬체조란 종목 자체가 어렵다는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원래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최근엔 이런 고민을 많이 해요. 내가 뭔가 부족해서 그런가? 고민하면서 스스로 자극을 받기도 하죠. 그래서 계속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려 해요. 돌이켜보면, 고민과 걱정이 절 움직이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실을 맺게 해준 것 같아요.

비즈 장식의 보디슈트 Faye Woo, 시스루 샤 스커트 Fabiana Filippi, 블랙 스트랩 슈즈 Manolo Blahnik.
누군가 설계한 대로 이끄는 삶에서 스스로 설계도를 그려야 하는 삶으로 변화한 셈이죠. 그 점이 가장 힘들어요. 선수 시절에도 힘들었지만, 마치 정답처럼 목표로 삼는 지점이 있었거든요. 스튜디오 운영은 정답도 없고 책임져야 할 것 투성이라 지금도 힘들지만 앞으론 더 힘들겠구나 싶어요.(웃음)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자신만의 기준이 있나요? 제가 뭔가를 하면서 받는 에너지가 기준이 되죠. 솔직히 철저한 성격은 아니에요. 즉흥적이고 직관에 맡기는 편이죠. 뭔가를 하고 싶다, 마음이 들면 하는 거예요. 리프 챌린지 컵을 시작할 때도 그랬고요. 어차피 일이란 게 아무리 좋아한들 직업이 되면 다르잖아요. 그럼에도 오래도록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 저를 필요로 하는 분야라면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리프 챌린지 컵은 리듬체조 국제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한다는 것, 꾸준히 개최하는 것에 의미를 두려 해요. 평생 이런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하고 싶어요.
스스로를 믿는 편이에요? 잘 못 믿어요.(웃음) 너무 어려워요. 스스로 믿기까지는 뭔가를 계속 잘되는 경험이 쌓여야 하는데, 은퇴하고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10개월밖에 안 됐어요. 아직 저 자신을 믿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실패할 게 뻔한데도 이거다 싶으면 뛰어드는 편인가요? 원래 성격대로라면 그래요. 그런데 ‘리듬체조 손연재,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를 아예 모른 척할 수 없으니, 대중의 시선이 부담으로 다가오긴 해요. 사실 배워보고 경험해보기 전엔 절대 모르는 건데, 그때까지 베일에 싸여 있을 수도 없고.(웃음) 사회인으로서 저는 이제 시작이죠.

블랙 풀오버 니트와 시스루 스커트 Fendi, 리본 스트랩 힐 Jimmy Choo. 파올라 나보네 디자인의 암체어 Gervasoni.
선수 시절 외 부분에서도 관심을 많이 받은 셀레브러티예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여론이 적지 않음에도 브이앱, 유튜브 등에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이유가 뭔가요? 요즘 사회적으로 악플이 심각한데, 거기서 제 이름이 빠진 적이 없는 것 같아요.(웃음) 속상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즐기려고 해요.(웃음) 많은 분이 진심으로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도 사람인지라 은퇴 후 아예 노출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한동안 조용히 지냈죠. 그러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건 손연재가 아닌 리듬체조를 알리고 싶어서예요. 리듬체조 하면 손연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리듬체조도 같이 잊힐까 봐요. 사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으니까 조금 더 자연스럽고 편하게 소통하려고요.
같은 리듬체조 카테고리라도, 선수와 지도자는 완전히 다른 일처럼 느껴져요.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나요? 당장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키우고 싶은 포부는 없어요. 올림픽에 나가려면 선수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잘 알고, 지도자로서 그 선수에게 인생을 걸어야 해요. 지금은 조금 천천히, 멀리 보면서 리듬체조를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좋은 선수를 배출하는 건 그다음 일이죠.
훗날 제2의 손연재를 꿈꾸는 프로 선수를 지도하게 되면 과거의 자신과 마주할 것 같기도 해요. 사실은 그게 두려워요. 선수 시절에는 몰랐던, 선수를 키울 때 지도자가 본 제 모습을 보는 거니까요.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은퇴하고 3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때 스스로 너무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갑갑하거든요. 선수들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겠지만, 그만큼 몰입했고 그 안에 갇혀 있었기에 지금 다시 뭔가에 갇힐까 봐 두려워요. 다른 걸 볼 여유가 없어지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블랙 점프슈트, 이어링, 뱅글, 인트레차토 리도 샌들 모두 Bottega Veneta.
제자들이 언젠가 손연재가 그랬듯, 넘어지고 포기하고 싶어 할 때 어떤 말을 해줄 건가요? 너무 힘들다는 걸 아니까. 사실 어떤 말로도 위로되지 않을 거예요. “열심히 잘 버티면 나중에 잘될 거야”라는 말도 할 수 없어요. 미래는 알 수 없는 거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선수가 있으니까. 운도, 실력도, 타이밍도 맞아야 하니 헛된 희망은 갖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올림픽을 목표로 선수를 지도한다면 굉장히 엄한 선생님이 되지 않을까요.(웃음)
지금 손연재가 과거 손연재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요? 타임 슬립물처럼.(웃음) ‘좀 더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 그때는 스트레스가 극심했고, 극단으로 몰아붙이면서 제 자신을 힘들게 했어요. 너무 예민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도 죄책감이 들었죠.
그런 죄책감이나 불안은 어떻게 해소했나요? 선수의 불안감은 해결 방법이 없어요. 석 달 뒤 올림픽인데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건 오늘 해야 할 운동밖에 없어요.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올림픽 결승, 메달이라는 과녁이 없는 지금 삶의 화살은 어딜 겨누고 있을까요? 오랜 꿈이던 올림픽 결승에 오르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어제와 오늘은 똑같은 하루였어요. 그걸 알게 된 지금은 오늘을 충실히 살 뿐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노력하고 만들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곽기곤 헤어 주서영(라보드케미) 메이크업 강미(라보드케미) 스타일링 박송미 어시스턴트 장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