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술
시간을 견딘 끝에, 숙성의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다크 스피릿

호세 쿠엘보 리제르바 델라 파밀리아 엑스트라 아네호는 아가베 재배부터 보틀 제작까지 전 과정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최상급 테킬라다. 3년 이상 숙성한 엑스트라 아네호 테킬라와 30년 이상 숙성한 테킬라를 블렌딩해 만든다. 맵싸하게 후려치는 첫 풍미 뒤에는 달콤쌉싸래한 기운이 혀를 달래고, 깊은 단맛이 오래 머문다. 1995년 호세 쿠엘보 20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Jose Cuervo.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 매혹적인 금물결의 스피릿을 마주할 땐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를 떠올린다. 밝은 호박색부터 짙은 브라운 컬러까지, 화이트 스피릿과 구분되는 아르마냐크, 코냑, 럼, 아네호 등 다크 스피릿을 마실 땐 잔을 높이 들고 색과 빛을 살펴 스피릿을 받아들일 고요한 의식을 마치기를.
어떤 고수들은 스피릿의 색깔만 보고도 이미 향과 풍미를 느낀다. 오크통 숙성으로 더해지는 매혹적 컬러 팔레트를 술맛의 하나로 간주하는 이들은 캐러멜 색소를 더해 빛깔을 내는 요즘 흔한 술을 폄하하기도 한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을 지향하는 프리미엄 스피릿의 세계에선, 숙성할 때 빚어지는 본연의 컬러 자체가 술의 캐릭터다. 종종 “같은 술을 같은 오크통에 동일한 시간 동안 숙성시켰는데, 전혀 다른 컬러와 풍미가 나왔다”라고 하는 마스터 블렌더의 에피소드를 듣노라면, 통제할 수 없는 오크 숙성의 매력에 탄복하게 된다. 이토록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기다림을 감내하는 것이 여전히 가치 있음을, 그 기다림엔 예상치 못한 사소한 기적이 종종 빚어짐을 한 잔의 술에서 깨우친다. 오랜 시간 견딘 술일수록 깊은 여운이 남는 건 두말할 필요 없다.

1 가스코뉴 오크에서 15~50년간 숙성한 샤토 드 로바드 1978은 레드 체리, 삼나무, 가죽, 오크 숙성이 주는 바닐라 향과 프룬 향이 조화를 이룬다. 오렌지빛을 띠는 호박색 액체에서 은은한 꿀 향과 말린 과일, 아몬드, 무화과 등 아로마가 풍기며, 부드러운 텍스처가 매력적이다. 1870년 설립한 샤토 드 로바드는 최고의 아르마냐크 생산자 중 하나로 꼽히는데, 섬세한 오크 숙성을 위해 가스코뉴 지역의 오크만 사용할 정도로 고집이 대단하다. Chateau de Laubade.
2 하이엔드 테킬라 하우스 코디고 1530은 7년 이상 재배해 응축된 당 함량을 지닌 아가베로 빚은 술을 나파 카베르네 프랑스산 화이트 오크 배럴에 숙성시킨다. 우아하고 깨끗하며 섬세한 마무리가 특징인 이 배럴에서 6년간 숙성시킨 코디고 1530 오리진(Co’digo Origen)은 아네호(숙성한 테킬라) 가운데 가장 오래 숙성된 술로 꼽힌다. 향신료와 바닐라, 캐러멜, 달콤한 오크나무의 아로마가 말린 무화과, 시나몬의 강렬한 미각으로 이끈다. Codigo 1530.
3 포르투갈 마데이라에서 제이 파리아 앤 필호스가 생산하는 ‘럼 970 싱글 캐스크 에디션 2009’는 싱글 캐스크에서 9년간 숙성시킨 프리미엄 럼 아그리콜이다. 럼 아그리콜은 일반적 럼과 달리 사탕수수를 수확해 분쇄한 뒤 가열 과정 없이 바로 발효시켜 증류한다. 일명 자비 과정(가열 과정을 뜻함)을 거치지 않으면 사탕수수 본연의 향을 느낄 수 있고, 가당이나 가향 없이 순수한 럼 아그리콜 100%에서 나오는 독특한 깊이와 풍미를 지닌다. J.Faria & Filhos.
4 프루넬라 만돌라타 노니노는 프리미엄 그라파의 창시자라 불리는 이탈리아 기업 노니노에서 만든다. 노니노에서 단일 포도 품종을 이용해 불연속 증류 방식으로 그라파를 만들면서 값싸다는 인식을 벗고 프리미엄 그라파의 장을 열었다. 유혹적인 호박색이 특징이며, 특유의 씁쓸한 아몬드 향이 풍기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하다. Nonino.
5 레미마틴 1738 어코드 로얄은 4년에서 20년 동안 프렌치 리무진 배럴에서 숙성한 240여 가지 브랜디를 블렌딩해 만든 파인 샴페인 코냑이다. 시트러스 과일과 토피 향이 기분 좋게 스치고, 버터 스카치의 그윽한 맛과 다크 초콜릿의 진한 풍미가 매혹적이다. 견과류 아로마와 진한 단맛으로 마무리된다. Re′my Martin.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김래영 어시스턴트 최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