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연준의 ‘관계’ 이야기
관계 안에서 지독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한 시인 박연준의 에세이.
3은 완전한 숫자라고 해서 신화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 성서의 삼위일체, 세 명의 동방박사, 베드로의 배신도 세 번이다. 통일을 이룬 나라는 대체로 삼국에서 하나(완전체)가 되었고, 완전한 구조라고 알려진 피라미드도 삼각형이다. 그뿐인가. 가위바위보, 만세 삼창, 5전 3선승제, 삼일장 등 생활에서 3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선 어떨까? 소설 <삼총사>나 <삼국지>에서 세 사람의 우정을 근사하게 그리기도 했지만, 경험상 셋이 모인 관계는 어딘가 불안정하게 느껴진다. 셋의 관계 구도를 트라이앵글로 비유할 때를 생각해보라. 트라이앵글은 ‘찢긴 삼각형’이다. 찢긴 삼각형은 도형이 아니라 구부러진 선에 지나지 않는다. 3개의 꼭짓점과 피타고라스의 정의와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명제, 그리고 균형을 잃어버린 것. 트라이앵글의 뚫린 곳으로 무언가 빠져나갈 수 있음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것을 잃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나는 딱 세 명으로 구성된, 절친한 관계가 여럿 있었다. 대부분 깨지거나 소원해졌지만. 오랜 시간 끈끈함을 유지한 사이임에도 깨져버린 관계가 있고, 둘의 격렬한 싸움으로 파탄 난 관계도 있다. 적당한 호감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다 자연스레 멀어진 관계도 있다. 이럴 땐 셋 중 어느 하나가 나서서 모임을 주도하지 않으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적당하다’는 건 관계에 애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 글에서 깨진 관계를 곱씹으며 잘잘못을 따지려는 건 아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그런 건 의미가 없어진다. 셋의 사전적 의미는 “둘에 하나를 더한 수”다. 애초에 셋으로 태어나는 관계는 드물다. 하나,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더해져서 셋을 이룬다. ‘셋’이 모인 관계에는 언제든 ‘더’와 ‘덜’이 낄 수 있다. 더 좋다가 덜 좋아지는 둘이 있고, 덜 싫어하다 더 싫어지는 둘이 생길 수 있다. 모르는 사이 저울에 올라가 씨름하는 둘이 있고, 셋이 동시에 올라가 하나를 떨어뜨리는 일도 생길 수도 있다. 셋은 약간의 ‘불안정’을 품고 있기 마련이니까.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둘이 마주 볼 때 남은 하나의 위치 선정이 애매해질 수 있다. 구성원 모두가 성숙하다면 혹은 서로에게 바라는 게 없는 관계라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둘’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다를까? ‘둘’은 나 아니면 너, 당사자 간 일이라 문제가 생기면 각자 멀어지면 된다. 하지만 셋은 다르다. 셋은 찢긴 자리에서 파열음처럼 떨어져나가는 자(소수자)가 생긴다. 넷이나 다섯이라면? 원 혹은 다각형 구도를 이루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겠지. 문제는 모임 구성원이 다수일수록 폭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거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의 모임이라면? 구성원이 모여 기관이나 단체, 나라를 이룬다면? 수없이 떨어져나가고, 흘러내리며, 밟히는 존재가 생겨날 것이다. 다시 셋으로 돌아가보자. 결국 내가 서성이게 되는 곳은 여럿이 이룬 삼각형, 그 찢긴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差別)’이란 글자 위다. ‘차’와 ‘별’을 생각한다. 달라서(差) 나누(別)는 것. 이쪽과 저쪽, 여기와 거기, 위와 아래, 안과 밖 사이에 수많은 찢긴 삼각형. 인간을 바이러스 취급하며, 다수의 안전을 위해 차별과 혐오로 폭력을 품는 사람이 있다. 금을 긋고 벽을 세우며 서로를 헐뜯는 사람이 있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고, 일치하지 않아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의학과 법을 이용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일치’를 꿈꿔보지만, 반대하며 선을 긋는 사람이 있다. ‘다름’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있다. 달라서, 존재를 짓밟히는 사람이 있다. 둘을 넘어, 셋을 이루는 순간 ‘틈’으로 흘러내리는, 버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게 ‘셋’이라는 불안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에디터 김이신
글 박연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