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이즈에 그렇지 못한 존재감
시계의 크기에도 유행이 있다.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오며 점점 작아지다 패션의 범주에 속하며 다시 커졌고,
젠더리스 흐름을 타며 다시 작아지고 있다. 작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즘 시계들.

시계의 소형화
태엽과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기계식 시계는 100~200개의 부품이 필요해 초소형, 초박형으로 제작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시계 제작자들은 더 작고, 더 얇은 시계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25년 불가리는 투르비용을 탑재하고도 두께가 1.85mm에 불과한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투르비용’을 공개했다. 컴퓨터 설계와 CNC 머신, 레이저 절단 가공 같은 정밀 기술과 새로운 소재의 도입 덕분에 시계는 마침내 한계를 넘어선 두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보다 얇은 시계를 위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흥미롭게도 초소형 시계와 무브먼트 기록은 경신되지 않았다. 예거 르쿨트르의 전신인 르쿨트르사가 1929년 발명한 ‘칼리버 101’이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기계식 무브먼트로 남아 있다. 98개의 부품으로 제작한 직사각형 무브먼트는 가로 12mm, 세로 30mm 이내의 작은 케이스에 탑재할 수 있었고, 지금도 예거 르쿨트르와 까르띠에 시계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뛰어넘는 초소형 시계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이 크기가 주로 여성용에 한정될 뿐 아니라 시계 본연의 기능인 시간 표시를 위해서는 다이얼이 손톱보다 작아져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시계의 적정 크기
가독성과 착용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시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절대적 기준은 없을뿐더러,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왔다. 20세기 초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 시대로 넘어오며 시계는 점차 작아졌고, 1950~1960년대에 남성 시계의 케이스 지름은 34~36mm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크로노그래프, 퍼페추얼 캘린더, 투르비용 등 기능이 추가되며 시계는 점점 커졌고, 2000년대 이후에는 지름 40mm 이상의 시계가 일반적이었다. 특히 남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파네라이, IWC 같은 브랜드는 44~47mm, 심지어 50mm가 넘는 시계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케이스 지름 30~36mm 정도는 자연스럽게 여성의 시계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이 바뀐 것은 2010년 이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급 기계식 시계의 주요 고객이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시계산업협회가 발표한 2025년 상반기 대륙별 수출 통계에 따르면 아메리카 23%, 유럽 30%, 아시아는 7.2% 감소했음에도 전체의 44%를 차지한다. 이처럼 2010년 이후,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목이 가는 아시아 소비자를 고려해 시계는 점차 소형화 추세로 접어들었다.
남녀 구별 없는 젠더리스
과거에는 남성용 시계와 여성용 시계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파텍필립의 트웬티포, 바쉐론 콘스탄틴의 에제리, 브레게의 레인 드 네이플, 몽블랑의 보헴처럼 여성용 컬렉션을 별도로 운영하는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혹은 남성용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한 채 케이스 크기만 줄이고, 다이얼에 자개나 보석을 세팅하거나 파스텔 톤과 비비드한 색상을 더하는 방식으로 성을 구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남성이 손끝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고, 여성 화장품 광고 모델이 되어 블러셔나 틴트를 바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남성이 여성용 시계에, 여성이 남성용 시계에 매력을 느껴 주저 없이 선택하는 흐름 속에서 젠더리스 시계는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있다.
롤렉스의 오이스터 퍼페츄얼은 28mm부터 31mm, 34mm, 36mm, 41mm까지 다섯 가지 사이즈로 출시하며 캔디 핑크, 그린, 튀르쿠아즈 블루 외에 베이지, 라벤더, 피스타치오 등 부드러운 컬러도 함께 선보인다.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한 IWC 인제니어는 기존 40mm, 42mm 모델에 올해는 35mm 사이즈를 추가하고, 남녀 착용 이미지를 동시에 공개하며 젠더리스 콘셉트를 강조했다. 까르띠에 산토스도 마찬가지다. 산토스-뒤몽과 산토스 드 까르띠에는 33.9×46.6mm의 엑스트라라지부터 라지, 미디엄, 그리고 쿼츠 무브먼트의 27×34.5mm 스몰 모델까지 다양한 크기를 갖추었다. 여성용 시계라 명명했음에도 남성 착용 이미지를 함께 공개해 성별에 상관없이 착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빈티지 시계의 부각
시계업계에서는 제작 시기에 따라 100년 전 시계를 앤티크, 50년 전 시계를 빈티지로 구분한다. 따라서 2025년 기준 빈티지 시계는 1960~1970년대 시계를 의미한다. 세계대전 이후 안정기에 접어든 1950년대가 정확한 시계 제작에 집중한 시기였다면, 1960년대에는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디자인을 중시하며 다양한 형태의 시계가 등장했다. 1970년대에는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개발과 쿼츠 무브먼트의 등장으로 스포츠 시계와 럭셔리 스틸 시계가 각광받았다. 최근 몇 년간 경매시장에서 특히 이 시기의 시계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 6월 크리스티 뉴욕의 ‘탁월한 시계(Exceptional Watches)’ 경매에서 최고가인 11만3400달러에 낙찰된 모델은 1965년산 롤렉스 Ref.6238. 크로노그래프를 탑재한 데이토나 전 모델로 케이스 지름은 36mm였다. 또 지난달 소더비 뉴욕의 ‘중요한 시계(Important Watches: Take a Minute)’ 경매에서는 1957년 제작한 파텍필립 Ref.2499가 432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크로노그래프와 퍼페추얼 캘린더를 결합한 이 시계도 케이스 지름은 40mm보다 작은 37.5mm였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많은 브랜드에서 과거 시계를 그대로 복원하거나 재해석한 모델을 선보이고 있으며, 무브먼트를 현대적으로 바꾸면서도 케이스 지름은 40mm 이하로 유지하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히스토릭 222(37mm), 파텍필립 칼라트라바 Ref.6196P-001(38mm), 브레게 타입 XX 크로노그래프 Ref.2075(38.3mm) 등이 대표적 예다. 오늘날에는 큰 시계보다 작은 시계가 더 클래식하고 우아하다고 여기고 있다.
편안한 착용감
시계 크기의 변화는 특정 지역을 기점으로 한 점진적 확대, 주요 고객층으로 떠오른 여성의 영향, 성별이 아닌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경매시장에서 주목받는 빈티지 시계의 부상 등 여러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적절한 크기 시계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한 착용감이다. 그간 기계식 시계는 역사와 전통을 뒤로한 채 기술력을 과시하듯 복잡한 기능을 탑재했고, 그 결과 부품 수가 늘어나면서 시계는 점점 두꺼워지고 커졌다. 그 결과 감상을 위한 소장용 컬렉션 시계가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마트워치가 점점 확산되는 현시점에 기계식 시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바로 실용성과 편안한 착용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얇고 적당한 크기의 시계는 손목 위에서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편안한 착용감을 제공한다. 지나치게 크거나 무겁지 않고 걸리적거리지 않으면서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 그야말로 ‘조용한 사치(quiet luxury)’를 누릴 수 있는 액세서리이자 오브제로 자리 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