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가곡
어느새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찾아 듣는 시즌이 돌아왔다. 눈에 띄는 건 우리가 아는 그 곡이지만 협업을 통해 색다른 감수성을 전하는 공연. 실로 폭넓은 가곡 공연이 찾아오는 요즘이다.

롯데콘서트홀에서 11월 내한 공연을 하는 마티아스 괴르네가 ‘겨울 나그네’를 부르는 장면. 무대의 영상은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의 차이겠지만 흔히 성악곡을 즐겨 듣는 감상자는 악기 소리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얻는 위로에 대해 말한다. 확실히 가사가 있는 성악곡은 듣는 이의 정서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게 사실이다. 가을마다 여러 나라의 유명 가곡을 노래하는 ‘가곡의 밤’ 공연이 빠지지 않고 열리는 것도, 또 대중적인 기획에서 한국 가곡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가곡은 그 예술성과는 별개로 어쩐지 고루한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하이네, 괴테, 빌헬름 뮐러 등 문인의 서정시에서 가져온 함축적인 가사가 그리 생명력 있게 와 닿지 않는 까닭인지, 클래식을 즐겨 듣고 오페라를 자주 감상하더라도 가곡은 잘 듣지 않는 관객이 많다. 그런데 최근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보수적인 시선으로 볼 땐 거의 ‘파격’이라 할 정도로 참신한 가곡 공연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곡가 겸 지휘자 크리스티안 요스트. 2017년 베를린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슈만의 가곡 ‘시인의 사랑’을 공개할 예정이다.
고전음악과 미디어가 만났을 때
먼저 2년 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로 가보자. ‘독일 가곡의 거장’으로 불리는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가 독특한 무대에 올랐다. 콜라주, 영화, 몽타주, 애니메이션 등으로 구성한 24개의 이미지와 영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는 24개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불렀다. 미디어 작품을 만든 주인공은 작년 연말부터 올해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5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찾아 한국 관객과 만난 남아공 아티스트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다. 클래식 음악계와 현대미술계의 두 거장 아티스트가 컬래버레이션해 기존 성악 리사이틀과는 완전히 다른 공연이 탄생한 것. 19세기 가곡이 21세기 미디어 아트를 만나 시간을 초월한 무대를 완성한 덕분에 마티아스 괴르네와 윌리엄 켄트리지의 ‘겨울 나그네’는 당시 엑상 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화제의 공연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공연은 11월 2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한국 초연을 한다.
올해 런던에서도 그 못지않은 실험적인 가곡 무대가 있었다. 바로 또 한명의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인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Ian Bostridge)의 공연.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네티아 존스(Netia Jones)가 연출을 맡고 이언 보스트리지가 노래한〈The Dark Mirror: Zender’s Winterreise〉는 매우 연극적인 무대였다. 흑백 비디오 영상을 상영하고, 세트를 설치한 무대 위에서 테너는 가사에 따라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리는 등 연기를 곁들이며 노래했다. 수십 년간 ‘겨울 나그네’를 부른 이언 보스트리지에게도 도전적인 무대였고, 관객에게도 매우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이 공연은 지난 5월 바비칸 센터에서 세계 초연한 이후 투어를 시작했는데, 오는 11월에는 대만에 새로 오픈한 타이중 오페라 하우스(National Taichung Theater) 무대에 오른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The Dark Mirror: Zender’s Winterreise〉가 슈베르트의 원곡 ‘겨울 나그네’가 아니라, 작곡가 한스 젠더(Hans Zender)가 재해석한 곡을 공연했다는 사실이다. 1993년 한스 젠더가 새로운 ‘겨울 나그네’를 발표한 당시 세계 음악계는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는 슈베르트가 곡을 발표한 당시 사람들이 느낀 충격을 현재 그 곡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도록 소리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현대에 맞게 편곡했다기보다 오히려 작곡가의 음악 본연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인 셈. 그리고 그 결과물이 2016년 멀티미디어 공연으로 재탄생했다. 최근 들어 이런 시도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작곡가이자 지휘자 크리스티안 요스트(Christian Jost)가 현재 슈만의 가곡 ‘시인의 사랑’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내년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테너 페터 로달(Peter Lodahl)이 노래할 예정이다.

이언 보스트리지가 지난봄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초연한 〈The Dark Mirror: Zender’s Winterreise〉의 한 장면. 한스 젠더가 재해석한 버전의 ‘겨울 나그네’에 연극적인 요소를 더해 공연했다.
공감을 위한 과감한 변화
마티아스 괴르네와 윌리엄 켄트리지의 공연은 세계 여러 극장과 페스티벌이 공동 위촉해 탄생시킨 공연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음악가와 기획자는 관객층을 넓히기 위한 다각도의 시도를 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가곡에 대한 수요가 너무나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자의 노래로 여기던 곡을 여자 성악가가 녹음하거나 공연하는 등 성악가들이 직접 나서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대부분 테너가 부르는 슈만의 시‘ 인의 사랑’을 2000년대 초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Barbara Bonney)가 노래한 것은 관객은 물론이고 음악계와 언론까지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여자 성악가가 남자의 사랑을 담은 노래로 음반을 녹음하고, 런던의 위그모어 홀 같은 전통 있는 홀에서 공연한 건 혁신이었다. 당시 그녀는 성별과 무관하게 인간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묘사하겠다며 자신의 목소리에 맞게 음역을 조정해 불렀다.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Christa Ludwig)와 콘트 랄토(여성 알토) 나탈리 스튀츠망(Nathalie Stutzmann)이 테너나 바리톤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부른 것 역시 새로운 곡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시도였다. 그리고 올해 1월에는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이 예술의전당에서 처음으로 이 곡에 도전하기도 했다.
공연기획사 프레스토아트의 대표이자 테너인 박태윤은 “가곡 무대에서 오랫동안 금기시해온 것들이 조금씩 가능해지고 있다. 한 예로 가사를 자막으로 상영하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인데, 특히 한국 공연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보다 많은 관객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다”라고 말한다. 혹여 진화하는 가곡을 보며 원곡을 변질시키고 고전 연주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내보이는 관객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음악을 향유하는 관객 역시 변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관객과 호응하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필요한 게 아닐까? 소통을 위한 실험이 생동하는 예술을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 법이니 말이다.
11월과 연말에도 한국에서 감상할 수 있는 여러 가곡 공연이 이어진다. 마티아스 괴르네의 내한 공연 외에도 12월 2일에는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Thomas Bauer)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하고, 다음 날 소프라노 서예리는 같은 무대에서 슈베르트와 슈만 그리고 윤이상의 가곡을 부를 예정이다. 마음을 감싸주는 목소리를 통해 온기를 느끼는 계절이 되길 바란다.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