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화석이 되어
바쁜 도심에선 그냥 지나칠 사사로운 일도 하나하나 의미가 되는 곳이 있다. 시간이 화석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곳, 하와이의 섬 라나이에서는 가능하다.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푸우페헤 비치. 스위트 하트 록이 보이는 푸우페헤 트레일은 일출 시간에 맞춰 하이킹하면 더욱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하와이라는 세 글자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와이키키 해변? 근육질 남녀의 서핑?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행복한 표정의 쇼핑객? 그렇다면 당신은 하와이를 절반만 경험한 여행자다. 단언컨대 하와이의 진면목은 국도 변에 심은 200년 된 마카다미아 트리, 수백 년간 파도를 견뎌낸 깎아지른 절벽, 해발 수백 미터에서 온몸으로 맞는 흙먼지,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고 온 사람의 옷깃에서 나는 바람 내음에 있다.
하와이를 구성하는 여러 섬 중 라나이는 3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아주 작은 섬으로 때 묻지 않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인애플 농경지로 전 세계 유통량의 20%가량을 생산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 파인애플 가격이 하락하자 농장 소유주인 돌(Dole)사의 데이비드 머독(David Murdoch) 대표는 1990년대 초 농장 경영을 접었다. 대신 최고급 리조트 포시즌스 라나이(Fourseasons Resort Lanai)를 건축하면서 이곳은 전 세계 부호들이 몰려드는 세계적 관광지가 됐다. 동시에 머독은 라나이 섬의 98%를 매입해 완벽한 프라이빗 아일랜드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일링 요트 트릴로지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즐기는 스노클링은 라나이의 원시적 매력을 발견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오아후 호놀룰루 공항을 거쳐 도착한 라나이 공항은 한적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도 우리를 포함해 채 30~40명이 되지 않았고,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도 리조트 직원 몇몇이 전부였다. 라나이의 호텔은 포시즌스 라나이와 호텔 라나이(Hotel Lanai) 단 2개뿐이다. 섬 전체의 인구가 3000명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 체인점, 대형 쇼핑몰은 찾아볼 수 없고 주유소와 마트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시설도 각각 하나씩밖에 없다. 무엇보다 독특한 건 섬 전체에 신호등이 하나도 없다는 것. 신호등이나 과속 방지 카메라가 없어도 모든 차량이 시속 60~70km 이상으로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속도를 내는 대신 마주 오는 차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는 것이 라나이의 운전법. 과장을 보태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알 정도로 주민 대부분이 서로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포시즌스 라나이에서 마중 나온 스태프는 환한 미소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취재팀을 반갑게 맞았다. 라나이 공항에서 리조트로 이동하는 밴 안에서 드라이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웠다. “자, 퀴즈를 하나 낼게요. 라나이에 서식하는 사슴의 수가 몇 마리일까요? 감이 안 오죠? 6000마리예요. 라나이 인구보다 2배 많은 숫자이니 어마어마하죠?”, “혹시 사람을 해치지는 않나요?”, “해치지는 않지만 워낙 수가 많다 보니, 사슴 사냥 시즌을 따로 정해놓고 사냥을 해요. 그 시즌이 되면 근처 마우이에서 사냥꾼들이 많이 오죠.” 쿡파인 트리를 심은 드넓은 도로에 우리 일행을 태운 차밖에 없어도 저속 운전을 하는 건 도로를 자기 집 안마당 삼아 돌아다니는 사슴이나 야생 칠면조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라나이의 특별한 점은 또 있다. 앞서 말했듯 바로 개인 소유의 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라나이의 주인은 데이비드 머독이 아니라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회장이다. 2012년 머독 소유의 라나이섬 98%를 약 3억 달러(약 3조4000억 원)에 매입하며 저택 마니아로서 괴력을 과시한 것. 물론 현재 포시즌스 라나이도 래리 앨리슨의 소유다. 그는 이외에도 여러 리조트와 섬, 저택, 레스토랑, 클럽, 스포츠 경기장 등 세계 각지의 주택 40여 채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며칠 전에도 래리 앨리슨이 라나이에 다녀갔어요. 앨리슨 회장은 현재 섬 전체의 친환경 생태에 힘쓰고 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유기농 농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드라이버의 말이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최고의 시설을 갖춘 포시즌스 라나이는 프라이빗한 휴가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공항에서 40분가량 달려 포시즌스 라나이에 도착하자 총지배인 톰 롤렌스(Tom Roelens)가 반갑게 웰컴 드링크와 함께 환영 인사를 건넨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최고의 시설을 갖춘 우리 리조트는 휴가를 즐기는 장소로 최적이죠. 이번에 객실도 새롭게 레노베이션했기 때문에 머무는 동안 하와이 고유의 정취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청정보호구역인 훌로포에 만 바로 옆이라 수상 액티비티를 즐기기 좋으니 해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세요!”
그의 말처럼 막 레노베이션을 마친 객실은 하와이 전통 직물을 사용한 침구, 하와이 출신 아티스트 디트릭 바레스가 디자인한 나뭇결을 모티브로 한 벽면, 벽 곳곳에 걸린 시인 돈 블랜딩의 펜과 잉크로 제작한 ‘문어잡이’, ‘화산 폭발’, ‘물속에서 수영하는 두 사람’ 등 하와이의 옛 모습과 전설을 보여주는 예술 작품이 가득했다. 투숙객이 자연스럽게 하와이의 역사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포시즌스 라나이에서 ‘리조트 애조가’라는 독특한 직책을 맡고 있는 브루노 엠비
객실 곳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대충 짐을 정리한 후 로비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하니 큼지막한 앵무새 한 마리가 마치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한 자태로 직원의 팔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자신의 인사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를 가까이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한다. 리조트에 사는 세 마리의 앵무새를 돌보는 이는 ‘리조트 애조가’ 브루노 엠비. 페닌술라 동물 보호 단체의 조류 구조 프로그램 일환으로 이곳에서 함께 지내는 앵무새 케오케오와올라, 하우올리를 키우는 그는 새들과 함께 수영장, 해변가 등을 산책하며 투숙객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어주거나 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팔에 앉은 케오케오를 들이밀며 같이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던 그는 큰 부리에 놀라 뒷걸음질하는 취재팀에게 “머무는 동안 케오케오와 친해져서 떠나는 마지막 날에는 꼭 당신들의 팔에 앉힐 수 있기 바란다”며 앵무새 부리에 ‘쪽’ 입맞춤을 해 보는 이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라나이에도 밤이 찾아올까 싶을 정도로 한낮의 햇빛은 강하고 뜨거웠지만 리조트 앞 훌로포에 만에 석양이 내려앉자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풀장을 지나 디너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뿌우’ 하는 나팔 소리와 함께 ‘Torch Lighting’ 세리머니가 시작됐다. 매일 저녁 6시에 메인 풀장 옆에서 펼치는 이 세리머니는 원주민 복장을 한 스태프가 횃불을 들고 야외 풀장과 레스토랑 곳곳에 불을 밝히는 이벤트다. 어둠이 라나이를 완벽히 덮자 리조트 구석구석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더욱 로맨틱하게 다가온다.

라나이를 대표하는 ‘신들의 정원’에서는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라나이의 전체 포장도로 길이는 48km 정도로 그 외에는 대부분 거친 비포장도로다. 그 때문에 역으로 하와이에서 가장 하이킹하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라나이. 포시즌스 라나이 주변도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야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바위가 즐비한 훌로포에 만을 지나 일출을 맞기 위해 오르는 푸우페헤(Puu Pehe) 트레일은 라나이의 명소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이튿날 새벽,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하트 모양의 절벽 ‘스위트 하트록’을 감상하겠다는 일념으로 차디찬 바닷바람을 헤치며 푸우페헤 해변으로 향했다. 리조트 앞 훌로포에 만에서 왼쪽으로 쭉 걸어나가니 금세 푸우페헤 비치가 눈앞에 장관을 드러낸다. 해변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그야말로 절경인데, 절벽의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많이 들어가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포인트에 서니 기가 막히게도 좀 전까지 평범하던 절벽이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 전 세계 각지의 커플이 청혼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지만 바위에 깃든 사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이다. “옛날에 예쁜 소녀를 감춰놓고 자기만 보며 행복하게 사는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큰 파도가 밀어닥쳐 소녀의 생명을 앗아갔죠. 그 남자는 소녀를 사람 손이 미치지 않는 바위 끝에 묻고 자신도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해요.” 동행한 가이드의 말이다. 슬픈 전설 때문일까? 위대한 자연의 풍광에 혀를 내두르며 시끌벅적 감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리조트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조용하고 무거웠다.

사륜구동 UTV 차량으로 라나이의 신비로운 숲과 울창한 계곡,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릿빛 산길을 달리는 것은 라나이의 또 다른 매력
라나이는 해양 스포츠뿐 아니라 승마, UTV 투어, 오프로드 명소 탐방 등 땅 위에서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말을 타고 라나이 곳곳을 둘러보는 승마 프로그램은 주변의 숲과 계곡에 서식하는 사슴과 꿩, 무플런 양 등의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어 좋지만 좀 더 라나이를 구석구석 훑고 싶다면 사륜구동을 이용하는 오프로드 체험을 추천한다. 무엇보다 라나이의 대표 명소 ‘신들의 정원(케아히아카웰로)’에 가기 위해선 사륜구동이 필수. 붉은 흙과 크고 작은 바위가 끝없이 이어져 있는 신들의 정원은 ‘예술을 좋아하는 신들이 이곳에서 바위로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으로 포시즌스 라나이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희귀 식물을 볼 수 있는 울창한 활엽수가 즐비한 카네푸우 보호구역(Kanepuu Preserve)을 지나 신들의 정원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은 라나이의 풍경은 완벽히 재부팅된다. 누군가는 이곳을 영화 <혹성탈출>의 세트장 같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태곳적 지구의 모습이 과연 이랬을까? 초목이 전무하다시피 한 메마른 땅과 신비한 붉은색 흙, 태양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림자, 구멍이 숭숭 뚫린 각양각색의 화산석, 그리고 서넛이 힘을 합쳐 밀어도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거센 모래바람이 우리를 흔적 없이 삼킬 것 같은 이 위압감은 대자연 앞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광경이다. 당장이라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수십 킬로미터 밖으로 날려버릴 것 같은 강한 바람을 피해 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1 훌로포에 만의 부서지는 파도 위로 넓게 펼쳐진 마넬레 골프 코스는 골프인의 성지로 불린다. 빌 게이츠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2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포시즌스 라나이의 풀장
산길을 지나 라나이의 유일한 도심인 ‘라나이시티’로 가는 길,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산호초에 걸려 난파한 수송선이 있는 시프렉 비치(Shipwreck Beach)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시프렉, 즉 난파선은 과연 먼 거리에서도 그 육중한 규모가 그대로 느껴질 만큼 꽤 컸다. “당시 좌초된 그 모습 그대로예요. 저를 포함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대부분 한 번쯤 배를 놀이터 삼아 논 기억이 있죠.”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는 하나 파도에 부식된 금속 표면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부드러운 산호모래로 이뤄진 시프렉 비치에는 용암굴과 산호가 많아 스노클링과 수영을 즐기기에 제격이라고 하니, 잠시 차를 세워두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곳에서 잠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이외에도 귓속까지 흙먼지가 파고드는 UTV 투어로 팔라와이 분지(Palawai Basin)가 내려다보이는 힐룩아웃(Hi’l Lookout)까지 거칠게 내달리거나, 세일링 요트 트릴로지(Trilogy)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바다 절벽 팔리카홀로(Pali Kaholo)를 마주하고 그곳에서 돌고래와 형형색색의 물고기, 푸른 바다거북 같은 바닷속 생물과 함께 스노클링을 즐기는 것도 라나이의 원시적 매력을 발견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포시즌스 라나이의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식자재는 근처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것이다.
시프렉 비치를 지나 도착한 라나이시티는 라나이의 유일한 다운타운으로, 이 순박한 시골 마을을 걷다 보면 마치 1980년대의 미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라나이의 유일한 주유소인 라나이 플랜테이션 스토어와 오거닉 식자재를 판매하는 리처드 마켓, 파인애플로 흥한 라나이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라나이 컬처 & 헤리티지 센터, 하와이식 참치 요리인 포케를 직접 만들어 파는 라나이 오하나 포케 마켓을 비롯한 작은 선물 가게 등을 유유자적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양손 가득 기념품과 하와이안 먹거리를 가득 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라나이의 유일한 다운타운 라나이시티에서 만난 마이크 캐럴 갤러리. 라나이에 패스트푸드점은 없어도 갤러리는 있다.
라나이시티의 유쾌한 반전은 패스트푸드점은 없어도 그림을 파는 갤러리는 있다는 것. 시카고 출신 화가 마이크 캐럴이 문을 연 마이크 캐럴 갤러리(Mike Carroll Gallery)에는 라나이를 대표하는 쿡파인 트리, 푸우페헤 해안에서 카누를 타는 남자들, 빌 게이츠가 결혼식을 올린 마넬레 만의 골프 코스, 훌라춤을 추는 원주민 댄서, 파도를 기다리는 라나이 서퍼 등 라나이의 전통 풍경을 담은 화폭이 갤러리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가이드가 강력 추천한 카페 ‘커피 워크스’. 하와이안 코나 커피의 정수를 보여준다.

포시즌스 라나이에서 즐기는 ‘노부’ 레스토랑. 피치 퓌레와 캐비아를 얹은 생굴을 맛볼 수 있다.
다운타운을 오가며 라나이를 구석구석 신기한 듯 구경하는 취재팀을 보던 가이드가 카페 커피 워크스(Coffee Works)의 소박한 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지를 치켜올린다. “이 카페의 커피 맛은 라나이에서 단연 일등”이라고. 부랴부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은 이미 문닫을 채비에 여념이 없다. 벽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4시 30분. 사정 끝에 하와이안 코나 커피를 겨우 손에 쥐고 쪼르르 테라스에 앉았다. 눈앞에는 키 큰 쿡파인 트리가 도로변에 열을 맞춰 서 있고, 카페 뒤로는 라나이의 광대한 자연이 마을을 에워싼 채 녹색의 기운을 뿜어낸다. 자연이 주는 이 차고 넘치는 풍요 안에서 5달러짜리 커피 한 잔은 세상 최고의 행복이 되고 웃음이 된다.
문의www.fourseasons.com/kr/lanai/,http://blog.naver.com/fslanai, +1-808-565-2000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취재 협조·사진 제공 포시즌스 리조트 라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