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마음에 있는 것
판화로 예술계에 첫발을 들인 지저우는 현재 사진과 조각, 설치미술 등으로 점점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에 있는 것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놀며 생각하는 그와 함께 진실과 주관의 어지러운 상관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지난 6월 갤러리 스페이스 칸 개관전에서 선보인 ‘Dust’ 시리즈의 설치 전경 ⓒ 스페이스 칸
카메라는 실제 모습을 기록하는 수단이다. 당연히 객관을 대표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찍은 사진은 그의 ‘주관’이 만든 어떤 것이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궁금해해야 하며, 어떤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객관적 내용과 주관적 기록의 혼합, 그리고 현대사회의 과열된 경쟁 속에 소외된 고독한 삶을 투영해내고자 하는 작가 지저우(Ji Zhou)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마다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하는 어떤 것이었다.
최근 서울의 갤러리 스페이스 칸에서 당신의 ‘Dust’ 시리즈를 봤습니다. 작품 설명에 “객관적 내용이 주관적 기록과 혼합돼 현대사회의 과열된 경쟁 속에 소외된 고독한 삶을 투영”이라 쓰여 있었죠. 사실 전시한 작품의 수가 적은 탓인지 ‘고독’이나 ‘소외’ 같은 감정을 느낄 새는 없었어요. 서울에서 선보인 작품은 벽지와 프레임을 사용한 건데, 제겐 진일보한 해체와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작품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제작됐고, 그것을 보는 관람객 또한 다양한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해서 작품을 선택했어요.
어쨌든 ‘Dust’ 시리즈는 2009년 파리 거주 당시, 옆 스튜디오에 난 화재로 모든 게 소멸되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잿빛 먼지로 변한 현장에서 당신은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했죠.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본 건가요? 그리고 이후 당신은 작품에서 무엇을 표현하려 했죠? 실제로 화재 현장이 제 작업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화재 후의 정적과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어요. 그리고 그 광경은 제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죠. 그건 오늘날의 세계와 날마다 보고 듣는 황당한 사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과학기술의 발전 같은 것이었어요. 전 화재 현장을 보고, 우리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죠. 작품은 당시의 느낌을 제 시각을 통해 표현한 거고요.
작품 제작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Dust’ 시리즈는 제게 시간과 사건의 매개체예요. 기본적으로 먼지를 재료로 하고, 제 작업실 안이 먼지로 뒤덮이게 한 뒤 그걸 사진으로 찍는 거죠.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담아내는 작업이에요.
‘Dust’ 이전에 ‘Site’라는 작품도 선보이셨습니다. 그건 수십 권에 달하는 책을 빌딩처럼 쌓은 모습이었죠. ‘Site’ 시리즈는 내용이 다른 책을 이용해 현대적 도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업이었어요. 현재의 글로벌한 사회에서 우리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지만, 왜 도시의 모습은 이렇듯 단조롭고 유사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죠.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대표작, ‘Dust’ 시리즈 4번 작품 Courtesy of the Artist
불현듯 ‘지저우’라는 작가의 유년 시절이 궁금해지네요. 어쩐지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 같아요.
제 어린 시절은 실제로 그리 감성적이지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이끌려 미술을 시작했고, 때론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웃음)
그럼에도 당신은 결국 예술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을 택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내고,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몇 년간은 사실 아주 막막했어요. 당시 제게 예술가의 길을 택하는 건 직업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전 예술가의 길을 택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꽤 흘러 당시의 선택이 아주 과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요.(웃음)
2000년대 초반 당신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어요. 파리에서의 생활이 당신의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또 거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무엇인가요?
간단히 말해 파리 생활은 제게 예술적으로 진정한 ‘나’를 의식하게 해줬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인식은 제가 더 괜찮은 예술가가 되도록 도왔죠. 실제 파리 생활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어요. 당시 파리에서 살고 있던 중국 출신의 세계적 예술가 왕두(王度)와 당대 예술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중 하나죠.
거기서 당신이 다닌 파리1 대학과 중국 중앙미술학원의 교육은 서로 어떻게 다르던가요?
일단 커리큘럼 자체가 많이 달랐습니다. 중앙미술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하던 시절 주로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공부를 했다면, 파리 대학에선 저 개인의 작품 계획 그리고 ‘왜 하느냐’에 대한 공부를 주로 했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르네요. 당신이 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한 건 판화였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사진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죠.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요?
중앙미술학원 부속 미술학교에서 4년간 기초 회화 훈련을 마친 후, 더 다양한 매개체나 재료를 회화에 접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엔 판화를 택했죠. 판화를 배우며 목판과 동판, 석판 그리고 실크스크린 인쇄 등 다양한 재료를 접했어요. 한데 어느 날 제가 대학 졸업 전 배운 예술적 행위 대부분이 ‘기술 훈련’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 이후엔 누구든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예요. 제 작품의 주요 표현 방식으로 사진을 선택한 건, 기술적인 부분은 기계에 맡기고 나 자신은 내용적 측면을 좀 더 생각해보자는 차원이었죠.
많은 현대 예술계의 사진가가 그랬듯 당신도 개념 사진(conceptual photography)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당신이 사진을 재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당시와 지금, 예술적 가치관의 변화는 없는지 궁금해요.
카메라는 실제 모습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객관’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제가 찍은 내용은 제 ‘주관’이 만든 거죠. 이런 패러독스적 관계가 제가 사진 찍는 방식을 택한 이유예요.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제 예술적 가치관은 시종일관 동일해요. 많은 이가 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고민하는 시각’을 갖길 바랄 뿐이죠.
당신의 초기 작업은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 혹은 특정 사건에 대한 소재가 유독 많습니다. 특히 ‘사(事)’ 시리즈가 그런 작품에 속하죠. 당시 그런 작업을 시작한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사(事)’ 시리즈에선 다른 시간에 동일한 장소를 찍은 실사 사진과 컴퓨터 처리를 거친 두 종류의 사진을 병치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진실’과 ‘객관’의 경계를 드러내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죠. 저는 실사 사진을 포함해 어떤 형식의 사진이든 모두 ‘주관’의 결과라고 봅니다. 동일한 작품을 선보이더라도 보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되죠. 사는 환경과 그동안 받은 교육이 그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진실’과 ‘객관’ 앞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판단, 그들의 그런 마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당시엔 그런 일에 관심이 많았죠.
불에 타 잿더미가 된 듯한 공간을 연출한 2011년 작품 ‘Ash’ Courtesy of the Artist
그런가 하면 초기작 중 자연환경을 대상으로 한 설치 작품도 꽤 있었어요. 즉 ‘진실’의 대상을 소재로 표현한 작업이죠.
자연을 소재로 한 제 일련의 작업은 모두 특정 공간과 환경을 바탕으로 했어요. 중국의 차경(借景, 자연경관을 자신의 정원 안으로 끌어온다는 의미)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죠. 나무가 있거나 숲이 있는 특정 경관을 제 설계 프레임 속에 가져와 보는 이의 이동 각도에 따라 그것이 달리 보이게 하는 원리죠. 사실 일상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이미지도 이런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이죠. 관람객은 자신이 택한 각도에서 프레임 속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된다는 얘기예요.
그런 작품은 참 흥미로운 것 같아요. ‘보이는 것’과 ‘보게 되는 것’의 차이.
언젠가 울렌스 현대미술센터에서 열린 제 개인전에서 ‘무제’라는 이름의 설치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어요. 76개의 전구와 나무 액자로 구성한 가상의 거울 작품이죠. 전시 공간을 반반씩 나눠 양쪽 벽면에 제 ‘거울(鏡像)’ 시리즈 사진 작품을 걸어놓고, 중앙엔 장방형의 홈을 파서 가상의 거울을 박아 넣었죠. 그러면 관람객은 ‘거울’ 시리즈 작품을 보는 동시에 중앙에 자리한 가상의 거울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두 공간 속 관람객이 중앙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의식하는 순간, 불현듯 그 거울이 가상이라는 걸 깨닫는 거죠. 이 또한 색다른 방식으로 진실과 가상에 관한 감각을 표현한 거였죠.
지저우라는 작가의 모든 작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초기 작품부터 현재까지 작업을 진행해오며 발전 혹은 변화한 개념은 무엇인가요?
첫 작품 시리즈가 ‘공사장(工地)’이었어요. 비계(건축 공사를 할 때 설치하는 가설물)가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데, 빠르게 도시화하는 베이징과 자연의 풍광을 보호하려는 파리, 두 도시의 모습을 표현한 거였죠. 제게 건축 공사장은 미완성이자 가능성, 기대해볼 만한 가능성을 의미해요. 공사장에 설치한 비계는 시각적으로 비밀을 의미하며, 일시적으로나마 건축물을 신비화하죠. 공사장은 사물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요. 건축 현장에서 사용하는 비계를 실제로 찍은 사진과 컴퓨터 처리한 사진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어떤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어요. 이외에도 앞서 설명한 ‘사(事)’와 ’거울(鏡像)’, ‘경물(景物)’, ‘지도(地圖)’ 시리즈가 있죠.
베이징 작업실에서 자신의 ‘지도(地圖)’ 시리즈 작품과 함께한 지저우

자연을 소재로 한 ‘경물(景物)’ 시리즈 10번 작품

‘경물(景物)’ 시리즈 중 일상의 사물과 가구를 뒤집어 배치한 4번 작품 Courtesy of the Artist

‘경물(景物)’ 시리즈 중 9번 작품 Courtesy of the Artist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양한 브랜드와 꽤 많은 협업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진행한 인상적인 협업은 무엇인가요?
지난해에 베이징에서 레인 크로퍼드(Lane Crawford) 백화점과 협업했고, 올해 홍콩 아트 바젤에선 프랑스 브랜드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과 협업했습니다. 크리스찬 루부탱의 경우 몇몇 오브제를 이용해 매장 전시도 했는데 아주 흥미로웠어요. 또 최근 PQA 아트 프로젝트와 협력해 베이징 SKP 빌딩에 제 작품으로 2개의 거대한 쇼윈도를 표현했는데, 작품이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이들과 만날 수 있게 한 건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현재 중국 작가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어요. 수도 많고, 작업 스타일도 다양해서 아시아 작가 중 유독 눈에 띄죠. 오랫동안 해외에서 생활한 중국 작가와 오직 중국 내에서만 활동해온 중국 작가의 가치관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보통 예술가들은 독립적 개체로 작품을 선보입니다. 장기간 해외에 거주한 중국 예술가든 국내에서 활동한 중국 예술가든, 그들의 가치관 차이를 단순히 구분 짓는 건 어려운 일이죠. 모두 글로벌화된 정보 공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 가치관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봐요.
당신이 괜찮은 작가라는 얘긴 여기저기서 들었는데, 그런 명성에 비하면 전시 횟수가 참 적더라고요. 근황과 올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전시회 참가든 갤러리와의 협력이든 모두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하고 있어요. 몇몇 전시회에 관해 논의 중이고, 곧 베이징의 한 개인 미술관에서 열리는 ‘풍경’에 관한 단체전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하반기엔 인도 벵갈루루에서 열리는 예술제에 갈 계획이고요.
지저우
개념 사진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해 지금은 현대사회의 과열된 경쟁 속 ‘고독’과 ‘소외’를 그려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을 통해 ‘진실’과 ‘객관’의 경계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표현한다.
에디터 |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 조보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