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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

LIFESTYLE

100년이 넘은 건축물이 변덕스러운 도시의 골목 곳곳을 지키고 있는 대구로 건축 기행을 떠났다. 사람과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청라언덕 입구에서 바라본 선교사 챔니스 주택

선교사가 지은 계성학교 헨더슨관

“중구에서 근대건축물을 취재하신다고요? 잘 선택하셨어요. 번화가에 오래된 건축물이 이렇게 많은 곳도 드물지요.” 취재차 골목 투어를 신청한다는 말에 김정자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화기 너머로 웃으며 답했다. 현재 대구 중구청은 ‘근대로(路)의 여행’을 주제로 5개의 투어 코스를 선보이고 있다. 그중 대한제국 말기인 1900년 초부터 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한 1930년까지 지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제2코스는 근대건축의 미학과 함께 가슴 시린 역사를 고스란히 전한다. 제2코스를 기본으로 대구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을 추천받아 둘러보기로 했다. “대구 근대건축의 역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교사 주택들이 있는 청라언덕에서 만나기로 해요.”

선교사 블레어 주택

근대화의 싹을 틔우다
오전 내내 먹구름을 드리운 하늘은 청라언덕에 다다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여름이 되면 담쟁이로 뒤덮이는 해발 70m의 야트막한 언덕은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근대화를 맞이한 대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개신교는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1900년대 초 대구에 정착했고, 이때 대구를 찾은 선교사들이 서양 건축양식으로 지은 병원·학교·교회가 근대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특히 청라언덕에는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은 6채의 주택 중 블레어 주택, 챔니스 주택, 스윗즈 주택이 남아 있다. 블레어 주택은 그중 가장 먼저 1908년에 완공했다. 펼친 책을 엎어놓은 모양의 지붕과 방갈로를 닮은 외형은 전형적인 북미 목조 주택 양식을 보여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현재 이곳은 서당 풍경과 1960년대 교과서를 전시한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블레어 주택을 나와 대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걷다 보면 청라언덕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한 스윗즈 주택이 보인다. “블레어 주택과 챔니스 주택이 미국 목조 건축양식에 바탕을 두고 원본을 유지하려 애썼다면 가장 나중에 완공한 스윗즈 주택은 서양 건축에 한국 건축양식을 적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자 문화관광해설사가 말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적 정취가 느껴지는 지붕. 스윗즈 주택은 양식 지붕 위에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깔아 완성했다. 주택가에서 흔히 볼 법한 기와 주택이지만 전면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이국적 정취를 더한다. “스윗즈 주택에 사용한 초석은 1906년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무단으로 철거되고 남은 대구 읍성 돌을 사용했어요.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깃든 흔적이기도 하죠.”

계산성당 내부

자유와 신을 소망하다
뜨거워진 햇살에 정수리가 따가워질 즈음 계산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성중·고등학교 입구에서 계산오거리 방면으로 걸어가는 것이 훨씬 빠르지만 “90계단을 꼭 봐야 한다”는 김정자 문화관광해설사의 추천에 다시 청라언덕을 돌아 계산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계단은 어린아이도 쉽게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단이 낮았는데, 이는 물자를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도록 일본인이 고안한 것이라고. 3·1운동 당시 800명의 학생이 이곳을 지나 서문시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대구 3.1운동의 현장, 90계단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계산성당

90계단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2개의 탑을 보며 5분 정도 걸었을까? 계산성당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냈다. “계산성당은 1902년에 완공한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대구대교구의 주교이자 성당 주임이던 로베르 신부가 설계했어요. 당시 가톨릭교회를 지을 수 있는 기술자가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명동성당을 지은 강의관, 모문금이라는 중국 기술자를 불렀죠. 실제로 이후에 지은 근대건축물은 대부분 강의관이 대구에 설립한 ‘쌍흥호’라는 회사에서 만든 붉은 벽돌로 건축했습니다.” 계산성당은 11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적용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2개의 첨탑, 붉은색과 검은색 벽돌로 마감한 외관, 전면 중앙의 12장 꽃잎 장식은 100년 전 사람들이 볼 때 굉장히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실내에서 홀로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높은 천장, 돌기둥 사이의 아치형 지지대는 유럽의 어느 유서 깊은 고성당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웅장하다. 제단 앞을 기준으로 좌우에는 로마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인정한 한국인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한복을 입고 선 최초의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명의 성인이 제단을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건함을 안겨준다.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변모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대구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동산병원 구관

역사의 희로애락을 견디다
계산성당을 나와 한약 냄새가 솔솔 풍기는 약전 골목을 따라 10분쯤 걷다 보니 네모반듯한 건물이 점점 눈앞에 가까워진다. 언뜻 봐도 수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낡은 건물이지만 고상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이곳이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식민지 경제 침탈의 거점이던 조선식산은행이다. 1931년 조선식산은행 대구 지점으로 지은 이 건물은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근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벽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고 그 위에 아이보리색 타일을 붙여 완성했다. 고상한 분위기는 르네상스 양식 덕분인데, 전면 유리창의 아치 모양을 제외하고 곡선을 배제해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을 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어린아이가 빨던 숟가락까지 빼앗아갔다고 알려진 이곳이 해방 후 산업은행으로 바뀌면서 대구 경제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이죠.” 전 재산을 빼앗긴 조선인에게 지옥 같던 공간은 이제 질곡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보여주는 박물관으로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개개인의 삶이 바뀌듯 건물의 역할도 변했다.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그 흔적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처 지나치지 못한 대구의 골목길과 세월을 담담히 견딘 또 다른 건축물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에디터 | 박현정(프리랜서)
사진 | 공정현
도움말 | 김정자(문화관광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