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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Years with Sottsass

LIFESTYLE

에토레 소트사스는 말했다. “여러분은 백지 위에 모든 것을 그릴 뿐 여러분의 영혼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You don’t save your soul. Just painting everything in white).” 그렇다면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삶의 디자인은 무엇일까?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1917~2007년)

올해는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창시자이자 이탈리아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1917~2007년)가 한국 나이로 100세가 되는 해다. 9년 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업적은 디자인 역사와 현장 곳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최근 우리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에서 무서운 속도로 진화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을 목도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의 차별화된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교육계에서는 기존의 정형화된 주입식 교육을 뛰어넘어 편견의 틀을 깨고 새로운 장을 창조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형’ 인재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디자인계에서는 소트사스가 창시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 멤피스의 작업을 재조명하며 부활을 꿈꾸고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소트사스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새롭게 대두된 휴머니즘과 창의성의 중요성이 이 거장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오늘날 주목하는 이 두 화두를 그의 일생과 제자들이 증언한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조명해본다.

10 꼬르소 꼬모 청담 오픈 8주년을 기념한 멤피스 특별전. 전시장 한가운데 소트사스의 대표작, 칼턴 책장이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그 뒤로는 제자들의 작품이 자리한다. 왼쪽부터 조지 소든의 시계, 나탈리 드 파스키에의 화병, 시로 구라마타의 탁자와 서랍장, 안드레아 브란치의 책장

마시모 자콘이 소트사스를 슈퍼히어로처럼 표현한 만화책 <에토레>. ‘소트사스 주니어 씨와 사물의 미스터리’라는 부제를 달았다.
ⓒ Massimo Giacon

영원한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설1917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난 소트사스의 풀네임은 에토레 소트사스 주니어로 건축가인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고 건축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그는 1939년 토리노 폴리테크니코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며 건축계에 입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참전한 이후 휴머니즘에 빠져들게 된 그. 이탈리아로 귀국해 밀라노에 건축과 산업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삶을 시작한다. 효율성만 강조하던 일상의 기계적 제품에 인간의 감성과 온기를 더한 디자인을 입히자는 것이 모토였다. 1950년대에 이탈리아 타자기 브랜드 올리베티(Olivetti)의 디자인 컨설팅을 통해 그는 디자인계의 유서 깊은 상, 황금 컴퍼스상(Compasso d’Oro)을 수상했다. 대표작 발렌타인(Valentine, 1969년) 타자기는 기존의 기계에서 볼 수 없던 색상과 유머를 담아 휴대용 타자기를 마치 인간의 친구처럼 표현한 제품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196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 소트사스는 패션, 산업디자인, 인테리어,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스타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주요 공대에서 건축 강의를 하며 학생들의 멘토로서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피렌체에서 강의하던 시절 그곳에서 수학하던 안드레아 브란치(Andrea Branzi), 마시모 모로치(Massimo Morozzi) 등 아방가르드 디자인을 선보이는 젊은 건축가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들은 아르키춤(Archizoom) 운동으로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모더니즘의 기능주의적 접근에 반대하고 새롭게 재구성하자는 반디자인 운동을 전개했다).
사실 당대의 세계 디자인 주도권은 발터 그로 피우스가 1919년 설립한 바우하우스에서 기인한 모더니즘에 입각한 독일에 있었다.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Less is more)’라는 독일 기능주의의 상징적 구호는 전후 황폐해진 세계를 간결한 디자인과 적은 재료를 통해 빠르게 복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규격화된 획일적인 공간과 물건에 둘러싸인 사용자는 서서히 숨이 막혀왔다. 인간의 체형을 고려한 편안함도, 인간의 부드러운 감성도 담겨 있지 않았다. 디자이너 역시 획일화된 틀 안에서 기계적으로 디자인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자율성이 배제된 채 소수의 유한 계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디자이너, 특히 그 중심에서 있던 에토레 소트사스는 제품, 가구, 건축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디자인으로 기계처럼 정형화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실험을 지속한다. 미국 MoMA 등에서 이를 선보이며 많은 이가 이 ‘신선한’ 디자인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성의 회복과 재발견을 주창한 이탈리아인이 억압된 디자인 환경에서 변화를 주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기업가도 이에 동참해 르네상스 시대의 선조처럼 산업구조 속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 넣자, 서서히 이탈리아 디자인이 세계 속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능주의로 인한 몰개성과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건축가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상업적 작업을 넘어 예술과 실험의 경계에 있는 디자인 운동도 태동했다. 특히 1981년, 60대의 소트사스가 20대 건 축가 제자와 함께 만든 디자인 그룹 멤피스(Memphis)의 등장은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으로 꼽힌다. 멤피스는 디자인사에 기록된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이는 세계 디자인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시발점이 되었다. 기능과 기계 미학보다 인간의 감성과 정신을 중시하는 시대가 열린 것. 멤피스는 산업화의 틀 속에서 제품을 통해 디자이너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그중 소트사스의 칼턴(Carlton) 책장은 이 시대의 트로피로 여겨진다. 기능주의의 지루함과 정형화된 규칙에 정면으로 항거하듯 다채롭고 컬러풀한 색상과 자유분방한 형태가 빛나는 제품. 과일 가게에서 과일 담는 상자로 주로 쓰던 싸구려 라미네이트 목재에 플라스틱 조각을 붙인 소재에서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룹 이름 멤피스도 당시 전시를 준비한 이들이 듣던 음악 ‘Memphis Blues Again’에서 따와 무작위성을 드러냈다.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도시의 이름이자, 미국의 도시 이름이기도 한 이중성을 띤다. 당시 소트사스와 이 운동을 함께한 미켈레데 루키(Michelle de Lucchi), 알도 치비크(Aldo Cibic), 마테오 툰(Matteo Thun) 등은 무명의 젊은 디자이너에서 차세대 유명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이탈리아 디자인이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확장하게 된 데에는 소트사스의 영향이 크다.
소트사스는 멤피스 그룹 결성과 동시에 보다 세계적인 전문 디자인 작업을 위해 밀라노 예술지구 브레라 지역에 소트사스 아소치아티(Sottsass Associati)를 설립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디자인하고 인테리어와 건축을 넘어 저술, 예술 창작 활동과 전시 큐레이션 등에도 참여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예술계에서도 인정받아 카셀 도쿠멘타, 퐁피두 센터에 초청받은 디자인 명사로 알려졌다. 20세기 세계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이탈리아 디자인 신화로 불리는 소트사스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밀라노의 관문 말펜사 국제공항에도 남아(건축설계와 인테리어를 담당했다) 이 도시를 오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넨다.

1981년 일본 디자이너 마사노리 우메다가 디자인한, 권투 경기장과 일본 다다미를 접목해 만든 타와라야 침대(Tawaraya Boxing Ring) 위에서 멤피스 초창기 주요 멤버가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함께했다.

2001년, 20년이 지난 후 멤피스 멤버들의 모습. 1981년에는 무명이었던 20대 디자이너가 중견 스타 디자이너로 성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사진에는 예술 비평가로, 멤피스 활동을 초기부터 지원한 소트사스의 반려자 바르바라 라디체가 포함되었다. 사진 속 인물은 맨 오른쪽이 에토레 소트사스, 그의 앞에 바르바라 라디체가 앉아 있으며 그녀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안드레아 브란치, 알도 치비크, 마르코 자니니, 마테오 툰, 미켈레데 루키, 나탈리 드 파스키에, 조지 소든, 마르티네 베딘이 자리한다.

거장 그리고 스승을 기억하다
에토레 소트사스는 디자인 업적을 떠나 개인적 삶에서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귀감이 되었다. 사회적 업적과 더불어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스승이나 상사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소트사스는 그런 드문 행운을 주변의 제자와 직원에게 남기고 떠났다. 필자는 기사를 준비하며 그가 20년간 운영해온 소트사스 아소치아티를 거친 많은 지인과 함께 그를 추억했다. 그의 훌륭한 인격이 그가 강조한 휴머니즘과 그만의 비범한 창의성을 탄생시킨 비결일지 모른다. 그의 가르침과 실천적 삶은 또 다른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시모 자콘의 일러스트로 산업에서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험하고 삶을 위한 디자인을 추구한 소트사스의 대표적 디자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의 어업 도시 무르만스크(Murmansk)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화병(1982년)의 건축적인 구조미가 강렬하게 시선을 끈다.
ⓒ Massimo Giacon

에피소드 1_ 건축가의 꿈과 연필 한 자루
2007년 12월 31일, 소트사스는 예고도 없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고령의 나이에 지속적인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그의 눈빛엔 항상 활력이 넘쳤으며 열정과 에너지도 20대 못지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중국의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를 진행한 그였다. 갑작스러운 마에스트로의 영면 소식에 그의 아내이자 저명한 예술 평론가 바르바라 라디체(Barbara Radice)를 비롯해 가까운 지인과 소트사스 아소치아티의 모든 직원은 충격으로 일상이 마비되었다. 이탈리아 주요 뉴스와 신문에서 앞다퉈 소식을 전했고 문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장례식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비밀리에, 소박하게 소수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치렀다. 언론에 실리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에 얽힌 신비한 미담이 하나 전해진다. 소트사스는 이름은 물론 건축가라는 직업도 같은 아버지와 남다른 유대 관계를 이어왔다. 평생 스튜디오에 아버지의 사진을 걸어두었을 정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고, 아들이 자신처럼 건축가가 되길 바랐다. 그런 소망을 담아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손에 연필을 쥐여주었다고 한다. 결국 소트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건축가가 되었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그곳에서 얻은 성찰이 그의 삶을 더 깊이 있게 성장시켰다. 아버지가 그의 멘토였던 것처럼 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지원하며 세계적 디자이너로 키워낸 것. 평생 자식은 없었지만 많은 자식을 둔 아버지 부럽지 않게 많은 멘티가 최후의 순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를 따르고 있다. 숨을 거둔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아내 라디체였다. 슬픔 속에 유품을 정리하던 그녀는 그가 입은 옷 주머니에서 연필 한 자루를 발견했다. 1917년 세상을 처음 만나 연필을 잡은 것처럼 2007년 마지막 날에도 연필이 그의 곁에 함께했다.

에토레 소트사스의 아이보리(Ivory, 1984년) 테이블

에피소드 2_ 좋은 디자인은 행복한 삶에서 나온다
살다가 운이 좋으면 한 번쯤, 숨이 멎을 것 같은 벅찬 순간을 맞이한다. 열렬히 사모하던 한류 스타를 우연히 만난 팬처럼, 나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로 넘어와 운명처럼 마주한 20세기 최고의 디자인 거장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들은 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겠노라 결심했고, 10명의 스튜디오 직원 중 가장 먼저 출근해 컴퓨터 앞에서 미동도 없이 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트사스가 미소를 지으며 경직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커피를 살 테니 잠시 이 앞 거리에 나가 마시고 오지 않겠니?” 내 작업이 맘에 들지 않은 걸까? 순간 내 눈빛에 스친 당혹감을 읽었는지 소트사스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넌 잘하고 있어. 하지만 디자인은 컴퓨터 앞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야. 눈을 감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느껴봐. 네 일상이 행복해야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거야. 디자인은 삶이야.”
모범생처럼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게 최선인 줄 알았던 나는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걱정도 잠시, 브레라의 분위기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을 감자 그간 음미할 여유가 없던 햇살의 온기와 커피의 그윽한 향이 온몸으로 퍼졌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소트사스가 일상의 행복을 깨우쳐준 이후 나는 디자인이 더 즐거워졌다. 한층 가까워진 그에게 늘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소위 은퇴 시기인 60대 중반에 20대 제자를 모아 멤피스 디자인 운동을 벌인 그. 그것이 큰 성공을 거둬 새로운 사조가 되었고 그는 거장으로, 그의 제자들은 차세대 스타로 부상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어떻게 기획한 걸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글쎄, 그렇게 성공할 줄 몰랐어. 그냥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지.(웃음)”

트리톱스(Treetops, 1981년) 플로어 램프

신화와 성좌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소트사스의 유리 화병 컬렉션

에피소드 3_ 트렌드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 혹은 미래다
디자이너가 두려워하는 일 중 하나는 심혈을 기울여 몇 년을 준비해 선보인 디자인이 순식간에 모조품을 양산하는 것이다. 내가 소트사스 아소치아티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이런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하루는 출장차 한국에 왔다가 우리가 수년간 디자인하고 소재를 세심히 골라 수정을 반복해서 출시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문손잡이가 중국에서 대량으로 양산돼 청계천 일대에 깔리고, 심지어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도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밀라노로 돌아가 소트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는 웃으며 우리를 위로했다. “그만큼 너희가 디자인을 잘했다는 증거니까 개의치 말고 기운 내. 우리는 더 괜찮은 디자인을 계속 만들어내면 돼. 더 좋은 제품을 만들면 복제품은 곧 쓸모없어질 거야.”
한편 그는 새로운 디자인을 하면서도 최신 트렌드를 좇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신 트렌드는 오랜 시간 이 분야에 몸담은 그에게는 이미 한 번은 시도한 디자인이기에 ‘to do list’가 아닌 ‘not to do list’의 항목이었다. 가구 브랜드 세지스를 위해 새로운 플라스틱 의자를 디자인할 때 기원전 문명의 ‘왕좌’에 대한 리서치를 함께한 기억이 있다. 최첨단 미래를 과거의 원형에서 찾아보자는 그의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사물을 바라볼 때 역사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조명할 것을 주지시켰다. 실제로 산업디자인 역사와 생애를 함께한 그는 사물을 보는 관점의 스펙트럼이 남달리 넓었다. 하루는 함께 커피를 마시다 그가 휴대폰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처음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는 전자계산기 수준의 성능이었어. 반면 그 사이즈는 지금 이 방(약 9㎡)을 가득 채우고도 넘쳤지. 그런데 불과 몇십 년 사이에 그 이상의 기능이 이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축소되다니 놀랍지 않니? 변화를 예측하긴 했지만 내가 예상한 소요 시간보다 10년 이상 빠른 것 같아.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지. 그걸 예측해서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

플라스틱 라미네이트 프레임을 두른 디바(Diva, 1984년) 거울

건축적 디자인의 사이드보드 카사블랑카(Casablanca, 1981년)

에피소드 4_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
얼마 전 오랜만에 옛 직장 선배 마시모 자콘(Massimo Giacon)을 만났다. 10 꼬르소 꼬모 청담 오픈 8주년을 기념하는 멤피스 특별전 현장에서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인 마시모 자콘은 지난해에 소트사스를 슈퍼히어로처럼 그린 만화책 <에토레>가 이탈리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함께 초청받았다. 만나자마자 그리운 스승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정말 고마운 분이야. 돌아가신 후에도 나에게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행운을 주시니….” 마시모는 그에게 정말 받은 것이 많다고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던 20대 때 그가 내 만화를 보고 밀라노로 불렀어. 지방 출신인 나는 당대 거장인 그와 주변의 유명인을 보고 한껏 주눅이 들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며 용기를 주었지. 유명세는 아무것도 아니니 절대 나를 낮추지 말라고. 내가 그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셨어.” 나도 20대에 신화가 된 소트사스를 만났다.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한 후 일을 시작할 때 그는 회사의 모든 직원과 동등하게 일대일로 악수하게하며 직접 소개를 해줬다. 손녀뻘인 내게 말을 놓으라고 할 정도로 소탈하고 권위를 탈피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변은 늘 명사로 붐볐는데, 때론 동화에서나 본 ‘왕자’나 ‘공주’의 칭호로 불리는 상류층과 <타임>이 선정한 100인도 있어 눈앞이 아득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소트사스는 먼저 다가와 나를 인사시켰다. 갓 입사한 막내였지만 ‘내 밑에서 일하는’ 혹은 ‘직원’ 같은 표현은 절대 쓰지 않았다. 대신 “나와 함께 일하는 훌륭한 동료”라고 했다. 반면 지위가 높은 상대는 오히려 “집안에 돈이 많아 노는 사람”, “저명한 상을 받았다는데 못 믿겠다”라는 농담을 섞어 소개하며 긴장을 풀어줬다. 상대를 초라하게 만드는 이른바 갑질 스승이나 선배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면 약자의 편에서 용기를 주던 향기로운 스승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런 고매한 인격이 그가 시작한 이탈리아 예술 운동이 지속적으로 다음 세대에 계승되어 한때의 유행이 아닌 문화로 자리 잡게 한 원천이 아닐까.

에디터 | 이재연 (jyeon@noblesse.com)
글 | 여미영(D3 대표)
사진 제공 | 10 꼬르소 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