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들어가는 미래
이 시대의 지성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고찰이다. 후대에 물려줄 건강하고 아름다운 땅, 그리고 삶과 문화. 이를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과 의식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 환원의 길은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_ 다이아나 강 대표, 이병혜 ㈜디자인이가스퀘어 대표, 설명기 프랫 인스티튜트 인테리어 디자인 교수, 이상철 ㈜프로젝트소 대표, 김선경 SK행복에프엔씨 이사
햇살 좋은 어느 봄날 오후, 북촌 한옥에 소박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노블레스>의 컨트리뷰팅 에디터 다이아나 강과 아름지기 고문이자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가르치는 설명기 교수, 최근 사간동에 유르겐 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한 이상철 ㈜프로젝트소 대표와 이병혜 ㈜디자인이가스퀘어 대표, SK행복에프엔씨 김선경 이사가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매실주를 베이스로 만든 웰컴 칵테일을 들고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리의 전통 방식에 따라 일인상을 받아들었다. 지역별로 다리의 생김새가 조금씩 다른 팔도의 소반 위에 한국식 토기를 올려 레드 와인을 담고 주전부리를 곁들였다. 김부각, 어란, 죽방멸치 등 밥상에 올라온 짭짤한 재료들이 신선하다.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이 자리에서 이들이 나눈 대화는 꽤 진지했다. ‘기업과 디자인의 사회적 가치와 공헌은 무엇인가?’
한옥의 사랑채 한편에 뷔페 테이블을 차렸다. 한국적인 옻칠, 자기 그릇을 활용하고 이인진 작가의 작품을 올려 멋스러움을 더했다.
“주변의 사물을 돌아보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많아요. 아주 작은 것에도 디자인이 담겨 있고 장인정신도 배어 있죠. 하지만 단순한 감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화두를 던진 건 다이아나 강 대표였다. 이어서 그녀는 진정한 나의 것이 되려면 ‘반드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우리는 유르겐 렐이라는 독일 사람에 대해 꽤 오래 이야기했다. 1944년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포즈난에서 태어나 파리와 뉴욕에서 섬유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1971년 일본으로 이주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류업체를 차린다. 성공한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서의 업적을 읊으려는 것이 아니다. 진지한 성찰이 담긴 그의 고백, 사업을 시작한 배경에 집중했다. “유르겐 렐이 어느 날부터 자신의 생활 속에 받아들이는 물건에 엄격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시절 경솔하게 받아들이던 물건을 거절하게 되었다는 거죠. 정말로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잘 음미해 가능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건, 나에게 필요없을 때에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뻐하며 사용할 수 있는 물건, 만약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더라도 흙으로 되돌아가는 물건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요.” 이상철 대표의 말이다. 이것이 유르겐 렐의 창립 이념이다. 일시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어떤 상황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 동시에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환경을 해치는 어떤 재료나 물질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전통과 수공예의 가치를 높이 사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등지의 장인 손을 빌렸다. 2006년 유르겐 렐은 생활용품 숍 바바구리를 열었다. 가구와 주방용품, 도자기, 침구, 타월, 카펫, 조명 등 그가 원하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였다.
유르겐 렐에서 판매하는 바바구리 제품이다. 바질, 자타만시(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한 방향 식물), 백단과 울금, 벌꿀, 숯 등의 온화한 향을 느낄 수 있는 천연 성분 비누와 오키나와 차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허브차(종이봉투에 들어 있다). 자수 보자기는 인도 민속 예술 기법으로 바바구리 마크를 손자수로 표현한 것. 주전자, 버너, 모기향 통은 이와테 현 모리오카 시의 가마사다 공방에서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었다. 철에 검은색 옻칠을 한 것으로 사용할수록 철 표면의 차분한 느낌과 광택이 살아난다. 도자기는 식물의 열매와 잎 모양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백토에 옅은 연둣빛 유약을 발랐으며 사용할수록 찻물이 유약에 스며들어 금이 나타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가 있다. ‘행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유르겐 렐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꼭 필요한 물건을 정성 들여 소량만 만들고, 이를 온전히 소비(판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양과 동양의 가치관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고, 전통과 현대를 잇는 라이프스타일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광고와 프로모션을 일절 진행하지 않지만 유르겐 렐의 가치를 아는 이는 모두 직접 매장을 찾아 물건을 구입하고, 이는 지속적인 재구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유르겐 렐은 책임감을 갖고 제품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2014년 유르겐 렐은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올 2월 말, 사간동에 유르겐 렐 최초의 해외 지점도 열었다. “1층에서는 자연을 입은 듯한 평화로운 유르겐 렐의 옷과 액세서리, 2층에서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편과 장인정신을 담은 바바구리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 테라스에도 꼭 올라보라고, 이병혜 대표가 말을 보탠다.
국내에서는 사회적 기업 SK행복나눔재단의 행보가 귀감이 된다. SK행복에프엔씨는 SK행복나눔재단 산하 기관으로 음식 문화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자는 취지로 설립했다. 매해 저소득층 청년 40명을 뽑아 셰프 교육을 시키고 있다. 1인당 2000만 원이 드니, 꽤 배짱 있는 투자다. “영국 제이미 올리버의 피프틴 레스토랑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일선의 셰프가 직접 교육자로 참여하죠. 프렌치, 이탤리언 등의 서양 요리와 베이킹도 가르치지만 한식당 ‘오늘’을 운영하는 만큼 한식을 전수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김선경 이사가 소명감 가득한 목소리로 SK행복에프엔씨에 대해 설명했다. 직업적 자립심을 길러주는 동시에 사라져가는 한식 레시피를 보전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더불어 이곳에서는 전국 산지에서 친환경 식자재를 공수해 SK그룹 구성원에게 좋은 가격으로 제공하는 활동도 함께 한다. 안동의 한옥 리조트 ‘구름에’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했다. 안동댐을 지으며 물에 잠길 뻔한 7채의 고택을 옮겨 죽어가던 전통 가옥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TV와 침대가 없는 이곳은 자연이 주는 위안을 느끼며 뿌리를 발견하는 곳이죠. 더불어 작은 한옥 방에 모여 살을 부대끼며 대화하는 것은 가족 관계의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3색 와인 안주. 김부각과 어란, 죽방멸치. 죽방멸치는 올리브 오일에 청양고추, 약간의 허브를 넣고 2~3일간 재워서 먹어도 좋다.

칵테일과 함께 즐긴 크로스티니. 토스트한 빵 위에 아티초크 타프나드, 청포도, 호두, 페루 고추를 얹었다.

말린 사과를 곁들인 로마노 파르미자나 치즈


매실주와 진, 캄파리를 2:2:1로 혼합한 전통주 칵테일을 나누며 환영 인사를 나눴다. 유리잔은 일본 유리공예가 쓰지 가쓰미 작품으로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접시에 담긴 카나페는 크래커 위에 무화과잼을 바르고 캘리포니아산 아티초크와 포도를 토핑해 만들었다.
해외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설명기 교수는 미국 뉴욕에서 생산자와 교육자, 디자이너(그래픽과 공간 디자인)가 협업한 새로운 컨셉의 푸드 마켓 ‘가스트로 플리(Gastro Flea)’를 성공리에 진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음식을 주제로 한 지역 경제와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문화 행사였다고.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닐 클라인버그는 5년간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자신의 에스겔 카페에서 위험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음식 문화를 교육하며 사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중국의 산시 성에는 낙후된 산골 마을을 스웨덴 사람이 복구해 고유의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사례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혼슈 지방 오바마시에 위치한 시로타니 에코 빌리지가 유명하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중요성은 이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지역사회가 할 일이라고 미뤄둔다면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책임감 있고 행동력 있는 개인과 기업이 있어야 ‘지속 가능한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가치 있는 소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브랜드의 명성과 가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헌과 기여도’를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다이아나 강 대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고 ‘어른의 소임’이라고 입을 모았다. ‘누군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를 바꾼다. 대단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한다.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멋과 맛이 함께 어우러진 와인 상차림
Diana’s Table…
다중적 의미의 ‘테이블’을 매개로 다이아나 강이 만나고 싶은 사람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공간. 다이아나 강 대표는 나인웨스트와 스티브 매든,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브랜드의 아시아 지역 유통을 총괄하는 GRI의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다. 또한 원더박스의 대표이사로 음식과 문화 이벤트를 통해 한국과 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우리 전통문화 지킴이 예올의 고문을 맡고 있으며 봉사 단체 Dream Circle Korea의 창단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노블레스>와는 2011년부터 컨트리뷰팅 에디터로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토기에 담긴 레드 와인이 색다른 느낌이다. 소반 위 컵과 접시는 모두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 제품

트러플 오일을 뿌린 미니 바게트
에디터 |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 김황직
컨트리뷰팅 에디터 | 다이아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