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이런 노래가 있었지
1990년대는 가요 팬에게 축복 같은 시기였다. 각자의 개성으로 충만한 좋은 음악이 이음매도 없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그 시대를 관통한 작곡가 3명을 만났다. 그 시절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노래를 만들었을까. 또 지금은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을까.
셔츠와 팬츠 Ermenegildo Zegna, 시계 Frederique Constant.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창환의 음악을 듣지 않고 1990년대를 통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 독보적인 프로듀서가 지금 새로운 시대를 준비 중이다.
당신이 제작한 음반이 몇 장쯤 팔렸을까? 세어본 적 있나? 글쎄. 신승훈과 김건모만 합쳐도 2000만 장이고, 클론이나 노이즈까지 합치면 3000만 장쯤 될 것 같다.
수익도 대단했겠다. 음반이 팔리던 시기니까 많이 벌었다. 하지만 1998년쯤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에 세무조사의 표적이 되면서 거의 다 잃었다. 당시 내가 이끈 라인뮤직은 지금의 SM 이상이었으니까. 연예계를 압박하는 일종의 시범 케이스가 된 거다. 그러면서 회사가 사실상 주저앉았다. 음악만 했지, 경영은 잘 몰랐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라인뮤직이 침몰하면서 SM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뮤직이 본격적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그걸 보는 당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질투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직접 아이돌을 만들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만 아이돌 음악 시장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좀 놀랍지.(웃음) 그래도 작년부터 버스커버스커나 자이언티 같은 친구들의 음원이 아이돌보다 잘되고 있는 건 고무적인 현상이다. 잘 만든 음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 같다.
지금 당신은 보이 밴드를 준비 중인 걸로 안다. 비슷한 맥락인가? 그렇다. 캐릭터가 아니라 음악 자체가 중요한 시장이 다시 오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소년들로 구성한 ‘이스트라이트’라는 6인조 밴드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 씨앤블루 같은 팀과의 차이점이라면 정말 음악 천재만 모아놨다는 거다. 기타와 드럼을 담당하는 친구들은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만 보고 바로 캐스팅했다. 충격적일 정도의 실력이었다. 프로보다 나을 정도였으니까.
한국에서 보이 밴드는 익숙하지 않은 형태다. 왜 익숙한 것 대신 낯선 스타일로 승부를 하나? 전에도 누군가를 흉내 낸 적은 없다. 내가 키운 김건모나 신승훈, 클론, 노이즈 같은 팀도 당시에는 전에 없던 유형의 가수였다. 아이돌이 시장의 주류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제는 춤 잘 추는 아이돌이 아니라 음악 잘하는 아이돌이 주목받을 시대가 왔다고 본다.
1990년대를 평정한 당신이 2000년대에는 잠잠했다. 그때는 왜 활동이 뜸했을까? 2000년대에는 내가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음악이 공짜가 되면서 음반 판매율이 급감했고, 음악 잘하는 가수들이 위기에 몰렸다. 마침 회사도 공중분해됐고, 소속 가수들도 때마침 다 독립해버렸다. 이후에 채연이나 이정의 앨범을 제작했는데 스코어가 충격적이었다. 3개월 동안 고작 5만 장 팔렸더라. 내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미국에 가서 가족과 몇 년 지냈다.
그러다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언더그라운드에서 꿈틀대고 있는 걸 봤다. EDM을 가요와 접목하면 뭔가 근사한 게 등장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EDM을 새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주말마다 클럽을 찾고, 일부러 20대와 만나고 다녔다. 제로 상태에서 완전히 다시 시작한 거다.
당신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면, 그냥 그 시대에 머무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소리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고, 인생의 즐거움도 음악에 있다. 그걸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보통 나이 들면 그 나이에 맞는 음악을 하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트렌디한 게 좋다. 젊은 세대가 듣고 열광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 나이 들었다고 꼭 트로트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게 발현된 곡이 ‘Pick Me’다. 그 곡을 당신이 만들었다는 게 나름 충격이었다. <프로듀스 101>의 CP가 부탁해 만든 곡이다. 프로그램상 EDM이라는 장르가 필요해서 내게 부탁하긴 했는데 막상 곡을 듣고는 제작진에서도 찬반이 갈렸다고 들었다. 멜로디가 강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처음에는 대중도 곡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맞다. 이건 노래도 아니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자신 있었다. 분명히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음원 나온 지 보름쯤 지나면서 비난하던 사람들이 먼저 이 노래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욕하면서도 계속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 거다.(웃음)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EDM이라는 장르를 대중이 받아들이게 된 거라 오랜만에 뿌듯함을 느꼈다.
‘아직 내가 통한다’는 희망 같은 걸까? 그렇다. 다시 도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곡이다. 그리고 EDM이 가요화될 수 있다는 첫 선례이기도 하고.
이후에 곡 의뢰가 꽤 들어오지 않던가? SM이나 YG는 꽤 충격이었을 거다. 엉뚱한 데서 EDM이 터져버렸으니까. JYP에서는 곡 의뢰가 한 번 왔는데 거절했다. 곡을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 곡이 자기들 스타일과 맞지 않아 거절하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된다. 심지어 박진영은 내가 키우던 연습생 출신인데. 무엇보다 나는 작곡가라기보다 프로듀서에 가까운 사람이라 곡만 주는 게 굉장히 어색하다.
그 어색함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준다면? 내가 가수나 앨범 전체의 컨셉을 컨트롤하지 않는 게 어색하다는 거다. 신승훈이나 김건모, 클론은 내가 처음부터 기획한 가수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나는 프로듀서라고 외치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작곡가와 작사가만 있으면 되지, 프로듀서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듣던 시절이었지. 하지만 앨범을 어떤 색깔로 가져갈지는 전적으로 프로듀서의 영역이다. 가수의 포지션과 음반의 컬러를 정확하게 설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건모 같은 경우는 프로듀싱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래서 3집을 끝으로 그가 날 떠날 때는 배신감도 꽤 컸다.
마침 19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불고 있다. 당신은 이 현상을 어떻게 보나?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가끔씩 향수를 건드릴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갈 수는 없다. 요즘 인기인 힙합도 비슷하다고 본다. <쇼미더머니> 때문에 한국에서 힙합이 인기가 높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힙합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빌보드차트를 보면 힙합은 10곡도 없다. R&B도 마찬가지. 지금은 그냥 팝이 대세다.
당신은 엄청난 히트 프로듀서였지만 소위 음악성을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난 대중음악인이다. 대중음악은 대중이 많이 들어주고 불러주면 되는 건데, 거기서 음악성을 왜 찾나. 물론 내가 만든 곡 중에도 소위 ‘음악성 있는’ 곡이 있다. 하지만 그 곡을 기억하는 건 아주 소수의 사람뿐이다. 특정 소수가 만든 룰 안에서 음악성이 어쩌니 하는 건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더 옳다는 게 아니라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나는 철저한 대중 지향의 뮤지션이고,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곡 중 최고를 꼽는다면? 김건모의 ‘핑계’다. 발매 전에는 과연 이 곡이 통할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그 곡이 성공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사람이 아는 노래니까.
톱과 팬츠, 슈즈, 브레이슬릿, 모두 본인 소장품, 시계 Hublot, 안경 Dior by Safilo.
더 먼 곳을 본다
당대의 모든 가수들이 김형석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탐냈다. 이 남자는 지금 글로벌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입고 온 옷이 화려해서 살짝 놀랐다. 얼마 전 후배인 신사동호랭이를 만났다. 요즘 아이돌 음반 제작하려면 뭘 잘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하더라. 옷을 못 입으면 아이들이 무시한다고.(웃음) 생각해보니 그 시장에 진입하려면 그것도 중요할 것 같았다. 다 아내가 골라주는 옷이긴 하지만 중요한 자리에는 신경 쓰고 다니려고 한다.
예전에는 좀 추레하게 입고 다녀야 더 작가적으로 봐주는 분위기 아니었나? 맞다.(웃음) 국방색 점퍼에 늘 술에 좀 취해 있어야 했고, 머리에서 냄새도 좀 나야 음악 하는 사람처럼 봤지. 하지만 지금은 장르를 불문하고 패션을 빼고는 음악을 얘기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최근 중국을 자주 오가는 건 현지 사업 때문인가? 올 10월쯤 상하이에 케이노트(김형석이 설립한 대중음악 아카데미)를 오픈한다. 규모도 크고 중국 현지에서도 꽤 투자한 상태라 신경 쓸 게 많다. 지금 중국은 아이돌 시장이 드라마틱하게 성장하고 있다. 음악 시장에 대한 관심은 엄청난데, 아무래도 음악적 기량은 한국이 훨씬 앞서 있으니 우리 것을 배우고 싶어 한다. SM이나 JYP와 다른 점? 우리는 아카데미라는 것. 특정 기획사 소속이 아니라 교육기관이 되는 거다
지금은 한국을 배우겠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서면 곧 시장을 닫아버리지 않을까? 그렇겠지. 한국의 기량을 흡수하고 자기들끼리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럴 거다. 음악뿐 아니라 드라마나 예능 같은 경우도 곧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는 건 아예 중국 현지에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거다. 케이노트 상하이가 아마 거점이 될 것 같다.
중국 연습생들은 어떤가? 대단하다. 1980년 이후 세대는 사실상 뉴요커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인구가 14억이니 천재도 많다. 오지 마을 같은 곳에서 레슨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휘트니 휴스턴처럼 노래한다. 무엇보다 중국 내에서 신분 상승 가능성은 운동이나 예술 쪽이 제일 크다는 생각이 있다 보니 정말 절박하게 한다. 히딩크가 박지성을 유럽에 데리고 갔듯이, 한중 합작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본다.
한국은 발라드 시대를 거쳐 현재 댄스음악이 거의 주류다. 중국은 어떤가? 중국은 지금이 발라드 시대다. 95% 이상이 발라드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시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케이팝이 인기를 얻는 것도 그런 흐름에서다. 지금 중국의 케이팝 팬은 음악을 소비한다기보다 아이돌 자체를 소비한다. 보편타당한 음악보다는 아티스트의 아이덴티티를 극도로 발현시키는 게 중요하다.
얼마 전에는 코스피 상장 기업을 인수해 최대 주주 겸 CEO가 됐다. 당신이 억만장자가 됐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아유,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최대 주주인 건 맞지만 아직 실현된 수익은 전혀 없다. 현재도 실적이 없는 상태니까.
당신 외에도 드라마와 공연 전문가들이 회사 이사진이다. 의미심장한 구성으로 보인다. 맞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목표로 한다.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장원석 피디나 공연 전문가인 박칼린 감독이 이사로 있는 이유기도 하고. 곧 미국에 있는 청바지 회사도 하나 인수한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CEO는 실적을 내야 하는 자리다. 중국에서 히트 상품이 꼭 하나 나와야 할 텐데, 역시 아이돌일까? 그렇다. 우선 아이돌 한 팀을 계획하고 있다. 아이돌이 앞으로도 계속 시장을 이끌 거라고 보기 때문에 우선순위다. 이후 배우나 뮤지컬 배우도 준비하고 있다. 다만 나는 앞으로 3년 정도만 이 회사의 프레임을 짤 계획이고, 회사가 자생 능력을 갖추면 주주로 남을 거다. 이후에는 음악만 하고 싶은 게 꿈이다.
당신은 독보적인 멜로디 메이커였다. 하지만 요즘은 음악이 멜로디보다 비트나 사운드에 가까워졌다. 이 시대가 어색하진 않은가? 물론 요즘 유행하는 음악을 따라 할 수는 있다. 문제는 비슷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는 거다. 클럽 음악이 유행한다고 내가 매일 클럽에 다닐 수는 없으니까.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음악을 만들면 사람들이 금방 눈치챈다.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음악을 억지로 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이 판에서 직접 플레이어가 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능력 있는 크리에이터를 선발해 그 친구들이 잘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역할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은 작곡 활동이 뜸하다. 나이의 영향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요즘 음악 스타일과 내 곡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은 기획사와 작곡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예전과 달리 완성한 곡이라도 수정이 빈번하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식으로 부려먹기 힘드니까.(웃음)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는 작곡가를 뽑으라면 당신일 거다. 수십 년 전에 만든 곡들이 지금도 다시 불리곤 한다. 고마운 일이지만,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작사가의 힘이다. 곡과 가사의 합이 맞았기 때문에 오래 불릴 수 있었다고 본다. 양재선이나 박주연 같은 작사가가 없었다면 내 곡이 그렇게 빛날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도 점점 작사의 힘은 커질 거다. 당신 말처럼 음악이 멜로디보다 사운드화되고있다. 그러면 그 안에 어떤 메시지를 담느냐가 아주 중요해진다. 힙합이 지금 대세가 된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
김형석이라는 작곡가의 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보컬리스트의 이름이 다 등장한다. 김광석과 김건모, 임창정과 성시경, 김조한 등. 좋은 가수의 기준은 뭘까? 결국 음색이다. 음색은 타고나는 거라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솔직하게 부르는 것. R&B건 록이건 발라드건 자기 목소리로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가수는 선천적으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작곡 스승으로 당신을 꼽는다. 많은 재능을 봐왔을 텐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박진영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코드를 몇 개 가르치면 보통 한 곡씩 써온다. 그런데 진영이는 3~4개를 써왔다. 게다가 곡마다 가사까지 붙여서. 대단한 열정이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진영이에게 댄스음악을 배울 정도였으니 가르쳤다기보다는 교류했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인가? 유재하다. 과 선배였는데 그를 보면서 대중음악을 꿈꾸게 됐다. 김광석은 운 좋게 내 데뷔곡(‘사랑이라는 이유로’)을 불러준 사람이다. 이 전설적인 뮤지션들과 동시대에 살면서 영향을 받았다는 게 지금도 감사하다.
요즘 한 번쯤 작업하고 싶은 가수는 없던가? 예쁜 걸 그룹?(웃음) <복면가왕>을 하면서 노래 잘하는 어린 친구가 너무 많다는 걸 느꼈다. EXID의 솔지나 Fx의 루나 같은 친구들.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걸 그룹과 작업해보고 싶다.(웃음)
음악저작권협회에는 당신의 곡이 1200곡 정도 등록돼 있다. 그 수많은 곡 중에 3개만 꼽을 수 있겠나?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을 택하겠다. 보통 작곡가는 초창기에 쓴 곡에 애정이 많다. 특정 가수를 생각하며 쓴 곡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쓰니까. 이 곡들이 가장 나다운 곡이 아닌가 싶다.
재킷과 니트, 팬츠, 스카프 모두 Corneliani, 슈즈 Vivera, 안경 Mykita by Zio.
지금은 느긋하다
20살 김현철이 등장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세련된 가요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청년이 이제 느림의 의미를 체화한 중년이 됐다.
요즘 TV에서 당신의 모습을 자주 본다. <복면가왕>에선 심지어 고정 패널인데. 한 번만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하게 된 케이스다. 좋은 가수들의 노래를 계속 들을 수 있는 건 좋지만 녹화 시간이 12시간 정도 되다 보니 상당히 힘든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래 하면 가끔 노래를 놓치는 경우도 생기겠다. 사실 노래에 빠져서 감상하긴 힘들다. 노래를 들으면서 동시에 이후의 코멘트도 생각해야 하니까. 긴장감이 사라진다고 리허설도 못 보게 하기 때문에 나름 굉장히 바쁘다.(웃음)
3년째 진행하는 라디오는 어떤가. <오후의 발견>은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과거의 음악을 훑는 성격이 강하다. 1970~1990년대가 워낙 대중음악이 폭발하는 시기였다.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이 등장했고, 수준도 높았다. 다행히 나도 그 시기에 음악 활동을 왕성하게 했기 때문에 진행하면서 즐거웠다. 다만 요즘은 걸 그룹 노래도 자주 튼다. 청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올드 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갈 데가 사라지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도 있다.
문제의식을 느끼나? 느낀다. 음악 시장이 예전에 비해 굉장히 커졌다. 하루에도 100곡이 넘는 신곡이 쏟아진다. 다만 이렇게 시장이 커졌다면 역사에 대한 정리도 필요한데 그게 부족하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불과 5년 전에 나온 가수도 모른다. 음악이 너무 빨리 소비되는 건 아쉬운 일이다. 역사가 없으면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라디오방송에는 우리 가요의 역사를 훑는 코너가 계속 등장한다. 가수뿐 아니라 작곡가나 작사가까지 다룬다. 책임감일까?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다. 특히 1980~1990년대는 가요사에서 워낙 중요한 시대니까 가급적 많이 다루고 싶긴 하다.
방송 활동은 왕성히 했지만 신보 발매는 꽤 미뤄졌다. 9집이 나온 게 벌써 10년 전이다. 10집, 준비하고 있나? 사실 곡은 충분히 쌓였는데 가사가 힘들다. 좀 울림이 있는 가사를 쓰고 싶은데 그런 노랫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 앨범을 못 내고 있다.
다른 뮤지션은 곡을 쓰는 게 어렵지, 가사는 금방 쓰는 경우가 많다던데. 당신은 좀 다른가 보다. 난 예전부터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요즘에도 계속 불리는 게 과연 곡만의 힘일까? 난 가사의 힘이라고 본다.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결국 가사더라.
어떤 가사가 좋은 가사일까? 젊을 때는 세상이 확실하게 보인다. 빨간색이면 빨간색, 파란색이면 파란색. 하지만 언젠가 빨간색이 때론 파란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게 겁이 난다. 그런 애매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가사가 좋은 가사 아닐까. 송골매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라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락에 겨운 내 입술로 / 모든 얘기 할 수도 있지만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멋진 가사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김창완 선배가 쓴 가사들이다. ‘내 화가여’나 ‘비닐 장판 위의 딱정벌레’ 같은 곡은 그 발상이나 표현이 정말 신선하다.
문득 당신이 노랫말을 쓴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들을 때마다 가사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와 닿는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가사가 중요하다. 가사가 좋은 노래는 매 시기 다른 감상을 준다. 사람이 성숙해지면서 자신도 모르던 의미를 찾게 되는 거다. 시적이고 중의적인 노랫말이 결국 생명력을 갖는데, 그런 가사로 10곡을 채우려니 힘들다.
‘춘천 가는 기차’가 실린 1집부터 ‘달의 몰락’이 들어 있던 3집까지는 그런 중의적인 가사가 많았다. 20대에 그런 가사를 쓸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보다 큰 걸 그리고 싶고, 그러다 보니 현학적인 느낌의 가사가 나왔다. 솔직히 그때 쓴 가사를 지금 보면 웃긴다. 뭣도 모르면서 알은 척하며 쓴 가사 같아서.
초기 앨범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처받겠다. 워낙 명반으로 꼽히는 앨범들 아닌가. 만든 사람의 의도와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도는 다른 거지.
1, 2집은 요즘 말로 힙스터 음악 같았다. 나만 알아야 하고, 나만 좋아해야 하는 그런 음악. 그런데 3집이 너무 히트하면서 당신의 팬들은 오히려 아쉬움을 느꼈다. 이해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들국화 1집이 나오기 전부터 들국화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부터 반 친구들 대부분이 들국화를 듣기 시작하더라. 그러자 괜히 들국화가 싫어지더라고.(웃음) 내 초기 팬들 중에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이 많았다. 일반 대중보다는 좀 더 음악을 좋아하는 리스너였지. 그분들은 다음 앨범에서 좀 더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길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의 스타일이 어떻게 매번 바뀔 수 있나.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럼 당신의 앨범 중에 제일 가사가 마음에 드는 노래는 뭔가? 아직 없다. 특정한 노래를 꼽기는 힘들다. 굳이 꼽으라면 5집. 그나마 제일 솔직한 앨범이 아니었나 싶다.
서슬 퍼런 천재로 불리던 당신이지만, 요즘 어린 친구들은 당신을 농담 잘하는 친근한 아저씨로 생각한다. 섭섭할 때는 없나? 이미 흘러간 세월을 붙잡으려 하면 추해진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다니는 것도 웃기지 않겠나.
지금 엔터테인먼트사의 대표기도 하다. 뮤지션도 있고, 배우도 있는 꽤 큰 회사다. 처음에는 작은 모터보트를 조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거대한 방주가 됐다. 특별히 뭔가를 하려다 그렇게 커진 게 아니라 물결 따라 흘러오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도 이 회사를 엄청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너무 큰 목표를 가지면 그때부터 뭔가 삐걱대기 시작하고 마음도 급해질 것 같아서.
스카우트하고 싶은 뮤지션은 없나? 없다. 어떤 목표의식을 가지지 않으려 한다. 누가 우리 회사에 오고 싶다면 거기에 맞춰 대응하면 되는 것 아닐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 때문에 초조해하는 건 싫다.
당신의 느긋한 성품이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원래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에게도 늘 말한다. “꿈 없어도 된다. 아빠도 꿈 없었는데 잘 살고 있다”고. ‘Boys be ambitious’ 같은 구호는 경제개발 시대에나 통용되는 것 아닐까 싶다.
음악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도 딱히 없겠다. 매번 후회하지만, 그렇게 큰 후회도 없다. 후회되는 일이 있으면 똑같은 실수를 다시 안 하면 되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후회 없는 선택 같은 게 어디 있겠나. 어떤 길을 선택해도 아쉬움은 생긴다.
당신은 가수 이전에 좋은 작곡가이자 독보적인 프로듀서다. 직접 만든 앨범 중 제일 맘에 드는 건 뭔가? 내 앨범을 빼고 말하면 유재하 10주기 추모 앨범과 이소라 4집이다. 유재하 추모 앨범은 참여한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 운 좋게도 내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정말 기분 좋게 만든 앨범이다. 이소라 4집은 지금 생각해도 썩 괜찮은 앨범이 아니었나 싶다.
곧 당신의 신곡을 들을 수 있을까? 우선 다비치의 신곡을 녹음 중이다. 9월 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에디터 |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 기성율 헤어 & 메이크업 | 김원숙 스타일링 | 이경원(김창환, 김형석) 전미선(김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