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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물, 미술관이 되다

ARTNOW

100년 역사의 국가등록문화재가 헤레디움으로 탈바꿈하기까지.

학문적 연구와 병행해 레노베이션한 헤레디움의 아름다운 파사드.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깃든 건축물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에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황인규 회장이 이곳의 레노베이션을 결정한 데에는 미래에 대한 이러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1922년 대전에 문을 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목적은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후 민간 소유의 상점으로 사용하던 중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검사 출신인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은 대전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만큼 그 이익을 시민과 나누고 싶었다. 그러면서 1905년 철도를 놓을 때 생긴 신도시 대전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고, 대전에 근대건축물이 여러 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이곳이 유일하게 민간 소유였고, 대전의 기원과 관련 있는 곳인 만큼 시민과 소통하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에 소유주인 건축자재상을 오랜 기간 설득, 3년간 레노베이션을 거쳐 헤레디움(Heredium)을 개관하게 된 것. 황인규 회장이 미술 애호가라는 점도 이러한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검사로서 바쁘게 지내다가 박수근 화백의 위작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검사가 이젠 그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포럼에 참석했는데, 머리가 시원해지더라고요. 그림은 한 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 철학의 메타포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07년부터는 컬렉션도 하게 되었습니다. 메타포가 좋은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기존 통념과 기능을 제외한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것이 창의성의 시작이지요.”
또한 어려운 환경의 젊은이를 돕다 보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새롭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젊은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가장 좋은 원동력은 예술이 아닐까? 황 회장도 처음에는 구상미술을 좋아했지만, 이내 볼 때마다 달리 보이는 추상미술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미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보는 영역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황 회장은 헤레디움이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드디어 이 건물을 매입하고, 황 회장은 근대건축 전문가인 이상희 목원대학교 교수에게 협업을 요청했다. 국가등록문화재를 재건하는 일이기에 학문적 연구와 병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교수는 복원 연구서까지 발간하며 열정을 불살랐다. “과거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곳이 위치한 대전 인동과의 관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지난 3년간 준비 과정을 거쳐 헤레디움을 개관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황 회장님과 의견 일치를 본 중요한 부분은 ‘복원할 수 있는 한 모두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도는 여전히 제약이 많아 그 틀 안에서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함께 풀어나갔다. 과거의 유산을 잘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건축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개관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으며, 이제는 바람직한 국가등록문화재 재건 사례로 인정받아 보람을 느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부산과 목포에도 남아 있는데, 각각 부산근현대역사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 건축물은 공공 관점의 보수적 접근을 했고, 예산도 부족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민간의 예산과 전문가의 연구로 되살아난 헤레디움은 전국 근대건축물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는 것.

100여 년의 역사가 깃든 이 건물은 1980년대부터 민간 소유였다.

100여 년의 역사가 깃든 이 건물은 1980년대부터 민간 소유였다.

1949년에는 대전체신청으로 사용되었다. 우편과 전기통신 사업을 담당했다.

특히 헤레디움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완벽하게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살려 요즘은 황 회장과 이 교수에게 만남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헤레디움 개관으로 이미 재건한 근대건축물도 다시 레노베이션을 검토하고 있고, 새롭게 재건할 근대건축물이 논의 선상에 오르고 있다.
“최근 대전에서만 옛 충남도청사, 한국전력공사 대전보급소, 대전부청사 등의 복원과 재건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헤레디움의 성공적 개관이 대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근대건축물을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어 보람을 느낍니다.” 이 교수는 대전 소제동의 철도관사촌 역시 황 회장과 손잡고 문화 예술 마을로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어 대단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대전은 노잼 도시(재미없는 도시)’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벗어나 역사 도시, 근대건축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으니 반갑다.
헤레디움에서는 2주일에 한 번씩 음악회를 열며, 개관전으로 독일 미술가 안젤름 키퍼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국제적 미술가 안젤름 키퍼가 이곳의 개인전 개최를 수락한 것도 근대건축물을 재건한 미술관이라는 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안젤름 키퍼의 작품을 좋아한 황 회장이 제안서를 보냈는데, 그가 이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것. 서울의 대형 미술관이 아니라, 대전에 새로 생긴 작은 미술관 전시를 선택한 안젤름 키퍼의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안젤름 키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집터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폐허는 끝이 아닌 시작이며, 작품을 통해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헤레디움 역시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속에서 태어나 폐허로 전락할 운명이었지만, 미술관으로 거듭나 앞으로 100년 뒤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쪽 처음 금융기관으로 설계했기에 층고가 높아서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최적이다.
아래왼쪽 민간이 소유하며 천장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래오른쪽 처음 금융기관으로 설계했기에 층고가 높아서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최적이다.

황 회장이 처음 이곳의 복원과 재건을 결정하며 생각한 것도 과거가 아닌 미래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세운 건물을 보수까지 하며 살리려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어봤다. “100년 후 우리의 후손도 지금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망가진 채로 놔두기보다는 원래 모습을 되찾아야 미래 세대가 질문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과거를 잇고, 미래를 잇는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과거의 시간을 담은 건축물이 남아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며, 이러한 사례를 다양하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황 회장은 과거에는 건축 자체가 미술 작품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한동안 건폐율이 잘 나오는 박스형 건물이 세계를 점령했고, 얼마 전부터 다시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 생기고 있어 다행이라고 평했다. 근대건축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기보다 이를 재건하고 보수하는 건축양식 역시 21세기의 새로운 경향이다.
이 교수도 헤레디움은 10층 이상 고층 빌딩 건축이 허가되는 지역에 위치함에도, 국가등록문화재를 매입해 레노베이션한 황 회장의 결정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처음 금융기관으로 지은 건물이니만큼 원래 층고가 높아 21세기 미술관으로 적합하다는 것도 놀라운 우연이다. 당시 금융기관은 고객에게 안정감과 신뢰를 주기 위해 천장을 높게 만들었다.
이곳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지은 일본 시공사 역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곳이었다. 덕수궁 석조전, 신라호텔, 세계유산에 등재될 예정인 부산 북항 등을 시공한 회사다. 그런 만큼 헤레디움은 민간 소유의 건축자재상 건물로 쓰이며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트레이드마크인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상상에 기대 만든 것이다. 과거 사진이 남아 있지 않고, 1층과 2층을 분리해 사용한 탓에 계단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그 아름다운 외관에 놀라고, 마치 1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우아한 실내디자인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1시간마다 50명씩 입장객 예약을 받고, 출입구를 뒤쪽으로 옮긴 것도 오래된 건물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헤레디움의 노력이다. 매표소와 아트 숍도 일부러 야외 컨테이너에서 운영하고 있다.
“헤레디움 개관 이후 새로운 세계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고민해온 국가등록문화재의 제도적 문제점을 황 회장님과 함께 해결했고, 그 덕분에 자문 요청이 많아졌습니다.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재의 소유자뿐 아니라 시공자, 공간 운영자의 소통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도적 한계를 딛고 여러 여건이 앞으로 계속 발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교수는 이곳은 그런 소통이 잘된 만큼 아름다운 결실을 빚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황 회장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미술관 건축 프로젝트였다. 그는 매일매일 모든 것이 급변하는 21세기는 장기 계획을 세우는 시대가 아니라고 했다. “현대는 즉흥연주를 잘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이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도 참여해야 하지요. 즉흥연주는 악보가 없고, 서로 맞춰가며 연주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며 프로젝트가 목표에 이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근대건축물은 오래된 건물을 뜻하는 말일까? 황 회장은 오래된 건물과 세월이 쌓인 건물은 다르다고 말했다. 이곳은 오래되어 낡은 것이 아니라 연륜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당시 최첨단 기술로 지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될 수 있었고, 세월을 덧입어 더욱 빛나는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연륜이 묻어나는 성숙한 사람만이 나이 듦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건물은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래된 건물이라고 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아무 의미 없고, 오히려 건물이 망가집니다.” 아직 정해진 계획은 없지만 근대건축물을 편애하는 황 회장과 이 교수의 협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전에서 시작한 협업이 전국 곳곳으로 아름답게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왼쪽 근대건축 전문가인 이상희 목원대학교 교수.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 인상적이다.
오른쪽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은 대전 시민과 이익을 나누고 싶어서 예술 기관 설립에 관심을 가졌다.

 

에디터 이소영(프리랜서)
사진 김제원(인물), 헤레디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