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모아 새로운 획을 긋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이 8월 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다.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1부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전시 설치 전경.

활옷, 비단, 종이, 면, 139×187.5cm, 19세기. 필드 뮤지엄 소장.
“2017년 열린 〈신여성 도착하다〉전을 준비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자수를 전공한 한국 여성들의 작품을 몇 점 가져오면서 한국 근현대 자수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이렇게 현대적이고 회화적인 자수 작품이 있었는데 소위 ‘전통 자수’ 외에 그 후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는지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오랜 시간 준비하고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이른바 ‘규방 공예’라고 불린 전통 자수는 동아시아 국가와 교류하는 가운데 시대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보존이 어려운 재료 자체의 성격 탓에 현재 남아 있는, 전통 자수로 불리는 대부분의 작품은 19세기 말 이후의 것이다. 그 후 개항과 근대화, 서구화, 전쟁, 분단, 산업화, 세계화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전통 자수 외에 근현대 자수의 실천과 그 변화상은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였다.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바로 그 소외되고 잊힌 근현대 자수에 주목한 전시다. “해방 이후 20세기 중·후반까지 조선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도록을 보면 분명히 근현대 자수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정작 미술사는 그걸 연구하거나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편파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여성의 취미 또는 부업으로 폄하되던 자수를 “홑으로 볼 수 없는 맹랑한 예술”로 인식한 김종학 화백의 자수 컬렉션.

김종학, 여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79x229cm, 1988.
사치품에서 미술공예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주변화된 자수의 실천이 시대별로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총 4부로 구성한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부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는 자수 실천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제작한 전통 자수로 시작한다. 생활 자수와 복식 자수, 불상을 수놓은 수불(繡佛), 각종 의례나 감상에 쓰인 병풍에 놓은 자수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보료’와 ‘방석’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는 일반 사가가 아닌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宮繡)로, 복잡한 세부 묘사와 섬세한 바느질이 궁중 장인의 솜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여성 누구나 자수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재료가 워낙 비싸고 시간이 많이 들어 취미나 교양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일부 부잣집 여식뿐이었어요. 아니면 솜씨 있는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한 거죠. 자수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아주 일부 계층만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문화였습니다.”
박혜성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전통 자수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 중 사실과 맞지 않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전통 자수 대부분은 만든 이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자수 화조도 병풍’(20세기 초)에는 안재민이라는 자수 공예가의 이름과 함께 평안도를 의미하는 ‘패남’이라는 지역명을 기록한 낙관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안재민이라는 공예가가 남성이었다는 것. 조선 후기 자수 문화가 발달하며 전문적으로 자수 병풍 등을 분업화해 생산하는 집단이 생겼고, 그중에서도 평안도 안주 지역에서 생산한 자수 작품이 안주수(安州繡)라 불리며 왕실과 귀족 등 상류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당시 부와 취향을 과시하는 데 자수 병풍만 한 게 없었다고. 실제로 안주수 병풍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한 ‘준이종정도 자수 병풍’ 등의 규모와 색상, 자수를 놓은 기물 등을 보면 여성보다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사치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부 ‘그림 갓흔 자수’는 20세기 초 공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거듭난 자수의 변화상을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 여성이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자수를 전공했다. 이들의 자수는 그야말로 회화적이었으며, 귀국 후에는 각 학교의 수예 교사로서 조선 여학생에게 일본에서 배운 자수를 가르쳤다. 이러한 흐름은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공예부가 신설되며 자수가 ‘미술공예’로 거듭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추상 자수라는 새로운 세계
3부 ‘우주를 수건으로 삼고’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전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45년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 자수과가 신설되며 한국 자수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의 흐름에 발맞추는 모습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 언어일 것이다. 1950년대 후반 박서보, 김창열 등 젊은 아티스트들이 기존 사실주의 회화에 반대하며 주도한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의 영향은 공예이자 예술인 자수에도 거세게 미쳤다.
“전통적으로 쓰임이 중요하던 공예가 감상 대상이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하지만 자수는 조금 달라요. 쓸모보다는 장식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 존재 자체가 잉여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순수 미술 역시 잉여적이거든요.” 자수의 특성에 대한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설명에서 추상 자수로 변화한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1960년대에 국전에 출품한 자수 작품 중 추상 자수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수상한 작품도 있다.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한국 섬유 예술 1세대 작가인 이신자의 작품 ‘노이로제’(1961)도 인상적이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1984년 국가무형유산 자수장으로서 최초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한상수 선생과 1996년 국가무형유산 제80호 자수장으로 지정된 최유현 선생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자수 명인들 역시 1960년대에는 추상 자수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전시 부제이기도 한 최유현 자수장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1968)은 현대적 수묵 추상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서세옥 화백에게 밑그림을 요청해 그 위에 직접 수를 놓은 작품.
엄정윤의 ‘유리창에 서려든 성에의 자연’(1985)은 추운 겨울철 유리창 안팎의 온도 차에 의해 생기는 성에가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 서늘한 겨울 풍경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이미지와 힘차면서 부드러운 선의 강약과 리듬이 환상적이다. 자수가 송정인과 박을복의 경우 따로 공간을 마련해 여러 추상 자수 작품을 소개했는데, 다양한 자수 기법을 활용해 마치 옵아트 같은 시각적 착각을 일으키는 패턴을 선보인 송정인의 ‘작품 O-69’(1969), 전통적 마을 수호자 장승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분할, 재구성해 추상적으로 수놓은 박을복의 ‘천하대장군’(1963) 등은 현대미술 애호가의 시점에서 볼 때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다.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말에 따르면 이들 자수가는 전통 자수를 제작하는 동시에 시대의 흐름에 맞춰 추상 영역에 도전했다. “전통 자수는 공동 작업으로, 추상 자수는 개인 작업으로 여겼는지 자수가 홀로 작업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 자료 사진을 보면 전통 자수를 놓을 때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개인 작업을 할 때는 평상복을 입은 것도 재미있는 모습이지요.”
가장 여성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
마지막으로 4부 ‘전통미의 현대화’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자수가 근대화·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경공업으로서 산업 공예로, 그리고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전통 공예로 부각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앞의 전시 공간에서 느낀 새로움이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 익숙한 전통 자수로 변화하는 모습이 이채로운데,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우리가 아는 전통 자수라는 개념이 확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운 허동화·박영숙 선생 부부가 전통 자수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전통 자수가 아닌 동양 자수라고 불렀어요. 한국의 것을 구분조차 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다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자수가 전통적 가치가 있는 무형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한상수 선생과 최유현 선생이 국가무형유산 자수장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근현대 자수의 변화와 발전을 이끈 자수 장인들은 전통 자수를 재현하는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들의 유산은 한국 현대미술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2023 최종 후보이자 베니스 비엔날레 2024 본전시에 참여한 이강승 작가는 삼베에 전통적 손자수로 주류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잊힌 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내용의 텍스트를 수놓는다. 자수가 미술사에서 여성적 매체로 간주되어 회화와 조각보다 폄하돼온 매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로운 작업. 이민 1.5세대로서 정체성을 표현하는 회화 작가 써니 킴의 작품에는 십장생 등 자수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등장하는데, 자수 기법 특유의 질감을 회화로 표현한 부분을 주목하면 더욱 흥미롭다. 다양한 매체로 시스템 속 규칙과 금기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함경아 작가는 집 앞에서 발견한 북한 선전 전단인 ‘삐라’의 문구를 북한 자수 장인들에게 전달, 자수를 놓는 ‘자수 프로젝트’ 연작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시 전반에 자수를 매체로 활용하거나 영향을 받은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배치, 자수의 동시대적 의미를 전달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상류층의 혼수용품으로 자수 병풍이 전성기를 누린 시기에는 이름난 자수 장인의 병풍이 서울의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여성으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추상 자수 작업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잘 판매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최근엔 흐름이 많이 달라졌지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자수와 직조 작품이 많이 나왔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역시 섬유 설치 작업을 하는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그룹에 돌아갔습니다.”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말처럼, 자수는 가장 여성적인 예술로 그간 소외되고 폄하되었지만, 현재 활발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실물로 봐야 알 수 있는 자수 작품 특유의 질감과 입체감은 현대미술의 한 매체로서 자수의 가능성을 밝게 전망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