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포도뮤지엄의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전에서 기억을 향한 작가들의 시선을 확인했다.

위쪽 루이스 부르주아, ‘밀실 1’, 1991. © The Easton Foundation/VAGA at ARS, New York/SACK, Seoul, 2024
아래쪽 테마 공간 ‘Forget Me Not’.
지난봄 포도뮤지엄이 개관 3주년 소식을 전해왔다. 제주도에 위치함에도 어느새 수십만 명 넘게 다녀갔다고. 인기 비결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바로 독특한 운영 철학. 이들은 개관 이래 꾸준히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다양한 관점을 이해해보자는 취지의 전시를 선보여왔다. 시작은 <너와 내가 만든 세상>(2021년 4월 24일~2022년 5월 23일)이었다. 편협한 공감이 혐오로 변질되는 과정을 강애란, 장샤오강 등 작가 8인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2022년 7월 5일~2023년 9월 17일)에서는 이주민과 소수가 겪는 냉엄한 차별을 이배경, 우고 론디노네 등 작가 7인의 작품으로 조명했다.
현재 진행 중인 세 번째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2024년 3월 20일~2025년 3월 20일) 역시 다양한 연령층에게 고른 찬사를 받고 있다. 이번 주제도 심상치 않다. 인지 저하증(치매)을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탐구하는 자리다.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풀어냈을지 기대하며 포도뮤지엄으로 향했다. 검은 커튼을 젖히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란 벨처(Alan Belcher)의 ‘바탕화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래된 컴퓨터를 다시 켠 듯 이미지 파일 아이콘이 벽면에 즐비하다. 분명 추억할 만한 소중한 장면일 텐데, 이제 열 수 없는 단조로운 기호이자 차가운 세라믹으로 남았다. 기억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력감을 상기하는 동시에 기억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바로 옆에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이 있다. 서로 다른 고통을 의미하는 여섯 점의 ‘밀실’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유년 시절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완성했다. 육체적 고통을 지켜보던 두려움이 서린 공간에는 낡은 동전 지갑, 조리 도구 등 개인 물품이 가득하다. 낡은 매트리스처럼 놓인 우편 자루에는 ‘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노화와 고립을 상징하는 공간은 작가가 살아생전 매진했던 내면의 경계, 감정의 복합성에 관한 탐구 중에서도 가장 사적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 전시장을 걸으면 장난꾸러기 아이, 혹은 수줍은 소녀 같은 한 노인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쉐릴 세인트 온지(Cheryle St. Onge)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로,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어머니를 촬영한 사진 작품이다. 작가는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슬퍼하며 사진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이내 모친의 삶 속에서 명랑한 순간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인지 저하증에 관한 인식 변화를 꾀하는 작품은 이번 전시를 통해 뮤지엄이 의도한 바를 직관적이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노인들의 기억을 무대 세트로 가공해 과거와 현실의 간극을 보여주는 정연두의 영상 작품 ‘수공기억’, 방의 모퉁이를 썰어낸 듯한 설치 작품으로 기억의 변형 가능성을 제시한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에 탬버린, 사다리를 놓는 의외의 연출로 각자 상상력을 자극하는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의 ‘무제(패널룸)’을 차례로 감상하며 기억의 불완전성을 고민하다 보니 짙푸른 공간에 도달했다.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The Caretaker)의 오디오 설치 작품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와 화가 이반 실(Ivan Seal)의 회화 작품 여러 점이 있다. 향수를 일으키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어느 순간 소음이 개입해 점점 식별할 수 없는 울림이 되어간다. 그 소리는 정확히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회화 작품과 함께 기억과 인지가 서서히 상실되는 과정을 은유한다.

위쪽 쉐릴 세인트 온지,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2018~2020. © Cheryle St. Onge
아래쪽 천경우, ‘가장 아름다운’, 2024. © Kyungwoo Chun
버려진 합판 위에 풍경화를 그려 파괴하고 재구성한 데이비스 벅스(Davis Birks)의 ‘재구성된 풍경’ 연작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원형은 아닐지라도 결국 기억해내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겼다. 손때 묻은 책상 위로 문자들이 공중에 흩어진 시오타 치하루(Chiharu Shiota)의 ‘끝없는 선’은 언어와 문자가 사라졌을 때도 기억과 정체성이 그대로일지 생각하게 했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테마 공간. 포도뮤지엄은 많은 사람이 전시 주제에 공감할 수 있도록 전시마다 테마 공간을 기획해왔고, 이번 전시에서는 ‘Forget Me Not’이라는 몰입형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100년을 살다 죽은 배롱나무를 전시장 안으로 들여와 프로젝터를 투사해 싹을 틔우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 노쇠하기까지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배롱나무의 영롱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람객의 실제 비디오 영상이 띄워진다. 기억이 소멸해도 사랑은 근원적 형태로 남아 우리와 함께한다는 듯.
천경우의 ‘가장 아름다운’은 전시의 완벽한 마무리다.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종이에 그리는 퍼포먼스에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 참여하는 이들은 전시장 중앙에 마련된 공간에 들어가 각자 눈을 감고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에디터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을 그렸다.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을 거닐며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기적 같은 일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으니까. 가볍지 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미술이 낯선 이들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포도뮤지엄의 균형 감각이 빛나는 전시다. 마침 여름휴가철, 사랑하는 사람과 제주도에 간다면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전을 찾는 건 어떨까. 어쩌면이 아닌, 분명 아름다운 날이자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포도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