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가 향하는 곳
장인정신이 깃든 전통 공예품을 현대적 미감이 깃든 일상 도구로 재해석하는 일. 공예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3년째 전개 중인 재단법인 예올과 샤넬이 2024년 ‘올해의 장인’과 ‘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선정했다.
기능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공예 기술. 숙련된 고도의 기술로 아름답고 정교한 일상 용품을 제작 하는 장인의 실력과 정신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소 중한 무형자산이다. 재단법인 예올은 이러한 전통 공예의 가치 를 올바르게 성찰해 새로운 미래 전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비영리 재단이다.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한국 공예 후원 사업에 헌신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이런 재단법인 예올이 2022년부터 럭셔리 패션 하우스 샤넬과 손잡고 한국 공예를 위한 특별 프로젝트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전개 중이다. 예올이라는 이름의 각 글자에서 의 미를 본떠 내용을 구상한 것이 특징. ‘예로부터’라는 의미의 ‘예’ 에 맞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올해의 장인을, ‘현재나 앞으로 올 것’을 뜻하는 ‘올’에 따라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매년 각각 한 명씩 선정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주인공 이 된 장인과 공예인은 지속 가능한 전통 공예품의 기획 및 개 발, 모델링, 생산 및 배포에 필요한 폭넓은 지원을 받게 된다. 예 올의 전통 공예 후원 사업의 핵심 중 하나인 이 프로젝트가 가능 할 수 있었던 데는 샤넬의 전폭적 지지가 큰 몫을 했다. 장인정신 과 수작업을 브랜드의 근간으로 하는 샤넬은 장인의 특별한 기 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예올과 뜻을 함께하며 프로젝트 에 협력해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다.

왼쪽부터 정형구 대장장, 박지민 유리공예가.
이처럼 전통 공예의 가치를 알리는 데 앞장서온 ‘예올×샤넬 프로 젝트’ 2024년 주인공이 발표됐다. 올해의 장인 대장장 정형구와 올해의 젊은 공예인 유리공예가 박지민이다. 두 사람의 프로젝 트 결과물은 예올 북촌가에서 10월 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 <온 도와 소리가 깃든 손: 사계절(四季節)로의 인도>에서 만날 수 있 다. 현대적 미감을 입고 재탄생한 철제 제품과 유리그릇이 한옥 의 고즈넉한 정취와 어우러지며 인상적 장면을 연출한다. 미국의 건축 & 인테리어 매거진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100대 디자이너에 선정된 양태오 디자이너가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전시 총괄 디렉팅 및 작품 협업에 참여해 재료 의 물성에 대한 관념을 재구성한 현대적 일상 도구를 소개한다.
거친 철을 두드려 일상의 공예로
“몇십 년 전만 해도 대장간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큰 마을이 나 번화가에 하나씩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 대 문명과 기계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현실이죠. 이번 프 로젝트에서는 원예 도구 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장장이의 작업뿐 아니라 화로, 책받침 등 계절 변화에 따라 쓰임새가 다양 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일상에 녹아든 대장간을 경험해보길 바 랍니다.” 재단법인 예올 김영명 이사장의 말이다. 올해의 장인에 선정된 정형구 대장장은 결혼 후 대장간에서 일 하는 장인어른과 장모를 돕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장장이 의 길을 걸었다.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전국의 유명 대장간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고, 농사 인구가 현저히 줄어든 현대 시대상을 고려해 건축 공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복원 과정에 참여 한 것을 계기로 문화재 철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전통문 화대학교 대학원 전통 철물 과정을 거쳐 국가유산수리기능자가 되었다. 2021년부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의 국가유산수리기능인 양성 과정에서 철물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대장간은 흔히 ‘미감’과는 거리가 먼 뜨겁고 거친 공간으로 여기 지만, 강한 속성의 쇠를 녹이고 두드려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드 는 부드럽고 유용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소재의 성격을 바꾸는 장인의 손길에 주목해 변화 하는 철의 모습을 공유하고, 재료에 대한 편견을 해체하는 자리 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공예로 엿보는 사유의 자리를 마 련하는 동시에 우리 일상과 밀접한 사계절의 순환 속 삶을 더욱 즐겁고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를 제안했습니다. 이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절기에 맞춰 생활을 꾸려나간 선조의 계절별 라이프스 타일과 일용품을 현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양태오 디자이너의 전시 소개다. 전시장에는 생경하고 아름다운 철제 제품이 가득하다. 금속 철 판을 반복적으로 두드려 완성한 원예 도구 4종, 낮은 형태의 백 자에 꽃을 꽂던 한국 전통 꽃꽂이 방식을 재해석한 화기, 철판을 두드리고 구부려 유기적 형태를 만든 뒤 자유로운 형태로 구멍을 뚫어 연기가 새어 나오게 한 모기향 거치대, 단단한 금속 환봉을 반복적으로 두드린 후 끝부분을 얇고 넓게 펴 우산을 지지하도 록 제작한 우산꽂이 등 다채로운 금속공예 작품이 시선을 끈다.
재와 그을음을 품은 유리공예
한편 올해의 젊은 공예인, 유리공예가 박지민은 유리라는 투명 매개체 속 불에 닿아 그을린 흔적을 남겨 추억을 기록한다. 일상 속 작은 나뭇잎이나 종이 조각부터 시대성을 상징하는 물건에 이 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간직한 오브제를 수집한 뒤 그 사물을 유리에 넣고 소성해 재와 그을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흔적으로 남기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여러 시도를 거쳐 하얀 유리에 그을음이 그려진 화병 형태를 만 들고 보니 자연스레 조선시대 철화백자가 떠올랐어요. 이번 작업 과 연결해보고 싶었죠. 전통적으로 백자에 그리던 매화·목련· 포도 문양 등을 유리 사이에 직접 넣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 습니다. 백자 표면에 사실적으로 그리던 사물이 작업 과정에서 열에 의해 재와 그을음으로 변형되며 추상적 패턴이 만들어졌고, 이를 유리 달항아리에 담아 풀어냈어요.” 박지민 작가의 설명이 다. 인공 색상 없이 추억이 깃든 재와 그을음이 새겨진 유리 작품 은 한 폭의 수묵화나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주로 판유리에 작업 해온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화병, 그릇 등 실용적 형태의 작품에 새롭게 도전했다. 전통 공예의 가치를 발견해 현대에 알리고 미래로 이어가는 일. 재단법인 예올과 샤넬이 지키고 가꾸려는 과거가 풍요로운 일상 과 새로운 전통으로 거듭나고 있다.
에디터 김수진(suze@noblesse.com)
사진 샤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