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에너지, 진동하는 빛
내면에서 출발한 다양한 이야기를 광활한 스케일의 유화로 그려내는 카일리 매닝.

카일리 매닝 미국 출신 작가 카일리 매닝은 뉴욕 어노니머스 갤러리(Anonymous Gallery), 멕시코 툭스틀라구티에레스에 있는 하이메 사비네스 컬처럴 센터(Jaime Sabines Cultural Center), 베를린 KN 갤러리(KN Gallery)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오하이오 콜럼버스 미술관(Columbus Museum of Art, Ohio), 마이애미 현대미술관(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Miami), 베이징 X 미술관(X Museum), 상하이 유즈 미술관(Yuz Museum)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허세보다는 대담함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드는 것(That it maintains bravery, rather than bravado)”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카일리 매닝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 회화 작가 중 한 명이다. 8월 9일부터 11월 20일까지 스페이스K에서 개인전 〈황해(Yellow Sea)〉를 여는 그녀는 제주도 신화와 바위에 초점을 맞춰 제주도 화산석을 이용한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 관람객이 스페이스K라는 특별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경험하길 바란다는 카일리 매닝을 만났다.
이번 개인전 〈황해〉를 준비하면서 특별히 신경 쓴 점이 있나요? 하루빨리 서울에 계신 분들과 작품을 공유하고 싶어요. 관람객이 공감할 수 있는 지역적 요소를 작품에 담으려고 한국을 많이 연구했어요. 제가 해안 어촌 출신이라 한국에서 비슷한 연결 고리를 찾았죠.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제주도 화산석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색은 관람객과 무의식적 연결을 유도하는 장치예요. 관람객이 작품에서 개인적 경험, 즉 친숙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모든 안료는 지역 고유의 색과 외부에서 들여온 색을 반영하는 독특한 역사를 품고 있거든요. 한국 물감을 사용하고 싶어 찾아보던 중 민속적 가치와 신화적 의미가 풍부한 제주도 화산석을 알게 되었죠. 사용한 돌 중 일부는 전통적 망부석이고, 다른 건 제주 전통 돌싸움에 사용한 돌이에요. 광물성 안료에는 현무암인 화산돌, 송이돌, 태양돌 등을 사용했어요.
증류를 주제로 한 신작 시리즈도 궁금합니다. 마치 식물처럼 가지치기 과정을 거쳐 정제된 에너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을 바닥에 두고 ‘과하다’ 싶은 부분에 안료를 부어 뿌옇게 만드는 거예요. 항상 ‘무엇이 될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될 수 없는 것’, 즉 잠재력의 가장자리까지 밀어붙이죠. 물론 작품은 결국 무언가가 되어야 하지만, 그건 작품이 담아내는 서사가 아니라 작품이 존재하는 순간 그 자체여야 해요. 그렇지 못한 작품은 안료에 흠뻑 적셔버려요. 작품이 마르면 일부 요소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저는 이 행위를 일종의 증류라고 생각해요.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불필요한 파편, 소음, 자국이 남지 않는 것처럼 붓 터치를 줄여 본질을 드러내죠.
이 지점에서 전시 제목 ’황해’로 연결되네요. 이 작품들에서는 마치 물감이 파도치듯 스케치 안팎으로 퍼져나가요. 황해는 독특한 조수 현상과 강력한 해류가 특징이에요. 밀물과 썰물 사이가 최대 9m에 달하는, 세계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죠. 그림이 지닌 장력처럼 황해는 다양한 생물, 광물, 이야기 그리고 추억을 실어 날라 세상으로 내보내요.
보는 사람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카일리 매닝의 황홀한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 다채로운 빛의 활용, 독특한 구성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저의 모든 작품은 즉흥적이고, 관람객 개개인이 발견하고 파헤쳐야 하는 대상이에요. 추상적 흔적 속에서 인물 형상이 유령처럼 발현되면 그것을 더 드러내 부각하기도 하고, 신체라는 개념의 등장이 오히려 더 추상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흔적을 부여하기도 해요.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의 색채 이론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작품은 종종 색에서 출발하고, 그 색조가 모든 결정에 파급 효과를 미쳐요. 정반대 색채 사이에서 비롯한 떨림이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고 창작 과정에 스릴을 더하죠.

The Nature of Nature, Oil on Linen, 243.8×604.5cm(243.8×203.2cm, 243.8×203.2cm, 243.8×188cm each), 2024. Courtesy of Pace Gallery ©Kylie Manning.
색감과 표현뿐 아니라 크기도 압도적인 대형 회화를 많이 선보였어요. 알래스카와 멕시코 해안에서 광활한 풍경을 보며 자랐어요. 거대한 공간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인상과 감정을 그림에서도 전하고 싶어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연상케 하는 스케일을 좋아해요. 여성이 이렇게 광활한 공간을 차지하고, 마초주의나 쇼비니즘과 대면하는 듯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여행하며 빛이 장소마다 매우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각 그림마다 특정 시간대와 위도를 담아냈어요. 관람객이 독특한 빛의 굴절을 더 깊이, 개인적으로 체험했으면 해요.
작품에서 즐겨 다루는 모티브가 있나요? 양성성(androgyny)은 제가 자주 돌아보는 주제예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드러나는 건 아니라고 느꼈어요. 사회적 학습으로 인한 무의식적 성 편견을 생각하게 됐죠. 성별을 제거함으로써 관람객 개개인이 작품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장을 열고 싶어요.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요? 그리스어로 시간, 기회를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크로노스는 측정할 수 있는 무자비한 선형 반복을, 카이로스는 수확기처럼 적절한 순간이나 계절을 의미해요. 카이로스는 현재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나간 순간을 아련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과정을 뜻하기도 하고요. 젖은 물감이 캔버스를 따라 흘러내리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구도를 찾기 위해 서둘러 작품을 제작해요. 이렇게 탄생한 작품은 시간에 쫓기는 대신 시간을 품었다가 흘려보내듯 혼돈 속에서 평화롭게 머무르는 인물의 군집을 연상시켜요.
마지막으로, 이번 개인전을 찾은 관람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요? 관람객이 객관성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그림 사이를 거닐며 마치 작품과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프리즈 서울 기간에 한국의 뛰어난 안무가 이경은이 설치 작품 사이에서 새로운 춤을 선보이며 객관성의 무너짐에 관한 담론을 다룰 예정이에요. 안무가의 춤이 전시장의 베일과 어떻게 상호작용할지 기대됩니다. 관람객에게도 천둥번개와 같은 순간이 되리라 믿어요.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제 설렘이 관람객에게도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린 가장 야심 찬 작품을 선보일 건데, 전시를 찾아주신 분들도 제가 창작하며 느낀 짜릿함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글 백아영(프리랜서)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페이스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