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극한 그리고 자유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리는 전시
살보 1947년 이탈리아 레온포르테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성장한 살보는 라파엘의 회화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아르테포베라와 개념미술의 영향을 받으며 작업했고, 1973년에는 회화로 돌아가 그의 풍경화 시대가 열렸다. 2015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글래드스톤 갤러리(Gladstone Gallery)와 페로탕 갤러리(Perrotin Gallery) 등 저명한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가슴속 울림과 열망을 담아 몽환적 색감에 시간을 새겨 넣은 이탈리아 출신 회화 작가 살보(SALVO, Salvatore Mangione, 1947~2015). ‘가을,’ ‘4월’ 같은 단조로운 제목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계절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가령 그의 작품 ‘어느 저녁(Una Sera)’은 되풀이되는 수많은 저녁 중 하나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모든 것이 다른 유일한 저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과 시간의 흐름에 몰두해 색채를 극한에 가까울 만큼 자유롭게 풀어낸 작품에 담긴 살보의 강렬한 열망은 시대를 아우르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살보는 1947년에 이탈리아 레온포르테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성장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다채로운 색감의 풍경화지만, 이는 한 번의 큰 전환 이후 확립된 화풍이다. 그가 활발히 활동한 1960년대 후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변의 시대로, 정치적 · 경제적 변화와 물질주의에 대한 반발이 만연한 사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상업화에 반대하며 기존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 운동이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 미술계의 주류로 떠올랐다.
1968년 9월 살보는 파리에 머무르며 학생 시위를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체감한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살보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르테포베라 전위예술가 그룹과 함께 활동한다. 주로 자기 자신을 소재로 작업한 이 시기에 그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완성한 작품 중에는 아르테포베라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회화 작품도 있지만, 사진 또는 대리석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다.
대표작으로는 이탈리아 국기 색으로 자신의 이름 ‘SALVO’ 혹은 ‘나는 최고다(Io sono il migliore)’ 같은 문구를 새긴 개념적 묘비 작품이 언급된다. 아르테포베라와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에서 대두된 개념미술은 기존 미술 형식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관념, 아이디어가 예술의 본질임을 표명했다. 그와 동시대에 작업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로는 작업실을 같이 사용할 정도로 절친한 이탈리아 개념미술가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와 미국의 솔 르윗(Sol LeWitt), 로버트 배리(Robert Barry),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등을 꼽을 수 있다. 살보는 1972년 독일 카셀에서 열린 ‘도쿠멘타 5’에서 세계적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에게 발탁되며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3년, 살보는 ‘회화로의 복귀’라는 예상 밖의 선언을 하며, 본격적으로 구상회화 작품 활동에 돌입한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르테포베라 운동과 개념미술이 미술계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전통적 회화로 돌아선 그의 선택을 파격으로 받아들였다. 언뜻 다소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처음 미술을 시작한 계기 그리고 피카소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어릴 적 살보는 라파엘의 자화상 작품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리고 다양한 거장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살보는 열여섯 살에 토리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영감을 받아 그린 목탄 스케치를 전시하며 작품 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이처럼 고전적 회화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꿈을 키운 만큼 그는 회화에 애정이 있었고, 첫 마주침의 울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한편, 사회적 흐름과 당대의 예술 사조를 받아들이며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다양한 담론 속에서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살보에게 1973년 피카소의 죽음이라는 비보가 전해진다. 피카소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동시에 잠자고 있던 구상회화에 대한 열망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살보는 “이제 그만! 라파엘을 계승해야 할 때!“라고 외치며 전통적 회화로 방향을 틀게 된다.
1980년대에 이르러 살보의 구상회화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한다. 특히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색감이 돋보인다. 햇빛과 구조에 따른 색의 변화를 밝고 채도가 높은 색을 활용해 계절별, 시간대별 자연광을 탁월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생동감 넘치면서 초현실적인 화풍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는 단순화한 구조의 실내, 네온사인과 거리의 가로등 불빛 등 도시의 밤 풍경에 주목하는 한편, 교외의 건축물과 자연을 모티브로 한 풍경화를 활발히 그리기도 했다. 이렇듯 색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간 살보의 스타일은 라파엘, 들라크루아, 에드바르 뭉크의 팔레트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열렬한 여행가이자 탐험가이기도 한 살보는 시칠리아를 비롯해 그리스, 터키, 오만, 이집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했고, 그가 깊이 존경한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공간에서 영감을 받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살보의 스타일은 한 차례 대전환을 겪었음에도 항상 국제적 갤러리와 수집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에 대해 이번 전시 〈The Art of Salvo: Echoes between〉을 기획한 플로우(FLOW)의 임정애 대표는 살보 재단과 아카이빙의 철저함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박서보재단과 일본의 요시토모 나라를 예로 들며, 작가가 걸어온 길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이자 훗날 작품이 계속해서 명명되고 공증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에 재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살보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몸담은 시대의 다양한 영감을 내재화하고, 더 나아가 다음 세대의 표상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즉 살보는 앞서 언급한 여러 예술가의 영향을 받고, 또 시대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작가다. 2015년 생을 마감한 후에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동시에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 니콜라 페코라로(Nicola Pecoraro), 조너선 몽크(Jonathan Monk) 같은 후대 미술가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회자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살보의 작품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린 풍경화로, 그가 오랜 시간 천착한 주제와 빛에 대한 연구 결과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빛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관심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봄(Primavera)’, ‘가을(Autunno)’, ‘겨울(Inverno)’ 등 계절을 뜻하는 제목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강조했다. 그는 또 밝은 색상을 사용해 낮과 밤 다른 시간대에 보이는 고전적 건축물과 기둥의 환상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전시작 중 하나인 ‘어느 저녁’은 바다와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하늘의 색 변화와 자연의 형태를 통해 고요하면서 신비로운 저녁의 느낌을 담아낸 작품으로, 살보의 초현실적 풍경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살보의 영향을 받은 작가 중 한 명인 니콜라스 파티는 그 색감과 결을 같이한다. 1980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니콜라스 파티는 회화와 조각, 벽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다. 근현대 미술사와 다양한 문화권의 전통적 상징을 연구하고 많은 작가와 양식, 재료 등을 독자적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파티는 잊힌 파스텔화를 연구하고 재조명했다. 공기에 의해 지워지기 쉬워 영구적이지 않은 파스텔의 재료적 특징에 주목했다. 더불어 유년 시절 그라피티를 그린 경험을 바탕으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대규모 벽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풍경, 정물, 초상 등 전통 회화 장르를 재조명해 새로운 인식과 경험을 전하고 있으며, 2025년 1월 19일까지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를 개최한다.
파티의 출품작 ‘초상화(Portrait)’는 피카소의 1921년 파스텔 작품 ‘여인의 두상(Tête de Femme)’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 구도와 얼굴의 이목구비, 음영 기법을 통해 살보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파티가 그린 초상화 속 인물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성별이나 성격 등 작품에 등장한 인물의 특성 중 그 어떤 것도 유추하기 어려운 파티의 초상화는 도식적으로 표현해 감상자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치 파스텔로 분장한 것 같은 초상화 속 인물을 보면 파티가 주목한 것은 정체성을 가리고,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화장의 의미가 아닐까 유추할 수 있다. 화장과 그루밍이 계속해서 관심을 받는 오늘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고 변화시켜나가는 우리의 초상에서 파티가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echo)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정희윤(heeyoon114@noblesse.com)
사진 이시우(전시 작품), 살보 아카이브, 데프 아트 갤러리, 호암미술관, 크리스티 옥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