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로 재구성하는 예술적 신체
퍼포먼스 아티스트 스텔락에게 기술은 신체를 확장하는 열쇠다

Ear on Arm, Portrait of Stelarc. Courtesy of the Artist.
그간 기술을 통해 신체의 개념을 확장해왔어요. 인간 신체의 ‘본질’을 무엇으로 정의했나요? 그리고 왜 기술이 이를 넓힐 수 있다고 믿었나요?
몸은 문화, 사회, 기술의 총체로 형성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불안정하면서도 역사적인 구성체라고 할 수 있죠. 우리 인류는 유전자적 잠재력과 독특한 생리학적 움직임, 지각과 감각, 높은 뇌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내재된 본질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기술이 이제 몸의 외부 기관이 되었다고 지적했어요. 부드러운 속성을 가진 생물학적 몸으로 지금까지 진화해왔다면, 앞으로는 정밀하고 강력한 기계와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를 더욱 성장하게 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몸은 공간을 뛰어넘어 확장할 수 있는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것 같아요. 비어 있음에 결핍을 느끼고, 한계를 넘어보려 방법을 찾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신체는 그저 도구라고 여기는지, 아니면 신체가 예술 그 자체로 기능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말하는 몸은 생리적으로, 또 현상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인식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마음과 뇌, 자아와 몸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식 이분법과는 다르죠. 퍼포먼스를 펼치면 펼칠수록 점점 더 제가 독자적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의미의 마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해요. 늘 몸을 하나의 객체로 언급해왔죠. 재설계해야 하는 객체로 말이에요. 이는 주체와 대비되는 객체가 아니라 도구, 기계, 알고리즘, 미생물 그리고 기타 네트워크 등 다른 객체와의 상호작용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는 몸입니다. 쉽게 말하면 ‘평평한 존재’죠. 객체는 그 구성 요소로 환원될 수 없고, 서로의 관계나 효과로만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객체로서 몸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때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접근 불가능성 때문에 예술 작품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불완전한 몸, 구식(舊式)이 된 몸으로 인식된 신체는 예술가에게 ‘반성’의 주체가 되어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럼 우리 몸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간단해요. 우리가 매일 먹는 고기, 가지고 다니는 기계와 이를 작동하는 소프트웨어가 현대인의 몸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네요.

Sitting / Swaying, 1980, Event for Rock Suspension, Tamura Gallery, Tokyo. Photo by Keisuke Oki.

City Suspension, 1985, Above the Royal Theatre, Copenhagen. Photo by Harold Rumpf. © Stelarc.

Third Hand, 1980, Tokyo, Yokohama, Nagoya. Photo by Anne Wilmot. © Stelarc.
인간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확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을 때 신체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나요?
일상적 수준에서도 우리 신체의 자율성에는 문제가 있어요. 우리 모두 개별적 몸으로 주체성을 갖지만, 복잡한 네트워크 생태계에 깊이 몰입해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 행동은 습관적이고 제약이 있으며, 본인이 속한 문화와 사회는 물론 교육 환경에 의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수많은 표지판, 소리, 색과 빛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극과 경고를 받으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죠. 이를 살펴보면 몸은 이제 도구와 기계,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증강되고 확장되어 점점 더 복잡한 환경에서 통제를 받습니다. 자기 의지 없이 수행하고 자동화되는 일종의 좀비이자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비자발적인 것과 자동화된 것을 구별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제할 수 없는 신체’와 ‘통제할 수 있는 신체’의 개념은 작업에서 어떻게 충돌하거나 조화를 이루는지 알려주세요.
모든 프로젝트와 퍼포먼스 작품은 몸의 구현 방식, 주체성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몸과 기계의 복잡다단한 상호작용과 피드백 시스템에서 누가 무엇을 통제하는지 묻는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는 하이브리드 인간-기계 시스템은 공생적 관계입니다. ‘스틱맨(Stickman)’, ‘엑소스켈레톤(Exoskeleton)’ 같은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일 때 제 몸은 일종의 ‘빙의된 몸’이자 ‘공연하는 몸’이 됩니다.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지만, 한쪽 다리는 자유로워서 균형을 잡고 회전하며 그림자를 수정하고 투사된 비디오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비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주체성을 투영할 수 있죠. 인터랙티브 시스템, 즉 기술에 의해 연결되어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작업을 진행합니다. 객체가 되어 단지 상호작용이 가능한 하나의 요소란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네요.
그렇다면 ‘예술적 표현’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 개인의 독특한 표출 방식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직관적이고 즉각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특정 기술을 요구하는 체계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개념과 미학 등을 활용한 여러 접근 방식을 택할 수 있죠. 예술은 때론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도 하고, 심지어 외설스러울 수도 있죠. 누군가를 치유하기도 하고요. 또한 현재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하죠. 일부 철학자는 예술가를 사회 변화를 알리는 ‘조기 경보 시스템’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우발적이고 논쟁적인 미래를 만들어내는 걸 제일 잘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예상치 못한 만남이나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거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예술적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기술적 실패나 신체의 거부 같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어떻게 수용하시나요?
일평생 실패로 커리어를 쌓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도 제가 처음에 상상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때로는 기술의 부재나 새로운 기술의 출현, 혹은 부족한 전문 지식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예산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패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저는 예술을 통해 의도와 실제 결과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끄러짐’에 관해 말하고 싶어요. 이는 예상치 못한 것과 우연한 것을 통합할 수 있게 합니다. 미끄러짐의 영역은 예술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하죠. 이것이 결여된 예술 작품은 큰 의미가 없고,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죠. 예술은 우리의 감수성을 조정하거나 향상시켜 감흥을 만들어냅니다. 1976년에 ‘제3의 손(Third Hand)’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일본의 한 예술가는 “하이테크지만 낮은 수준의 예술(High-tech, low art)”이라고 평하며 경고했습니다. 이들의 비평에도 일리가 있죠. 하지만 예술가라면 항상 새로운 미디어의 창의적 가능성에 호기심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며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목적으로 또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늘 장치나 게임 엔진처럼 우리 몸도 해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Photo by Anthony Figallo. © Stelarc.

Photo by Igor Skafar. © Stelarc.

Photo by Polixeni Papapetrou. © Stelarc.
최근 런던에서 선보인 ‘확장된 팔과 센서 팔찌(Extended Arm and Sensor Bracelet)’ 퍼포먼스에서 신체 확장을 위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셨는데, 이 작업을 통해 특별히 탐구하고자 한 신체의 가능성은 무엇인가요? 관람객이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통찰을 얻길 기대하셨나요?
예술은 특정 메시지를 상대에게 강요하기보다, 미학적 경험과 감흥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언급한 작품은 에어컴프레서을 이용해 제 오른팔을 원숭이처럼 길게 늘어나게 합니다. 이는 각 손가락과 손목의 굴곡과 회전에 따라 분절이 가능하게 하죠. 저는 이를 독특한 ‘인간형 조작기(human-like manipulator)’라고 부르죠. ‘센서 팔찌’에는 사운드 칩과 센서 시스템이 있어 소리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손과 팔의 움직임으로 음정과 소리의 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압축공기의 소리와 손가락의 클릭 소리는 센서 팔찌의 소리에 의해 증폭되고, 이는 공연의 소리가 되어 관람객이 감각을 풍부하게 사용해 감상하도록 이끕니다. 공연은 5분 만에 끝날 수도 있고, 5일 동안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이 작품은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음을 알리고 싶어요. 비록 불확실성을 안고 떠날 수 있긴 하지만요.
9월에는 현대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루는 포럼의 일환으로 한국 광주에서 공연했습니다. 이 공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에서 ‘소닉 레저넌스(Sonic Resonance)’라는 작품을 선보였죠. 작은 손목 카메라, 보디 카메라, 로봇 팔을 올려다보는 카메라, 로봇 팔 끝에 부착해 동적인 비디오 피드백을 만드는 카메라 등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머리와 팔에 부착한 인터랙티브 센서 시스템을 통해 몸은 라이브 비디오 스위처(switcher)이자 믹서(mixer)가 되어 갤러리 공간의 모든 벽에 이미지를 투영했습니다. 로봇 팔은 미리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몸을 스캔했지만, 오른팔을 들어 올리면 로봇 카메라로 전환해 회전, 팬 & 틸트 동작을 제어할 수 있게 했죠. 사운드스케이프에서는 심장박동 소리와 근육의 움직임으로 증폭시킨 신체 신호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오른손으로 타악기 소리를 만들어내 심장박동과 동기화되거나 대조를 이루게 디자인했죠. 이를 통해 관람객이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신의 퍼포먼스를 보는 관람객은 ‘신체’와 ‘자아’에 대해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 작품은 우리가 경험과 행동을 공유하고, 이를 원격으로 소통하고 협업한다는 사실을 꼬집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물리적 신체로, 온라인에서는 유령 같은 몸으로 기능합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 경계가 점점 흐려지면서 두 세계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제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작지만 스트리밍되고 재조합된 ‘주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겁니다.

Propel: Body and Ear on Robot Arm, 2015, DeMonstrable: Autronics / Lawrence Wilson Gallery, Perth. Photo by Steven Alyian. © Stelarc.

Reclining StickMan, 2020, Monster Theatres, Biennial of Australian Art, AGSA, Adelaide. Photo by Saul Steed. © Stelarc.

Sonic Resonance: Event for Heart, Muscles and Breath, Video Stills, 2024, UNESCO Creative Cities of Media Art Forum, G.MAP, Gwangju 2024. © Stelarc.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스텔락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