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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나아갈 길

LIFESTYLE

예술과 교육. 경직된 사회를 변화시킬 막강한 힘을 지닌 이 두 단어를 가슴에 품고 오랜 시간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온 이가 있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말하는 예술 교육의 힘에 대하여.

세계적 위상을 떨치고 있는 K-컬처의 요람 역할을 해온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문화 예술 분야의 천재들이 모이는 학교’로 알려진 이곳은 문화평론가 출신 고(故)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기획하고 제안해 1992년 이강숙 초대 총장의 지휘 아래 설립된 국립예술학교다. 기존 예술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적 커리큘럼으로 특히 유명한데,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입시 과정, 실전과 경험에 초점을 맞춘 수업, 예술계 최전선에서 활동 중인 교수진 등을 통해 국내 예술 교육의 패러다임을 새로 쓴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술원 입시장에 석고상을 배치하는 대신 살아 있는 염소를 풀어놓거나 첼리스트의 연주를 들려준 일화는 전설로 남았고, ‘국내 교육만으로 국제 콩쿠르에서 성과를 내는 인재를 배출한다’는 개교 초기의 막연해 보였던 포부는 손열음, 김선욱, 문지영, 임윤찬 등 세계적 아티스트의 활약으로 현실이 됐다.
한예종은 현재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 예술원까지 총 6개 예술 분야의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원마다 교수진은 물론 졸업생의 면면이 워낙 화려해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 앞서 언급한 피아니스트를 비롯해 영화계의 나홍진·장재현 감독, 김고은·이제훈·박정민 배우, 근래 세계 무대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 발레리노 김기민·전민철, 발레리나 박세은·이예은 등이 모두 한예종 출신이다.
2021년부터 이 특별한 학교를 이끌고 있는 김대진 총장은 1994년 음악원 교수로 처음 강단에 선 후 30년 이상 한예종에 몸담아왔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콩쿠르를 휩쓴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창원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여수음악제 음악감독 등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강숙 초대 총장이 학생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히든 커리큘럼’으로 특별히 신경 써 섭외한 교수 중 한 명이던 그는 혼란했던 개교 초창기부터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아티스트들을 대거 배출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재능 있는 학생들 곁을 지켰다. ‘제대로 예술하는 예술 학교’를 강조하며 한예종의 새로운 챕터를 써 내려가는 김대진 총장을 만나 지금 시대 예술가에게 필요한 자질,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화 예술의 본질적 힘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21년 한예종 역사상 처음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총장으로 선출되었어요. 4년 임기 중 마지막 새 학기를 앞두고 계신데, 근황과 소감이 궁금합니다. 총장으로서 임기가 끝나는 때가 교수로서 정년 시점이라 이번 3월 입학식이 제가 현업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신입생이네요. 졸업식은 2월 말 외에 8월 말에도 한 번 더 있으니 두 번이 남았고요. 사실 아직 실감이 나진 않아요. 지난 3년 반 동안 특별히 이룬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하지만 한편으론 꼭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교육 정책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일인 만큼 시행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초대 총장님 시절부터 학교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방향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시대가 변화하며 바꾸거나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을 학교 구성원 모두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취임 당시 ‘제대로 예술하는 예술 학교’를 강조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재능 많은 학생들이 가능성과 열정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입니다. 요즘 예술 교육계의 가장 큰 화두는 ‘창의력’이에요.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려면 창의력과 개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죠. 한데 과연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학교는, 선생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았어요. 수많은 요소가 얽히고설켜 융합될 때 전혀 새로운 무언가 만들어지고, 창의력과 개성이 발현되곤 하죠.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다양한 경험입니다. 학교는 이 경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예종에는 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 예술 여섯 가지 다른 장르 예술이 모여 있는데, 이런 학교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일 것입니다. 예술을 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본인의 장르에 오롯이 집중하게 되다 보니 다른 장르를 살피기가 쉽지 않거든요. 만나기 힘든 예술 장르가 한곳에 모인 만큼 서로 융합해 시너지를 일으킬 기회를 만드는 데 신경 쓰고 있습니다.
1994년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 이후 손열음, 김선욱, 문지영 등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을 지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 모두가 참 특별했던 것 같아요. 손열음의 경우 첫 국제 콩쿠르에 나갔는데, 발표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기에 본선에서 떨어진 줄 알았어요. 한데 한참 후 전화가 와서 1등을 했다는 거예요. 왜 연락이 늦었느냐고 물으니 잠자느라 발표할 때 현장에 가지 못했대요. 그 상황에서도 잠이 올 만큼 배포가 큰 친구였던 거죠. 문지영은 입학 전까지 주변 환경이 피아노를 연습하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고 해요. 첫 레슨에서 ‘더 일찍 학교에 오지 그랬냐’고 했더니 이전 해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영재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죠.(웃음)
영재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특히 문화 예술 영역에서 그들의 활약은 대단하죠. 때문에 한예종 역시 별도로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을 운영하며 영재의 발굴과 지원에 앞장서고 있고요. 영재를 알아보는 총장님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여러 면을 종합해 판단하지만,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영재는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영재성이 튀어나오는 아이가 있고, 발현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도 있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영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겁니다.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 능력을 갖고 있어요. 모든 것을 습득해 자기 걸로 만든 뒤 배운 것을 그대로 풀어내는 수재와는 또 다르죠. 영재성을 알아보고 이끌어내는 것은 개인에게도, 문화 예술계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에는 한예종 개교 30주년을 맞아 ‘공명의 시간’을 강조하셨어요. 이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와 앞으로 비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19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1998년까지 한예종의 6개 원이 순차적으로 개원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우리가 대학인가, 학원인가?’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결국 학교를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실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실제로 예술을 해내는 학교여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교수와 학생 모두가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리고 2000년대 초, 손열음의 국제 콩쿠르 수상 등을 통해 한예종의 교육 방식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이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끼리만 너무 갇혀 있던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이제는 문을 열고 사회와 더 많이 연결되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이를 위해 타 대학과 교류를 늘리고 외부 기관과의 협업도 강화하고 있죠.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예술가와 소통하고 공명하는 것이 한예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교수와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겪은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예술가로서 한 학생의 인생이 나의 말과 행동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우면서도 보람된 일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한때는 학생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반드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자들이 졸업 후 꾸준히 성장하며 결국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예술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서둘러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능적으로, 음악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가만히 보면 선생도 시기마다 각자 역할과 사이클이 있는 것 같아요. 젊은 교수들은 학생과 함께 성장하고, 저 같은 시니어 교수가 되면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에 더 익숙해지는 것 같거든요.
‘좋은 아티스트’와 ‘좋은 스승’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좋은 스승이란 학생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인 것 같아요. 스승은 학생의 장점과 단점을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건강검진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듯, 학생이 자기 가능성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하죠. 때로는 스승이 학생보다 먼저 그 가능성을 알아보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예술가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성장하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진단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한편 좋은 아티스트는 결국 ‘이것이 나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술가에게는 각자 사이클이 있고, 같은 곡도 나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죠. 기능적인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람만의 특별한 개성,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예술가는 자신만의 비밀 병기가 있어야 하고, 스승은 그것을 발견하고 길을 열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총장님께 영향을 미친 스승이나 롤모델이 있나요? 그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요? 현재 상황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강숙 초대 총장님이 떠오르네요. 서울대학교 교수로 지내던 시절부터 인연이 깊었고, 저를 한예종에 불러 강단에 서게 한 분이죠.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신 말씀 중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분께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참아라’입니다.(웃음)
급변하는 예술 환경 속에서 미래 예술가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예술에는 정답이 없는데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에는 한국 학생들이 국제 콩쿠르에서 비슷한 연주 스타일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어요. 주입식 교육의 영향이었죠. 하지만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고, 스스로 표현하는 힘입니다. 한예종의 입시도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어요. 단순히 기교가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능성을 지닌 원석을 발견하는 데 집중하죠. 미래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획일적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고 성장하는 힘입니다.
잠재된 창의성과 개성을 발견하거나 일깨우는 방법이 있을까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재능이 있지만 끝내 발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재능이 없는데 포장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를 제대로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특히 지역을 다니면서 숨어 있는 재능을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죠. 지금까지 예술 교육이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재능 있는 아이들을 더 세심하게 발굴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퇴임 후 이런 프로젝트를 직접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예술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음악과 예술은 사회를 부드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감정을 순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화가 나고 지쳐 있는 시대에 예술이 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클래식 음악도 더 많은 사람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가 필요합니다. 길거리 공연이나 방송 프로그램,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음악 교실 등이 모두 좋은 예죠.
한예종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길 바라시나요? 한예종이 60주년이 되면 한국 학생과 외국 학생의 비율이 비슷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흔히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려면 영어 강의를 늘려야 한다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K-팝을 좋아하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듯, 예술을 배우기 위해 한예종을 찾는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환경이 조성될 거라고 믿거든요. 초대 총장님이 한예종을 ‘유학 갈 필요 없는’ 학교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유학 오는 학교’가 될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에서만 교육받아도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이미 충분히 증명했으니까요. 세계적 아티스트를 배출하는 것을 넘어 해외 인재들이 배우러 오는 곳, 그리고 그들이 다시 예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곳으로 발전해가길 바랍니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사진 김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