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파리에서 만난 두 명의 프리다

ARTNOW

프리다 칼로는 1939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리 여행을 떠난다.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앙드레 브르통의 초청으로 떠난 이 여행에서 예술가 프리다 칼로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Frida Kahlo, Las Dos Fridas, Oil on Canvas, 173.5x173cm, 1939. Courtesy of Museo de Arte Moderno.

만 레이가 1930년 촬영한 메리 레이놀즈.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rchives, Mary Reynolds Collection, Gift of Marjorie Watkins, October 1992.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1931년에 메리 레이놀즈의 자택에서 촬영한 브랑쿠시와 뒤샹, 메리 레이놀즈.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Gift of Frank B. Hubachek. © Succession Brancusi – All Rights Reserved (ARS) 2024.

‘두 명의 프리다(Las Dos Fridas)’(1939)는 프리다 칼로(1907~1954)가 처음으로 제작한 대규모 회화(가로세로 약 173cm)로,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International Exhibition of Surrealism)〉에서 처음 선보인 이래 지금껏 그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제목 그대로 화면에는 두 명의 프리다 칼로가 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왼쪽의 프리다는 레이스가 달린 흰색 빅토리아풍 드레스를, 오른쪽의 프리다는 멕시코 테우아나(Tehuana) 지역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마치 투시하듯 몸 밖으로 보이는 두 개의 심장은 혈관으로 이어져 있으며, 두 명의 프리다 역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유럽의 프리다와 멕시코의 프리다. 둘이면서 또한 하나인 프리다. 이는 그녀의 독일계 아버지와 모계의 멕시코 혈통을 상징할 뿐 아니라, 당시 아메리카 대륙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던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면서 한편으로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적 예술가로 성장하던 그녀의 양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시 생애 처음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난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앙드레 브르통이 조직한 전시 〈멕시코(Mexique)〉에서 작품을 선보여 피카소와 칸딘스키, 호안 미로 등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열렬한 찬사를 끌어냈고, 멕시코로 돌아와선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했다. 모두 이 작품을 완성한 1939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비로소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프리다 칼로’로 불리게 되었다.

왼쪽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한 프리다 칼로의 초상 사진. Nickolas Muray, Frida with Blue Satin Blouse, Carbon Pigment Print, 1939. Licensed by Nickolas Muray Photo Archives. © Nickolas Muray Photo Archives.
오른쪽 Frida Kahlo, Le Cadre, 1938. Centre Pompidou, State Purchase, 1939. © 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 Mexico, D.F. / ADAGP, Paris. Digital Image © CNAC / MNAM, Dist. RMN-Grand Palais / Art

무채색 도시와 총천연색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가 프랑스 파리로 떠난 것은 1939년 1월의 일이다. 뉴욕 쥘리앵 레비 갤러리(Julien Levy Gallery)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대서양을 건너는 호화 유람선 SS 파리 트랜스애틀랜틱 라이너호를 타고 1월 21일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앙드레 브르통의 아내 자클린 랑바(Jacqueline Lamba)와 피카소의 파트너이자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Dora Maar)가 마중 나와 있었고, 그들은 기차를 타고 생라자르역으로 향했다. 프리다 칼로가 파리에 머문 기간을 그린 책 〈The Heart: Frida Kahlo in Paris〉에서 저자 마르크 프티장은 그녀가 파리에 도착한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회색과 검은색, 베이지색 옷을 입고 기차 플랫폼에 서 있던 모두가 올리브색 피부에 깊고 검은 눈, 머리에 꽃을 꽂은 채로 놀랍도록 화려한 멕시코 전통 의상 차림의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앙드레 브르통에게 프리다는 “당신이 나를 원해 이곳에 오게 되었고, 나는 여기에서 유명해질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파리에 머문 초창기 삶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브르통과 랑바는 프리다를 퐁텐 거리 42번지에 있는 그들의 스튜디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브르통의 온갖 수집품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많은 것이 유명한 라 카사 아술(La Casa Azul), 지금은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운영 중인 디에고와 프리다의 저택에 브르통 부부가 머물던 시절 사 모은 멕시코의 민속공예와 예술품이었다. 부부는 엉망진창인 스튜디오 구석에 그들의 네 살짜리 딸이 쓰던 작은 침대를 내놓으며 여기서 지내면 된다고 말했다.
프리다는 그런 그들의 처우를 믿을 수 없었다. 멕시코 저택에서 자신이 그들에게 베푼 환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유칼리나무와 열대식물이 우거진 정원에 건축가이자 벽화가인 후안 오고르만(Juan O’Gorman)이 설계한 두 채의 현대적 건물이 자리한 라 카사 아술을 방문한 브르통 부부에게 프리다는 해변을 바라보는 큰 창문이 있는 널찍한 방과 함께 그들이 머무는 동안 시중 들 요리사와 집사를 붙여줬다. 그곳에서 프리다의 그림을 처음 본 앙드레 브르통은 “당신이야말로 초현실주의적 여성”이라고 찬탄하며 전시를 주선할 테니 파리로 꼭 오라고 그녀를 초청했다.
하지만 프리다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여긴 적이 없다. 그녀가 그린 건 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상 파리에 도착해보니 브르통 부부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스튜디오 한구석과 딸이 쓰던 낡고 작은 침대를 내주었고, 약속한 전시 역시 프리다의 개인전이 아니라 브르통이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이상을 멕시코에서 수집한 이국적 소장품을 통해 선보이는 전시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멕시코에 머무르던 시절 브르통은 환상적인 프리다의 작품과 사실적인 디에고의 작품을 비교하며 “폭탄에 매단 리본”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리본은 본질이 아닌 장식일 뿐이다.
브르통은 프리다도, 프리다의 작품도 진지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뉴욕에서 만난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Nickolas Muray)에게 보낸 편지에 프리다는 “내가 도착했지만 한참 전에 보낸 작품들은 아직도 세관에 묶여 있어요. 브르통이 그걸 찾으러 갈 시간조차 내지 않았기 때문이죠”라고 썼다. 더불어 브르통과 그 주변을 맴도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위선에 신물이 났다. “그들은 빌어먹을 만큼 ‘지적’으로 부패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파리의 자칭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시장에서 토르티야나 구워 파는 게 낫겠어요.”
마침내 프리다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브르통의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온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한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조언에 따라 박물관 근처 호텔로 옮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고,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의 진단명은 신장염이었다. 프리다는 평생 질병을 안고 살았다. 여섯 살 무렵 척수성소아마비의 발병으로 오른쪽 다리가 발달하지 못해 평생 절뚝이며 걸어야 했고, 열여덟 살에는 치명적 교통사고로 서른두 번이나 외과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를 꿈꾸며 공부하던 프리다는 그 사고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고, 아버지에게 부탁해 침대 위에 거울을 설치하고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신체와 경험, 고통을 그렸다. 평생에 걸쳐 그린 200여 점의 작품 중 자화상이 무려 55점에 달한다. 이는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렘브란트(47점)와 반 고흐(37점)를 능가하는 양이다.

Frida Kahlo, Árbol de la Esperanza ‘Tree of Hope’, Oil on Masonite, 56×40.6cm, 1946. Photo by Nathan Keay. Courtesy of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 © 2024 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 Mexico, D.F.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제책사로서 메리 레이놀즈가 남긴 작품, ‘Ubu Roi’(1925).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ary Reynolds Collection, Ryerson and Burnham Libraries.

디에고 부인이 아닌 프리다 칼로
고통스러운 파리 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은 마르셀 뒤샹과 그의 파트너이자 제책사(bookbinder)인 메리 레이놀즈(Mary Reynolds)의 방문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프리다의 이야기를 들은 뒤샹은 세관에 연락해 그녀의 작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월터 휘트먼의 시를 계기로 금세 친해진 메리 레이놀즈는 프리다가 병원을 나와 자신의 저택에 머무르도록 배려했다. 콩스탕탱 브랑쿠시, 알렉산더 콜더, 이브 탕기, 장 콕토 등 당대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담소를 나누던 그곳에서 프리다는 마침내 안정감과 건강, 특유의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수선한 브르통 부부의 스튜디오와 달리 고양이 여러 마리가 정원을 거니는 메리 레이놀즈의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프리다는 만 레이(Man Ray)가 여장한 마르셸 뒤샹의 또 다른 자아, 에로즈 셀라비(Rrose Selavy)를 촬영한 흑백사진을 발견하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한 사람의 두 자아.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서 자신과 예술가로서 자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녀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멕시코로 돌아간 후 ‘두 명의 프리다’를 작업한다.
메리 레이놀즈의 저택에 머물던 3월 9일 오후, 앙드레 브르통이 기획한 〈멕시코〉 전시가 마침내 막을 열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17점과 함께 마누엘 알바레스 브라보(Manuel Álvarez Bravo)의 사진 작품과 멕시코 민속공예품 100여 점, 19세기 멕시코 회화 21점을 선보이는 전시. 유럽에 처음 소개한 프리다의 작품에 당대 예술가들은 열광적 반응을 보였다. 피카소는 손바닥 모양의 귀고리를 선물했고, 거의 눈물을 흘릴 듯 감격한 칸딘스키는 프리다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고 한다. 당시 칸딘스키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멕시코 예술을 다룬 전시에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그린 작품이 있었는데, 매우 초현실적인 분위기였다. 그림과 더불어 그녀가 입은 멕시코 전통 의상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입고 다닌다고 하는데, 거기에 많은 세련된 여성이 있었지만, 멕시코 전통 의상에 견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칭하지만, 당시 앙드레 브르통과 전시를 공동 기획한 미셸 프티장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만난 프리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곳에서 나는 리베라 부인이 아니에요. 프리다 칼로라고 불러주세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쟁의 암운이 드리운 유럽에서 컬렉터들은 좀처럼 그림을 구매하지 않았다. 이 전시를 통해 판매한 유일한 작품은 ‘액자(Le Cadre)’로,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컬렉션에서 구입했다. 유럽 미술관이 소장한 유일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자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기 전 프랑스 정부의 마지막 미술품 컬렉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1970년대에 발견되어 현재 퐁피두 센터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프리다는 〈멕시코〉 전시가 막을 내린 3월 25일, 파리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간다. 두 달에 걸친 파리 여행은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에 큰 전환점을 남겼다. 디에고 없이 처음으로 홀로 여행했고, 작품을 판매했으며, 국제적 전시를 통해 아티스트와 비평가,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때 얻은 명성은 프리다가 훗날 작품 판매로 재정적 독립을 이루는 단초가 되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프리다 칼로로, 초현실주의 예술의 일부가 아닌 자신의 현실을 그리는 독자적 예술가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한 그녀의 파리 시절과 메리 레이놀즈와의 우정을 그린 전시 〈Frida Kahlo’s Month in Paris: A Friendship with Mary Reynolds〉가 3월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에서 열린다.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