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만나는 낭만적인 발레공연
우아함과 낭만, 발레의 계절

Photo by Kyoungjin Kim. ⓒ Universal Ballet.
묵직한 두 개의 문을 열고 눈부신 조명이 드리워진, 먼지 냄새 퀴퀴한 극장으로 들어서는 일. 공연을 보기 위한 여정은 현실을 떠나,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발걸음하는 일이다. 한 치 앞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새카만 어둠이 두 눈의 시야를 완전히 잠식할 때, 수많은 생각으로 꺼지지 않던 머릿속 불빛을 강제로 소등시킬 때, 극장 예술의 장치들은 비로소 우리를 낭만의 세계 앞으로 데려다준다.
발레는 본디 우아함과 낭만으로 점철된 춤이다. 이탈리아 궁정에서 시작해 17세기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기까지, 초기의 정치적 수단을 넘어 예술로 살아남은 것은 그 중심에 우아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날아오르는 요정처럼, 인간이 아닌 천상의 존재인 것처럼, 발레는 그렇게 환상과 낭만의 세계를 대변해왔다. 올봄, 유니버설발레단은 1985년 초연해 40년간 ‘믿고 보는 레퍼토리’로 꾸준히 다듬어온 〈지젤〉(4월 18일~4월 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선보인다. 1984년 발레단 창단 이래 ‘영원한 지젤’로 불린 문훈숙 단장의 무대로도 잘 알려진 작품. 국립발레단은 존 노이마이어의 명작 〈카멜리아 레이디〉(5월 7일~5월 1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국내 발레단 최초로 공연한다. 강수진 단장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표 레퍼토리일 뿐 아니라, 국내에도 종종 내한한 덕에 수많은 팬이 고대하던 작품이다.

Photo by Ashley Taylor. ⓒ Wiener Staatsballett.
낭만 발레의 대명사, 클래식 발레 가운데서도 〈백조의 호수〉만큼이나 유명한 〈지젤〉은 요정과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라 실피드〉로 대표되는 초기 낭만 발레에 대한 향수에 힘입어 등장했다. 그야말로 이 작품은 꿈과 환상, 초자연 등 낭만주의의 현현 자체인 것. 테오필 고티에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춤추지 말라는 조언을 거스르고 결국 춤추다 죽고 마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에 슬라브 신화 속 ‘윌리’의 이미지를 덧입혀 이 대본을 완성했다. 윌리는 결혼식을 치르기 전 죽은 젊은 여자를 일컫는데, 이들은 해가 지면 무덤가에 찾아온 남성을 유혹해 끊임없이 춤추다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작품의 이야기는 이렇다. 중세 독일의 어느 마을, 젊은 시골 아가씨 지젤은 마을 청년으로 가장해 들어온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지젤을 사랑하는 시골 청년 힐라리온은 그가 의심스럽기만 한데, 역시나 알브레히트는 약혼자가 있는 귀족이었고 지젤은 이에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막이 전환되면 무대는 축제가 열리던 마을 풍경에서 무덤가로 바뀌어 있다. 윌리들은 이곳을 찾은 남자를 유혹해 춤추다 지쳐 죽게 만든다. 지젤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은 힐라리온 역시 같은 처지에 놓고, 오직 알브레히트만이 지젤의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살아 돌아가게 된다는 결말이다.

Photo by Ashley Taylor. ⓒ Wiener Staatsballett.
주인공 지젤의 순수한 사랑과 배신, 분노 그리고 비탄과 죽음으로 치닫는 전개는 그야말로 낭만주의적 감상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2막에 이르러 어스름한 안개가 내려앉은 무대는 보는 이에게 강렬한 사랑의 기억과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몰려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낭만 발레를 대표하는 ‘발레 블랑’의 풍경과 발목까지 길게 늘어지는 새하얀 로맨틱 튀튀, 면사포인 듯 수의인 듯 뒤집어쓴 하얀 베일은 발레 특유의 환상을 부각하기에 너무나 적확했으니 말이다.
〈지젤〉은 낭만 발레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발레라는 예술의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왔다. 남성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력 싸움 수단으로 존재하던 발레를 온전히 예술의 영역에 재위치시킨 것. 제니퍼 호먼스는 저서 〈아폴로의 천사들: 발레의 역사〉를 통해 〈라 실피드〉와 〈지젤〉이 최초의 현대화된 발레라고 짚으며, “(발레는) 더 이상 남성, 권력, 귀족적 몸가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 발레는 대신 여성들의 예술이 되었고, 몽상과 상상의 안개 자욱한 내적 세계들의 기록에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Photo by Ashley Taylor. ⓒ Wiener Staatsballett.
한편, 1978년 독일에서 초연한 존 노이마이어의 안무작 〈카멜리아 레이디〉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명 소설이자 연극과 오페라 등으로 꾸준히 변주되며 너무나 잘 알려진 〈춘희(동백 아가씨)〉를 토대로 한 작품.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더욱 유명한 이 이야기가 당대 프랑스 화류계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 3막 발레로 재탄생했다.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꼽히기도 하는 이 작품의 핵심은 쇼팽의 음악이다. 일반적 클래식 발레가 기본적으로 표제음악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카멜리아 레이디〉는 쇼팽의 피아노곡을 택해 1840년대 파리의 문화적 풍경을 시청각적으로 담아냈다. 1막에는 피아노협주곡 2번 전 악장을 그대로 사용했고, 2막과 3막에는 ‘화려한 대왈츠’ 1 · 3번, ‘3개의 에코세즈’, ‘프렐류드’ 2 · 15 · 17 · 24번, ‘발라드’ 1번, ‘화려한 대폴로네즈’ 등을 선택 · 구성했다. 마치 춤과 음악이 대화하는 듯한 연출은 그 시절 낭만 발레가 연출하던 것 이상의 로맨티시즘을 선사한다.
세상을 떠난 여주인공 마르그리트의 유품 경매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녀가 아르망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버지의 반대로 떠나지만 폐병에 걸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한 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부터 쓸쓸한 뒷모습까지 인생사의 모든 순간을 두루 훑어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아르망이 그녀의 일기를 보고 진실을 깨닫기까지, 그 다채로운 사랑의 순간이 왈츠, 폴로네즈, 야상곡, 전주곡 등 쇼팽의 음악과 어우러져 펼쳐진다. 대사 한마디 없지만 사랑과 이별에 빗댄 수많은 감정이 음악을 따라 흐르고, 무용수의 동작 하나, 손짓 하나까지 감정이 되어 다시 관객에게 전해질 수밖에.
글 김태희(공연 칼럼니스트)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