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TEFAF 마스트리흐트’에서 만난 반클리프 아펠
‘2025 TEFAF 마스트리흐트’에서 반클리프 아펠이 펼쳐 보인 헤리티지에 대한 찬란한 정의.
네덜란드 남부에 위치한 조용한 도시 마스트리흐트. 1992년 유럽연합의 기초가 된 역사적 조약이 체결된 이곳에는 매년 3월 또 하나의 특별한 연합이 성립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예리한 감식안을 지닌 아트 컬렉터와 애호가들이 예술을 중심으로 모이는 TEFAF(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가 열리기 때문이다. 고대 유물부터 회화, 조각, 디자인 오브제, 하이 주얼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언어들이 도시 전체를 거대한 박물관처럼 물들이는 이 자리에서 반클리프 아펠은 단연 중심에 우뚝 서 있다. 12년째 TEFAF에 참가하며 예술과 보석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메종은 올해도 그 어떤 회화나 조각보다 찬란한 아트 피스를 통해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헤리티지 컬렉션이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메종이 제작한 하이 주얼리와 프레셔스 오브제 중 예술성과 기술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150여 점의 아카이브 중 일부가 TEFAF에서 공개되었다. 그중 30여 점은 ‘현대적 감각으로 착용 가능한 예술’이라는 콘셉트로 선별했으며, 반클리프 아펠이 지닌 시간에 대한 철학, 창의성, 그리고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투영된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리티지 컬렉션은 단순히 빈티지 피스라는 단어만으로는 그 진의를 담기 어렵다. 디자인 드로잉, 거래 문서, 제작 기록 등 메종 내부의 아카이브 자료를 기반으로 진위 여부를 철저히 검증한 뒤 컬렉션에 포함하며, 원작과 다르게 변형되었거나 젬스톤 세팅이 교체된 작품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헤리티지 컬렉션은 단순한 보존을 넘어 ‘과거 예술을 오늘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일’에 대한 반클리프 아펠의 태도이자 철학이기도 하다.
대표적 피스 중 하나인 1930년대 제작한 리본 클립은 막 태동하던 파리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영감받았다. 곡선을 표현하기에 최적화된 플래티넘을 사용해 공기처럼 가볍고 유연한 리본의 실루엣을 구현하고, 그 위에 정제된 다이아몬드를 조밀하게 세팅해 완성한 이 작품은 조형미와 기능성, 그리고 장인의 손길이 맞닿은 예술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1955년 작 튀르쿠아즈 네크리스 역시 눈길을 끌었다. 센터에 자리한 볼드한 카보숑 컷 튀르쿠아즈를 중심으로 양쪽에 점점 크기가 작아지는 스톤 3개와 다이아몬드를 유려하게 세팅한 것이 특징이다. 전통적 각 면 커팅에서 과감히 벗어난 이 디자인은 메종의 대담함과 시각적 긴장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전시장에서 마주했을 때 이 주얼리는 한 점의 조각 같았지만, 막상 착용하니 일상 룩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반클리프 아펠이 추구하는 ‘삶 속 예술’이라는 개념은 이런 극적 대비 속에서 더 깊이 체감되었다. 1964년 작 마거리트 클립에 담긴 데이지의 생동감은 자연을 향한 메종의 열정과 이를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표적 예다. 한편, 1973년 작 앙주 네크리스는 옐로 골드, 진주,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전통적 인도 주얼리를 연상시키면서도 파리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묻어난다. 특히 이 네크리스는 브레이슬릿 2개로 변형 가능해 메종의 정교한 기술력과 실용적 미학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여준다. 1994년에 제작한 오르세 브레이슬릿은 반클리프 아펠의 대표 기술인 미스터리 세팅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팅 구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루비들이 빛의 파동처럼 손목 위를 타고 흐르며, 착용자에게는 일상 속 하나의 조각처럼 깊은 감동을 전한다. 이번 전시는 단지 과거 영광을 되짚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반클리프 아펠은 ‘예술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예술은 착용되고, 사용되며,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숨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시간과 형태, 착용성과 예술성의 긴장감 속 찬란히 빛난 반클리프 아펠의 피스. 그들이 보여준 헤리티지란 단순한 과거 유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직접 경험하고 체화할 수 있는 감각적 정의이자 살아 있는 아름다움의 한 형태였다.
Interview with Alexandri ne Maviel Sonet
반클리프 아펠의 패트리모니 및 전시 부서 디렉터로 재직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 과거 경력이 메종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메종이 보유한 방대한 아카이브를 연구하고, 작품을 수집하거나 보존하는 일부터 전시를 기획하고 일반 대중이 주얼리 세계를 보다 가까이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반클리프 아펠은 지식과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고객은 물론 메종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각 피스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제 역할 중 하나입니다. 반클리프 아펠과는 2016년 싱가포르의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에서 일하던 시절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당시 광물학에서 주얼리로 이어지는 소재의 여정을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하며 반클리프 아펠과 협업했는데, 과학과 주얼리를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메종의 시각과 전시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감명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 만남이 지금 인연으로 이어졌고요.
반클리프 아펠은 올해로 12년째 TEFAF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TEFAF는 ‘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파인 아트의 정수를 보여주는 플랫폼입니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 특별한 자리에서 주얼리가 단순히 감상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하면 착용 가능한 하나의 완전한 예술 장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얼리를 ‘몸 위에 놓이는 예술’로 바라봅니다. 감상과 경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드문 매체로서 주얼리는 예술의 일상적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상적 예이기도 합니다.
종종 혼동되는 ‘패트리모니 컬렉션’과 ‘헤리티지 컬렉션’의 차이를 직접 설명해주신다면. 패트리모니 컬렉션은 1970년대 자크 아펠에 의해 시작된 컬렉션으로, 반클리프 아펠이 1906년 설립 이래 쌓아온 역사, 고유의 스타일, 그리고 장인정신을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뮤지엄 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종의 정체성을 아카이빙하고 전시하는 목적을 지닌 컬렉션이죠. 이에 비해 헤리티지 컬렉션은 여전히 착용 가능한 상태의 피스로 구성됩니다. 쉽게 말해, 티아라처럼 일상에서 활용하기 어려운 주얼리는 자연스럽게 패트리모니 컬렉션에 포함되지만, 시계나 브로치처럼 무리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작품은 헤리티지 컬렉션으로 선별됩니다. 두 컬렉션의 가장 큰 차이는 보존의 기준에도 있습니다. 패트리모니 컬렉션은 시간의 흔적이 일부 남아도 의미 있는 아카이브로 간주되지만, 헤리티지 컬렉션은 완벽한 보존 상태를 유지한 작품만 포함됩니다. 즉 헤리티지는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아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죠.
헤리티지 컬렉션의 선정 기준 중 하나가 ‘원형 그대로 보존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검증 과정이 궁금합니다. 반클리프 아펠은 모든 작품의 진위성을 메종의 아카이브를 통해 철저히 검증합니다. 디자인 드로잉과 제작 기록, 거래 문서 등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미세한 사이즈 조정이나 스톤 교체 같은 변화까지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죠. 간혹 소장자가 개인적 사유로 리사이징하거나 보석을 교체하는 경우도 있지만, 설령 그 피스가 외형상 아무리 아름답고 귀중하더라도 원형이 훼손되면 헤리티지 컬렉션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우린 이를 거장의 회화에 임의로 덧칠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주얼리 역시 작품이자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TEFAF에서 소개된 헤리티지 컬렉션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 있다면요.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 헤리티지 컬렉션은 물론 패트리모니 컬렉션 역시 각각의 작품 모두 고유한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지녀 어느 하나를 꼽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번 TEFAF에서는 반클리프 아펠이 1930년대 제작한 클래식한 화이트 피스부터 1990년대 선보인 모던하고 대담한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반클리프 아펠이 시대를 초월해 표현해온 미학의 스펙트럼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특정 작품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시대와 스타일을 아우르며 메종의 예술적 시선을 조명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전시가 더 뜻깊게 느껴집니다.
에디터 이주이(jylee@noblesse.com)
사진 반클리프 아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