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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춤이고, 춤은 모든 것이다

ARTNOW

고전발레의 엄격한 문법을 재해석하고, 인간 존재의 원초적 감정을 춤으로 빚어온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 그는 발레의 역사와 전통을 현재의 무대 위에서 새로 숨 쉬게 하며, 미래를 예고하는 예술 언어로 바꿔놓는다.

자신을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 지칭하며, 죽음을 상징하는 마스크를 들고 프로필을 촬영한 사람. 7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습실을 떠나지 않은 채 이제는 발레를 넘어 무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매체까지 창작 영역을 확장하는 예술가.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뭇 진중한 주제를 두고도 이따금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머금은 채 우리 삶에 꽤 묵직한 질문을 툭툭 던지는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은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고, 20대에 들어 슈투트가르트 발레에서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커리어를 쌓았다. 이후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ederlands Dans Theater, NDT)에서 예술감독으로 25년, 또 상주 안무가로 10년을 보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온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정수는 단연 ‘발레’다. 그는 권위 있는 예술로서 그저 엄격한 과거의 유산으로 남을 뻔한 발레의 역사와 전통을 재해석해 동시대 무대로 옮겨왔다. 킬리안은 마리우스 페티파(Marius Petipa)의 고전발레부터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지나 게오르게 발란친(George Balanchine)이 남긴 모던발레로 이행까지, 발레의 역사를 존중하고 계승하며 자신의 시대에 걸맞은 발레를 창조해냈다. 프랑스 궁정 시대에 예술로 인정받기까지 차근차근 정립된 엄격한 테크닉을 토대로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기교를 창조하고 음악적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한편 그는 자신의 예술관 한가운데에 인간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두고, 우리 삶에 결부된 다양한 감정을 춤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다. NDT 재직 시절 단체를 성장시켜 중심 단체인 NDT I 외에 22세 이하 무용수를 위한 NDT II, 은퇴해야 하는 나이로 여기던 40세 이상 무용수를 위한 NDT III를 창단할 정도로 ‘모든 인간은 춤춰야 한다’는 데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40년을 건너뛰어 이곳,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한 작품에서 그 힌트를 찾아내도 좋겠다. 오는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그의 대표작 세 편을 선보이는 ‘킬리안 프로젝트’를 새롭게 개관한 GS아트센터에서 국립발레단의 무대로 만날 수 있다.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이르지 킬리안은 프라하 무용학교와 영국 왕립 발레학교에서 수학한 뒤 슈투트가르트 발레에서 무용수 · 안무가로 데뷔했다. 1976부터 1999년까지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 예술감독을 역임한 후 상주 안무가로 활동하며 〈작은 죽음(Petite Mort)〉, 〈잊힌 땅(Forgotten Land)〉 등 100여 편의 작품을 창작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라녀-나사우 훈장과 니진스키상, 브누아 드 라 당스상 등 다수의 국제 무용상을 수상했다. Photo: Oioioi.

‘킬리안 프로젝트’를 통해 선보이는 작품 중 ‘블랙 앤 화이트 발레(Black and White Ballets)’로 불리는 대표작 여섯 편 중 주요 작품 두 편이 포함됩니다. 1988년부터 1991년 사이에 초연한, 고유의 작품 철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한 평론가에 의해 ‘블랙 앤 화이트 발레’라고 불리게 된 이 작품들은 제 창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대표합니다. 이 시기에 저는 과도한 장식 없이 춤의 본질에 집중해야 할 필요를 느꼈죠. 마치 좋은 수프를 만드는 것과 같아요. 많은 재료를 넣지만, 결국에는 아주 맑고 훌륭한 국물을 얻게 되는 것처럼요. 이번에 선보이는 세 작품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그간 제가 선보인 무대, 의상 디자인, 사진, 설치 등 방대한 작업의 극히 일부일 뿐이죠. 제 작업은 어떤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으며, 관객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작품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작품은 결국 삶과 죽음,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예술가는 사랑과 죽음을 다룹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에로스적 사랑, 낭만적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춤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탁월함에 대한 사랑… 무엇이 당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흥미롭게 하며,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나요? 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 혹은 모티브, 무대 디자인과 조명, 그리고 음악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에는 18세기 고전파를 대표하는 모차르트와 더불어 각각 20세기 영국 현대음악과 미니멀 음악으로 잘 알려진 벤저민 브리튼, 스티브 라이시 음악을 사용합니다. 춤을 위한 음악의 다양성이 눈에 띕니다. 할아버지는 지휘자, 어머니는 무용수, 아버지는 합창단에서 활동할 만큼 음악적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저 역시 피아노를 오랫동안 연주했고요. 그렇다 보니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음악을 선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최근에는 음악을 선택하는 데서 나아가 제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기 위해 직접 작곡을 하기도 합니다.
〈잊힌 땅(Forgotten Land)〉(1981)에 사용한 브리튼의 ‘진혼교향곡’은 슬픔에서 분노, 위로와 치유로 이어지는 선율이 아니라, 작곡가의 생애에 각인된 바다의 이미지를 차용했습니다. 음악은 당신의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개인사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은 건 의외의 지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 온 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작곡가 브리튼이 태어난 이스트앵글리아는 끊임없이 바다의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지역입니다. 땅과 바다를 가르는 해안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지요. 바다에 잠식되는 땅의 이미지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이 작품의 주요한 영감이 됐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춤추는 세 연인을 그린 〈생의 춤(The Dance of Life)〉(1899~1900)은 인생의 3단계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국립발레단의 무대로 선보이는 이르지 킬리안의 〈6개의 춤(Sechs Tänze)〉. © Nederlands Dans Theater.

이르지 킬리안의 예술 세계를 기념해 노르웨이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에서 5월 29일부터 6월 14일까지 열리는 킬리안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내일 이전의 날(Day before Tomorrow)〉. Photo: Jörg Wiesner.

발레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정제된 움직임은 당신의 작품에서 가장 상기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레라는 전통적 예술 양식의 유산과 새로운 창조 사이에서 안무가로서 어떻게 중심을 잡나요? 〈추락하는 천사들(Falling Angels)〉(1989)은 고전발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여성 무용수에 대한 헌사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의 움직임까지 춤으로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안무를 시작한 열한 살 때부터 제 관심사는 언제나 여성이었습니다. 여성의 몸과 움직임이야말로 진정한 춤이라 느꼈고, 지금까지도 저를 매료시킵니다. 그 작품은 무용수로 하여금 훈육과 자유라는 양극단을 오가게 합니다. 자유와 규율은 춤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도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스티브 라이시의 음악도 두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고요.
얼굴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하얀 분을 바르고 당대의 복식을 갖춰 입은 채 등장해 익살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6개의 춤(Sechs Tänze)〉(1986)에선 모차르트의 ‘6개의 독일 무곡’을 토대로 웃음 이면의 우울을 복합적으로 그려냅니다. 안무가가 바라본 모차르트는 어떤 예술가인가요? 모차르트의 인생은 고통스러우리만큼 짧았지만, 그 가운데 풍요와 환상, 익살과 광기가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삶이 곧 모차르트가 추구한 정신이며, 결국 우리 인생은 더 깊고 의미 있는 것을 위한 가면극 또는 드레스 리허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처음 활동을 시작한 슈투트가르트 발레에서 만난 존 크랭코(John Cranko)가 당신에게 미친 영향은 당신이 이른 시기에 안무가의 자질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5월 서울시발레단에서 공연한 요한 잉에르(Johan Inger)는 NDT에서 당신과 함께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킬리안과 함께 작업하며 파트너링 기술,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 단편 작품에 본질을 응축해내는 능력을 계승했다.” 대작을 완성하기보다는 다작의 단편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사가 있는 전막 발레 작품을 만드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활자화된 언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움직임을 만드는 건 제게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게오르게 발란친도 이렇게 말했죠. “‘나는 내 시어머니가 미워요’라는 주제를 대체 어떻게 안무해야 할까요?”

〈추락하는 천사들(Falling Angels)〉은 여성 무용수들의 에너지 넘치는 표현력을 집약한 안무가 돋보인다. © 국립발레단.

© 국립발레단.

70대에 접어든 지금까지 창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다뤄보고 싶은 주제 혹은 음악이 있나요? 계획 중인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내 감정과 관점을 서로 다른 예술 형식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니까요. 최근에는 설치 작품과 영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5월 29일부터 6월 14일까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춤, 디자인, 사진, 설치, 영화를 아우르는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회고전이 열립니다.
1980년대 작품으로 구성한 ‘킬리안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초연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여러 작품이 여전히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파리 오페라 발레나 볼쇼이 발레 같은 발레단과 NDT를 비롯해 컨템퍼러리 레퍼토리를 다수 보유한 단체에서 공연하는 것은 미감의 차이를 일으킬 텐데, 세월을 관통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작품은 무용수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고, 또 오늘의 사람들을 통해 새롭게 이야기됩니다. 모든 것은 무용수 개개인의 이해와 개방성에 달려 있습니다. 무용수는 모든 스텝과 제스처, 청중과 공유하는 감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작품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발레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은 당신의 작품에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요? 그 문제에 대해 저는 창작자와 공연자, 관객을 연결하는 ‘마법의 삼각형’을 이야기합니다. 이 삼각형을 이루는 각 변의 길이, 즉 창작자와 공연자, 공연자와 관객, 관객과 창작자 사이의 거리는 반드시 동일해야 합니다. 저는 관객이 어떠한 기대나 선입견 없이 극장에 들어와 그저 앉아서 휴식을 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춤, 그 순수한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예술가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춤은 모든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은 춤이지요. 저는 4월 21일 월요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여러분에게 가 닿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손가락과 손을 움직이면서 말이죠. 이 또한 춤 아닐까요?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김태희(무용 평론가)